•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1. 장원과 별서도
  • 16세기 사대부 문화와 향촌 원림도
조규희

중앙 정계의 진출을 기반으로 성장한 재지 사족들의 향촌 원림은 그들의 경제적 자족을 바탕으로 향촌에 대한 지배력을 투사한 장소인 한편 문학과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80)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강호 시가를 재지(在地) 사족들의 향촌의 지배 세력으로서의 권위가 자연을 통해 미적으로 전환되어 나온 것으로 본 연구는 김창원, 『강호 시가의 미학적 탐구』, 보고사, 2004 참조. 향촌 원림의 발전은 16세기 이래 농장제를 바탕으로 한 사족층의 성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사족들은 활발하게 토지를 매입하고 개간하며 장원을 확대해 나가 중종(재위 1506∼1544) 전반기에 이르면 일반 백성 가운데 토지 소유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정도로 양인 농민층의 토지 방매(放賣)와 유실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1515년(중종 10) 무렵에는 각 지방의 토지가 몇 해 안에 소수의 수중에 장악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양천제(良賤制)의 동요와 함께 16세기의 지주들은 소유 토지에 노비를 갖추고 농장 경영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81)김성우, 『조선 중기 사족층(士族層)의 성장과 신분 구조의 변동』,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5∼6쪽 및 40∼49쪽.

이들은 지대(地代)를 시장에 투입하여 부를 재생산한 후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는, 토지 매득(買得)의 방법을 통하여 사유 토지를 넓혀 갔는데, 토지를 둘러싼 경제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 시기에는 토지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82)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탐구당, 2003, 448쪽.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토지 매매의 일면은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일기에 적힌 전답의 이중 매매(二重賣買)에 관한 다음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무진(1568) 정월 초7일, 송정지(宋庭芝)가 기유년(1549)에 우리집 암소를 빌려갔다가 잡아먹어 버리고 그 홈대 다릿목의 논 2두 5승지기를 바쳤는데 그 뒤 7년 을묘(1555)에 다시 송흥(宋興)에게 이중으로 팔아먹었다. 그런데 그 문서가 전일에 나와서 송흥에게 보여 주니 송흥이 말을 못하고 승복을 하였으므로 오늘은 광문(光雯)을 시켜 그 논의 한계를 둘러보게 했다.83)유희춘(柳希春), 담양 향토 문화 연구원 옮김, 『미암 일기(眉巖日記)』 제1집(1567. 10∼1568. 11), 담양 향토 문화 연구원, 1992, 141∼142쪽.

당시에 사대부는 대부분 녹봉만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이런 연유로 부모 봉양, 고령의 나이, 학문 수양, 은거 등의 이유를 내세워 벼슬을 그만두고 귀거래(歸去來)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휴가를 받거나 하여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지방관들에게 물자 등의 도움을 청해서 땅을 사들이거나 집을 지었다. 유희춘의 일기에서도 녹봉이 생활 보장의 수단이 되지 못하였음을 그의 일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경제적 기반은 해남과 담양에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임시로 남의 집을 빌려 거처하면서 녹봉은 주로 사치품이나 손님 접대에 사용하였다.84)유희춘의 『미암 일기』를 토대로 한 16세기 사대부의 경제 생활에 관한 분석으로는 이성임, 「16세기 조선 양반 관료의 사환(仕宦)과 그에 따른 수입-유희춘의 『미암 일기』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45, 역사학회, 1997, 91∼146쪽 ; 이성임, 「조선 중기 양반의 경제 생활과 재부관(財富觀)」, 『한국사 시민 강좌』 29, 일조각, 2001, 68∼92쪽 ; 정창권 풀어 씀,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사계절, 2003, 35쪽.

고향인 예안의 집 옆에 명농당(明農堂)을 짓고, 촌거(村居)하는 벽 위에는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 놓아 향촌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드러냈던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만년에 잇따라 왕에게 벼슬을 내놓고 ‘퇴귀전리(退歸田里)’하기를 요청하였다.85)김안국(金安國), 『모재집(慕齋集)』 권3, 「송이동지배중휴관귀향명현보(送李同知棐仲休官歸鄕名賢輔)」. 그는 귀거래를 허락받지 못하다가 76세인 1542년(중종 37)에 전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86)이현보(李賢輔), 『농암집(聾巖集)』, 민족문화추진회, 1988, 속집(續集), 연보(年譜) 권1, 462∼463쪽. 그가 1542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영지산(靈芝山)에다 신축 건물을 지은 것이었다.87)이현보, 『농암집』, 속집, 연보 참조.

당시 관직에 있던 사림의 귀거래에 대한 동경은 관직을 유지하는 것과 향촌에 소유한 장원에 대한 지배력 사이의 고민이기도 하였다. 이현보는 형조 참판으로 서울에서 벼슬하던 1540년(74세)에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고향 별서 원림의 승경을 담은 분천이천원림도(汾川伊川園林圖)를 제작하여 침상의 병풍 위에 걸어 두고 그림에다 제시를 썼다.88)제시의 내용은 “揭汾川伊川園林圖於屛上 先生歸思益切 思兩地泉石園林之勝 圖揭寢屛 題詩其上.” 당시에 이현보가 제작하였던 원림도는 예안 분천의 원림과 영주 이천의 원림을 그린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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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성(李義聲)의 하외도십곡병(河隈圖十曲屛)
이의성(李義聲)의 하외도십곡병(河隈圖十曲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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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성(李義聲)의 하외도십곡병(河隈圖十曲屛)
이의성(李義聲)의 하외도십곡병(河隈圖十曲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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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직접 돌보지 못하는 향촌의 별서를 그림으로 그려 둔 경우는 역시 영남 출신의 16세기 문신이었던 유중영(柳仲郢, 1515∼1573)이 고향에 있는 자신의 별서와 그 주변 승경을 화원에게 그리게 한 하외상하낙강일대도(河隈上下洛江一帶圖)에 관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황(李滉)은 제유언우하외화병병서(題柳彦遇河隈畵屛竝序)에서 하외를 비롯한 낙동강 일대의 승경을 그린 이 그림이 유중영의 넓은 장원과 주변 승경을 그린 병풍임을 밝히고 있다. 이황은 유중영이 몸은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나 고향을 그리워하여 귀거래의 뜻을 담아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언급은 이 작품보다 조금 앞서 제작된 이현보의 분천이천원림도의 제작 동기가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이현보가 고향으로 귀거 래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병풍으로 만들어 침상에 두었던 것이라는 연보(年報)의 기록과 유사하다. 또한, 이황 자신의 별업(別業)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언급하며 하외화병(河隈畵屛)에 덧붙인 시에서 “나는 그대로 인하여 강상의 흥을 돋구니 봄바람이 일면 밭갈이로 돌아가리”라고 적어 이 시기 중앙 정계에 진출한 재지 사족들이 이러한 그림을 대할 때 느끼는 전원으로 귀거래하고 싶은 공통된 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89)이황(李滉), 『퇴계집(退溪集)』 권5, 속내집(續內集), 「제유언우하외화병 병서(題柳彦遇河隈畵屛竝序)」.

이러한 재지 사족들의 정서는 자신의 향촌 원림을 대상으로 한 많은 문학 작품을 낳았다. 그런데 이현보나 유중영의 경우에서 보듯이 향촌의 장원을 대상으로 그림을 제작한 이들은 대지주 출신으로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한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별서도들이 귀거래한 시절이 아니라 이들이 벼슬길에 있을 때 제작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 이 점은 16세기에 제작된 향촌 원림도가 유중영의 하외상하낙강일대도의 화제(畵題)에서 보듯이 자신이 소유한 넓은 지역과 그 주변의 승경을 그리는 전대 훈구파들의 별서도 제작 전통을 잇는 것임을 말해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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