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2. 원림도에 담은 가문의 문화적 자부심
  • 17세기 사대부가의 문화적 인식과 장원 그림
조규희

재산을 나눌 때 적는 허여문기(許與文記)에는 “무릇 너희들은 내가 전하는 바 조상께서 남긴 적지 않은 전민(田民)과 가재(家財) 등을 자자손손 내려가면서 길이 전하며 잃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전통적인 조선시대 사족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100)「이우양 허여 문기(李遇陽許與文記)(1452)」, 이수건 편, 『경북 지방 고문서(古文書) 집성(集成)』,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1, 128쪽. 그러나 전란으로 이를 지켜내지 못했던 17세기 사대부가에서는 남아 있는 집안의 가보들을 잘 보전해 두려는 생각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선대의 별서를 회상하여 그린 그림뿐 아니라 재건한 별서를 기념한 그림 역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전북 남원에 위치한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 1523∼1589)의 처소를 그의 손자 방원진(房元震)이 재건하고 1609년(광해군 1)에 재건한 정사를 그린 것이다.101)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에 관해서는 박은순, 「사계정사와 사계정사도-조선 중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일례(一例)」, 『고고 미술사론』 4,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1994 ; 조규희, 앞의 글, 2006, 154∼162쪽. 방원진은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 유생으로 3년간 있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낙향하였다.102)『만오선생실기(晩悟先生實記)』 奎4932 해제.

따라서 1609년에 재건된 사계정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선세별서를 재건하는 일이자 낙향한 후 거처할 자신의 별서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사계정사기(沙溪精舍記)에서 지리산이 영남과 호남에서 으뜸가는 산이며 지리산 아래에서 으뜸으로 큰 곳이 남원부이고 남원 안에서는 오직 방씨(房氏) 가문이 가장 영예를 누렸다고 하면서 현재 방씨 가문에서는 방원진이 가장 세상에 이름이 나고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허균은 또한 방원진이 “사계에 있는 선업이 병화에 탕진되자 빨리 정사를 지어 그 옛 모습을 복구하고 거기서 살았다.”고 하여 전후 복구 사업을 신속하게 마친 방원진이 재건한 사계정사에서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103)허균(許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7, 「사계정사기(沙溪精舍記)」 : 『국역 성소부부고』 Ⅱ, 민족문화추진회, 1989, 115∼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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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정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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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하는 임진왜란 후에 제작된 별서도들은 묘도(墓圖)처럼 지형도(地形圖)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대개 족보와 별도로 소장하는 묘도, 혹은 산도(山圖)는 묘소의 위치와 지형 등을 기록하여 선조묘의 실전(失傳)을 막기 위한 것으로 주위 지형이나 지물을 상세히 기술하여 후손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한 지도식 그림이었다.104)『한국 고지도(古地圖)』, 한국 도서관학 연구회, 1977, 181쪽. 이 시기의 별서도 또한 지형도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묘소도의 제작 목적과 기능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음을 말해 준다. 한 집안의 별서가 대체로 선영이 있는 곳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묘소도 자체도 실상 그들 집안의 소유지인 묘전(墓田)이자 별서를 기록해 두는 측면도 있었다.

이징(李澄)이 1623년(인조 1)에 여항 문인의 시조격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의 요청에 의해 그의 별서인 임장(林庄)을 그린 임장도(林庄圖)와 이 그림이 분실된 후 후대에 정선(鄭歚, 1676∼1759)이 다시 그린 임장후도 (林庄後圖)에 관한 기록은 이러한 장원 그림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유근(柳根)은 영국동임장도제영(寧國洞林莊圖題詠)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양주의 누원(樓院) 서쪽에 영국동(寧國洞)이 있는데, 영국동 한가운데는 정암(靜庵) 선생의 서원을 중건하고 있고, 영국동 밖에는 바로 큰길이다. 79세가 된 유희경의 옛 장원이 영국동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 지금 띠집을 엮어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 한다. 용면(龍眠, 이공린)과 이징의 필세를 빌려 그림을 그렸다.105)유희경(劉希慶), 『촌은집(村隱集)』 권3, 「영국동임장도제영(寧國洞林莊圖題詠)」.

이 글은 유희경이 구장(舊莊)에 새로 모옥(茅屋)을 짓고 난 뒤 이 그림의 제작을 의뢰하였음을 알려 준다. 유희경은 비록 낮은 신분이었으나 예(禮)를 배워 사대부가 및 국상(國喪)에까지 참여하여 집례자로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 정유재란 때 중전을 호위한 일, 1609년(광해군 1) 국가의 재정이 어려울 때 사신 접대 경비 문제를 잘 처리하여 통정 대부를 하사받은 점은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것이라는 근거로 지적되기도 한다.106)한태문, 「침류대 시사(枕流臺詩社) 결성에 대한 시고(試攷)」, 『한국 문학 논총』 12, 한국 문학회, 1991, 77∼79쪽.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활발히 교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영국동임장도(寧國洞林莊圖)에 이호민, 유근, 신흠, 윤방, 김상용, 김상헌 등의 당대 저명 문사들이 제시를 쓴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도봉산 계곡 일대의 영국동은 유희경의 외가 선영이 있던 곳으로 유희경은 이곳에 새로 별서를 지어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한 듯하다. “도봉산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 남은 생을 보내려 하였으나, 자손들의 권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은 그림을 만들어 그 감회를 기탁한 후 여러 공들에게 그림에 대한 시문을 청하였다.”라는 장유(張維)의 글은 새로 지은 별서를 기념한 임장도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임장으로 이거하고자 하였던 노년의 유희경에게 큰 위안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107)유희경, 『촌은집』 권3, 「침류대록(沈流臺錄) 영국동임장도제영부(寧國洞林莊圖題詠附)」.

따라서 영국동임장도는 유희경이 1623년(인조 1)에 새로 지은 별서를 기념하고 기록해 두기 위해 제작한 것이며, 그림을 토대로 가전보첩(家傳寶帖)을 제작하려는 계획 아래 그림은 당대 최고 화사인 이징에게 주문하고, 제영은 당대의 명사들에게 청하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어느 날 유희경이 찾아와 소매 속에서 그림을 꺼내 보여 주며 화면에 제시를 부탁하였는데, 화축 속의 그 그림은 ‘유거지화(幽居之畵)’로 여산에서 모옥을 짓고 사는 흥취를 불러일으켰다고 하였다.108)유희경, 『촌은집』 권3, 「침류대록 영국동임장도제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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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흠의 사천장팔경도
이신흠의 사천장팔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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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징이 그린 이 작품이 후대에 전권(田券)과 함께 도둑을 맞자 후손들이 정선에게 다시 그림을 의뢰하였다.109)임장후도(林庄後圖)에 관해서는 조유수(趙裕壽), 『후계집(后溪集)』 권5, 「유촌은임장후도 차일원운(劉村隱林庄後圖次一源韻)」 ; 김시민(金時敏), 『동포집(東圃集)』, 「제유촌은임장도 증기후손(題劉村隱林庄圖贈其後孫)」 참조. 토지 문서를 후손들이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은 이것이 없어지면 집안에서 여러 세대 동안 소유하였던 땅의 소유권은 순식간에 흔들리며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토지 문서를 지니고 있어야 지주로서 경제적 자산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110)동일한 현상을 중국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티모시 브룩, 이정·강인황 옮김, 『쾌락의 혼돈-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이산, 2005, 87∼88쪽). 이렇게 볼 때 토지 문서와 임장도를 함께 도둑을 맞았다는 사실과 전권은 잃어버렸지만 임장후도(林庄後圖)를 다시 제작하였다는 점은 이러한 별서도가 장원의 형승을 충실히 담고 있어 땅 문서의 회화적 재현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가문의 보화로 후손들이 귀하게 여겼을 가능성을 말하여 준다.111)이 점에 관해서는 조규희, 「소유지(所有地) 그림의 시각 언어와 기능-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와 시각 문화』 3,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2004 ; 조규희, 앞의 글, 2006, 153∼154쪽 참조. 또한, 이 작품을 이징에 이어 정선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은 소유지 자체의 가치만큼 소유지를 기록한 별서도가 갖는 작품 자체의 가치도 중히 여겨졌음을 알려 준다.

이렇게 사대부가에서 대대로 전해진 장원 그림들은 오랜 세월 동안 분실된 경우가 많아 전하는 예가 적지만 17세기 초반에 제작된 사천장팔경도(斜川庄八景圖)는 당시에 제작된 별서도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천장(斜川庄)은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경엄(李景嚴, 1579∼1652) 부자의 별업으로, 사천장팔경도는 이징과 함께 인조 연간(재위 1623∼1649)에 명성을 떨친 이신흠(李信欽, 1570∼1631)이 그린 것이다.112)강주진(姜周鎭), 「사천장세전보묵시첩영인서(斜川庄世傳寶墨詩帖影印序)」, 『사천장세전보묵목록(斜川庄世傳寶墨目錄)』, 보진재(寶晋齋), 1972, 1∼7쪽. 이 작품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2006, 140∼150쪽 참조. 이 작품은 이들 부자와 친교가 있는 문사들에게서 받은 시문들로 꾸민 『사천시첩(斜川詩帖)』에 들어 있다.113)『사천시첩(斜川詩帖)』에는 조선 중기 문인 34명이 쓴 친필 시문 70여 폭과 이신흠(李信欽)의 그림 다섯 점이 수록되어 있다. 이경엄은 1617년(광해군 9)부터 1646년(인조 24)에 걸쳐 당대의 대표적 문사들과 명필가 34명의 시문으로 시첩을 만들었는데, 원래 하나의 시권을 첩으로 다시 분첩하면서 시문을 쓴 순서가 섞인 것으로 보인다. 시문을 쓴 문사들은 대부분 이경엄 부친의 지인으로서 이호민은 이들과 함께 이안눌의 동악 시단(東岳詩壇)과 유희경의 침류대 시사(枕流臺詩社)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유하였다.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은 1617년 여름에 쓴 제사천장팔경도(題斜川庄八景圖)에서 사천의 팔경인 문암동천(門巖洞天), 건지송백(乾支松栢), 용수청람(龍峀靑嵐), 운봉호월(雲峯皓月), 사사심진(舍寺尋眞), 침교권경(砧橋勸耕), 군성효각(郡城曉角), 제탄모범(蹄灘暮帆)을 읊고 있는데, 팔경 속 지명들은 이 그림 속의 각 경물 옆에도 적혀 있다.

임숙영은 사천장시권서(斜川庄詩卷序)에서 이경엄이 “몸은 도성에 머물면서 세상과 부침(浮沈)하였지만 생각은 강호(江湖)에 있었다.”고 하면서 “풍속은 더욱 본업(本業, 농업)에 힘을 기울였다. …… 골짜기에서 쉬며 지낼 때는 농사일을 권하면서 함께 즐거워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 글은 이 경엄을 사천 장원을 돌보는 전주(田主)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는데, 사천장팔경도에는 농부들이 밭가는 장면이 보이고 이러한 장원 주변을 살피며 보고를 받는 모습으로 이경엄이 묘사되어 있다.114)임숙영(任叔英), 「사천장시권서(斜川庄詩卷序)」, 『사천시첩(斜川詩帖)』 춘첩(春帖).

『선조실록』에 따르면 1601년(선조 34) 4월 18일에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전후 복구 사업의 시급한 과제로 권농 정책을 강조하였다고 하는데,115)『선조실록』 권136, 선조 34년 4월 18일(을유). 사천팔경 중 하나인 침교 아래 넓은 들판에서 농부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일컫는 ‘침교권경(砧橋勸耕)’의 단어 선택도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듯하다.

이 작품은 소유지의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지명의 부기(附記)와 사천장 주변의 넓은 지역을 한눈에 조감하게 한 부감법(俯瞰法)의 사용, 원형의 전도식(全圖式) 구도 등 회화식 지도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그러나 기록의 대상이 별서와 그 주변의 승경이어서 작품 자체는 기록화적인 성격과 함께 감상적 측면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자신의 소유지를 명소로 만들기 위하여 주변에 팔경의 이름을 붙이고 당대 여러 명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장원에 관해 시문을 쓰게 하는 것은 자신의 가문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소유지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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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충효의 석정처사유거도
전충효의 석정처사유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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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화가 전충효(全忠孝)가 그린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 역시 그림에 지명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회화식 지도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이 작품의 일차적 제작 목적 역시 소유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적 정보를 주기 위함이었음을 알려 준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읍성이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화면의 동남쪽에서 부감한 시각으로 화면의 북서쪽을 상당히 축약하면서까지 그 너머에 보여 주고 싶어 한 것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즉, 이곳이 바다에 접한 곳임을 알려 줄 뿐 아니라 화면 북쪽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산 너머 위치한 바다 저편 섬의 먼 산 위에다 봉수대(烽燧臺)를 의도적으로 삽입시키고 있다. 산도(山圖)와 같은 명당도 형식의 이 그림에 이렇게 지표와 같은 작품 속의 주요 경물들을 그려 넣어 지형도적 성격을 더하였다.116)이 작품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1994 참조.

석정처사유거도는 ‘처사’의 ‘유거도’라는 화제를 사용하여 산수간에 은거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화면 중앙에 위치한 집 안 건물에서 강학(講學)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려 주인공이 향촌의 지도적 역할을 한 지식인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이 집을 중심으로 좀 더 넓은 지역을 담고 있어 실제로는 집안의 소유지를 부감시로 조망하여 지형적 특징들을 압축하여 대폭의 화축에 담아 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자신의 처소를 중심으로 한 장원 일대를 대폭의 화면에 담아 벽상에 걸어 두기 위한 것이었다.

영남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꼽히는 인물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고향이면서 부임지인 경상도 선산의 부사(府使)로 재임할 때 화공에게 명하여 선산의 산천과 마을, 창고, 관아, 역 등을 자세히 묘사한 선산지리도(善山地理圖)를 제작하게 하여 황당(黃堂)의 벽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선산의 회화식 지도를 작성하면서 그림 위에다 선산의 십절(十絶)을 읊은 제시를 적기도 하였는데, 고향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서황저작린영친시권(書黃著作璘榮親詩卷)에서 “선산에는 예로부터 선비가 많아서 영남의 반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재사(才士)가 마을을 빛내었고 조정에서 높은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김종직은 “천하에는 천하를 그린 그림이 있고 한 나라에는 그 국가를 그린 그림이 있으며 한 읍에는 그 읍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하였는데,117)김종직(金宗直), 『점필재집(菟畢齋集)』 권13, 「윤료작선산지리도제십절기상(允了作善山地理圖題十絶其上)」 ; 권14, 「서황저작인영친시권(書黃著作璘榮親詩卷)」. 사대부가에서 주문한 한 집안의 장원을 담은 그림들은 김종직의 표현을 빌린다면 “일가유일가지도(一家有一家之圖)”의 성격을 갖는 작품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집안에서 특별한 제작 목적을 갖고 집안의 소유지를 그려 벽면에 걸어 둔 작품은 김종직이 제작한 읍도(邑圖)처럼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그곳에 미치는 가문의 영향력을 시각화한 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집안의 자긍심이 담긴 이러한 사적인 소유지 그림들을 남긴 집안은 대부분 그 지역에서 상당한 부를 지닌 명망가(名望家)였다.

이렇게 향촌 사족가에서 장원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 주려면 대폭의 화축 형식이 감상용 화첩 형식보다 적절하였을 것이다. 다만, 회화식 지도처럼 소유지를 기록하는 한편 주변의 명승과 명소를 담아 감상화적인 측면도 유지하였다는 점이 군현 지도류나 회화식 지도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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