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2. 원림도에 담은 가문의 문화적 자부심
  • 원림도 속의 가옥도와 은자 이미지
조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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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의 농수정도
조세걸의 농수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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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의식이 강화되고 종가(宗家)가 중시되던 17세기 후반 이후 사대부가에서는 장원을 그리면서 별도의 화폭에 집의 전경을 주된 대상으로 그린 가도(家圖)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강원도 화천 사내면에 마련한 별서를 그린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의 농수정도 (籠水亭圖)나 경북 상주 노곡(魯谷)의 원림을 그린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누항도첩(陋巷圖帖)』 중 식산정사도(息山精舍圖),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의 대전시 중구 무수동의 향저를 그린 무수동도(無愁洞圖) 병풍 중 유회당도(有懷堂圖)와 유회당종택도(有懷堂宗宅圖)는 모두 일종의 건축도 같은 형식으로 집의 전경을 상세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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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회당도
유회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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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부의 식산정사도
이만부의 식산정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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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도 같은 이러한 가옥도는 소유주가 자신의 처소 주변의 산수 속에서 한가로이 거하는 모습을 다른 화폭에 연이어 그린 작품들과 함께 제작되었는데, 이 장면들은 사천장팔경도나 석정처사유거도처럼 지리적 정보를 주는 그림들과는 달리 주인공의 모습이 이상적인 은자의 이미지로 표현된 전형적인 산수 인물화의 형식을 보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회화적 형식은 특정인의 소유지를 마치 일반적인 산수 인물화를 대하듯이 거부감 없이 감상하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

농수정도와 함께 『곡운구곡도첩』에 실린 각 그림들은 농수정 주변의 산수를 즐기는 김수증의 모습을 처사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 각 장면의 우측 상단에 적힌 글을 보면, 김수증이 명명한 각 곡의 이름에 이어 이 지역의 위치, 거리, 특징 같은 지리적 정보가 자세히 적혀 있다. 따라서 한 폭의 감상화 같은 이 그림들이 실상은 소유지를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장원 그림의 기본적 취지에서 벗어난 작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제1곡 방화계도(傍花溪圖)의 상단에 “내 집에서 십 리 떨어진 곳”이라고 적은 것이나 제7곡의 명월계도(明月溪圖) 상단에 “내 집에서 서북 방향에 있는 곳이 명월계이다.”라고 한 것처럼 각각의 화폭에 그린 지역이 자신의 처소를 중심으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상세히 알려 주고 있다. 한편, 제9곡 첩석대도(疊石臺圖)의 상단에는 이 지역에 있는 ‘소탑(小塔)’을 눈에 띠는 경물로 적었는데, 이를 그림에 반영하기 위해 화면 왼편으로 흐릿하게 멀리 위치한 7층 석탑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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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일곡(一曲) 방화계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일곡(一曲) 방화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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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칠곡(七曲) 명월계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칠곡(七曲) 명월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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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구곡(九曲) 첩석대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구곡(九曲) 첩석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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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팔곡(八曲) 융의연도(隆義淵圖)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중 팔곡(八曲) 융의연도(隆義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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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들은 앞서 살펴본 사천장팔경도에서 사천장 주변의 주요 경물을 그리고 해당되는 지명을 그림 속에 적은 형식이나 석정처사유거도에서 회화식 지도의 구도 속에 봉수대나 읍성 같은 지표들을 그려 넣어 지리적 정보를 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소유한 원림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해 두 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곡운구곡도 각 폭에 그려진 산수가 김수증의 소유지였다는 점은 그가 쓴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난다.

내가 곡운으로 들어온 지 20여 년간에 이 산중에서 좀 특이한 곳은 모두 차지했는데 아직 화음(華陰)의 빼어남을 다 알지 못하다가 화음동을 얻은 후 지팡이를 끌고 천천히 다니며 두루 살폈더니 전에는 몰랐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곳이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지금까지 모두 4년이 걸려 동중(洞中)의 아름다운 승경을 거의 다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118)김수증(金壽增), 『곡운집(谷雲集)』 권4, 「화음동지(華陰洞志)」. 김수증의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에 관해서는 유준영, 「조형 예술과 성리학-화음동정사에 나타난 구조와 사상적 계보(系譜)-」, 『한국 미술사 논문집』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15∼38쪽 참조.

곡운구곡도에 발문을 쓴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김수증이 주문자로서 이 작품 제작에 어떻게 관여하였으며 또한 그의 의도가 실제 그림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화사는 평양에서 온 조세걸(曺世杰)인데 선생이 손수 데리고 와서 면전에 놓고 명하여 각 곡(曲)마다 직접 가서 그려 마치 거울을 보면서 영정(影幀)을 그리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그 겹겹이 쌓인 산봉우리와 골짜기, 기이한 바위와 격류하는 여울, 모옥의 위치, 밭을 경작해 놓은 것,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것, 나귀가 가고 소가 조는 것 같은 종류들 모두를 구비하여 조금도 남김 없이 다 그려 놓았으니 이 그림을 한 번 펼치면 황홀하여 마치 망천(輞川)의 별장을 지나고 도원의 나루를 물어 아득하게 스스로 인간의 시끄러운 세상 밖으로 멀어지는 것 같게 되었다.119)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 권25, 곡운구곡도발(谷雲九曲圖跋).

이 글은 김수증이 이 그림을 얼마나 기록적으로 상세히 그리게 하였는지를 알려 주는데, 마치 거울을 보며 영정을 그리는 것처럼 하였다고 한다. 일례로 곡운구곡도에서 두 폭이나 할애한 제6곡의 장소는 김수증의 별서인 농수정이 위치한 곳으로 이 작품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수증은 농수정도와 6곡 와룡담도(臥龍潭圖)의 두 폭을 통해 농수정을 중심으로 한 앞뒤의 실경을 묘사하여 농수정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와룡담도에 보이는 농수정과 그 옆의 비석의 모습, 그리고 산 아래의 농가의 모습들을 농수정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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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의 육곡(六曲) 와룡담도
조세걸의 육곡(六曲) 와룡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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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작품에는 별서 주변의 민가와 가축들의 모습도 모두 정확히 묘사되어 있는데, 농수정도에는 농우(農牛)가 묘사되어 있으며, 오른편 산 밑과 왼편의 별서 아래의 수림(樹林) 옆으로는 전호(田戶)로 보이는 민가들이 그려져 있다. 농수정도는 계곡가에 한적하게 위치한 김수증의 별서를 그린 그림으로 보이지만 이렇게 별서의 양측에 위치하였던 여러 채의 민가들을 지붕만으로 표시하여 실제로 이 지역이 장원으로 손색이 없는 넉넉한 땅이었음을 알려 준다. 이러한 점은 곡운기(谷雲記)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김수증은 곡운기에서 동부(洞府)의 넓고 평평하며 풍요로운 땅에 거처를 마련하였다고 하면서 “시내에서는 물놀이 할 수 있고 세상에서 물러나 밭을 갈 수 있으니 귀운동(歸雲洞) 일구(一區)가 제일가는 땅이다. 이곳이 6곡의 상류로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곳이 바로 농수정을 세운 곳 이었다.120)김수증, 『곡운집』 권4, 「곡운기(谷雲記)」.

사천장팔경도에서 밭가는 모습이나 주변 전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이나 석정처사유거도에서 역시 주변의 민가나 어선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과 같이 곡운구곡도에 보이는 농가의 모습도 이들 작품의 대상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터전인 장원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곡운구곡도첩』의 그림들은 사천장팔경도나 석정처사유거도와 달리 산천에서 유유자적하게 은거하는 선비를 그린 이상적인 문인화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이 작품이 송대(宋代) 이공린(李公麟, 1041∼1106)의 용면산장도(龍眠山莊圖)나 문징명(文徵明, 1470∼1559) 같은 명대(明代) 문인 화가들의 원림도 형식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수증이 농수정도와 함께 곡운 구곡의 각 장면을 그리게 한 것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나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같은 구곡도 제작의 한 예이기도 하였다. 구곡도는 주희(朱熹, 1130∼1200)를 기리는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그가 경영한 무이 정사(武夷精舍)와 무이 구곡(武夷九曲)을 주제로 한 무이구곡도의 제작에서 시작된 그림이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16세기 조선 사회에서 이황과 이이(李珥, 1536∼1584)를 비롯한 사림들은 무이구곡도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전승시키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학통을 잇는 서인 노론계 인사들은 고산구곡도와 같은 소위 조선 구곡도의 제작과 전승의 전통을 마련하였다.121)서인 노론계의 도통(道統) 의식과 구곡도 제작 전통에 관해서는 조규희, 「조선 유학의 ‘도통(道統)’ 의식과 구곡도(九曲圖)」, 『역사와 경계』 61, 부산 경남 사학회, 2006 참조. 노론계 문인들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수용 양상과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상원, 「조선 후기 고산 구곡가 수용 양상과 그 의미」, 『고전 문학 연구』 24, 한국 고전 문학회, 2003 참조. 미술 사학계 내에서 조선 구곡도는 실경산수화의 일례로 주목되어 왔다. 이러한 논문으로는 유준영, 「진경산수의 연원(淵源)으로서 구곡도」, 『계간 미술』 19, 1981 ; 윤진영, 「조선시대 구곡도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7 ; 진준현, 「조세걸(曺世傑)과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의 회화사적 의의」, 『한국의 은사(隱士) 문화와 곡운구곡(谷雲九曲)』2005년도 한국의 은사 문화와 곡운구곡 제2차 국제 학술 대회 발표집, 2005 참조.

이렇게 곡운구곡도는 구곡도 제작의 전통을 잇는 한편 자신의 별서 주변의 경물을 팔경, 십경, 십이경 등으로 정하여 이를 명소화한 오래된 전통에 따라 자신의 별서 주변의 승경을 ‘경(景)’ 대신 ‘곡(曲)’으로 명명한 별서도 제작 전통을 따른 측면도 있었다.122)곡운구곡도에 관해서는 조규희,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의 다층적(多層的) 의미」, 『미술사 논단』 23, 한국 미술 연구소, 2006 참조. 김수증의 조카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역시 자신의 별서 주변의 명소인 삼부연, 비룡뢰, 낙성기, 한류석, 옥녀담을 ‘태화오곡(太華五曲)’이라 명하고 1680년(숙종 6)에 영물시(詠物詩)로 읊은 바 있어,123)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권1, 「태화오곡영 경신(太華五曲詠庚申)」. 이렇게 기존의 팔경, 십경 등으로의 경물화 대신 곡의 개 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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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증의 서(書)
김수증의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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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증은 1681년(숙종 7)에 지병과 출사의 이유로 농수정을 떠나게 되자 이듬해에 곡운구곡도를 제작한 후 농수정 주인에 의해 이 작업이 일단락되었음을 적었다. 그런데 1689년(숙종 15)에 숙종이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반대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다시 장악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사사되자 곡운 지역으로 다시 돌아온 김수증은 이미 제작해 놓은 곡운구곡도에 무이도가(武夷圖歌)를 차운(次韻)한 구곡가를 붙여 『곡운구곡도첩』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곡운구곡가의 창작을 당대의 여러 문사들에게 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가족들에게서만 구한 점이다. 안동 김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종손인 김수증은 1692년에 자신이 1곡을 차운한 후 두 아들과 조카, 외손에게서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각 폭의 제화시를 받고 김창협에게 발문을 받아 화첩으로 꾸몄다. 이렇게 자신이 지은 수운(首韻)과 1곡의 시를 비롯하여 가족 아홉 명만이 이 화첩의 제화시에 참여토록 한 것은 『곡운구곡도첩』이 가문의 소유지를 재현한 가전화첩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124)곡운구곡가 창작의 배경에 대해서는 조규희, 「『곡운구곡도첩』의 다층적 의미」, Ⅳ장 “1692년과 곡운구곡가” 참조. 『곡운구곡도첩』에는 곡운구곡도에 이어 이들의 차운시(次韻詩)가 한 폭씩 실려 있다. 김수증의 후손인 김충현(金忠顯)이 영인·간행한 『곡운집(谷雲集)』의 곡운집 부록(谷雲集附錄) 중 「곡운구곡차회옹무이도가운(谷雲九曲次晦翁武夷櫂歌韻)」에는 김수증의 7언 절구의 수운(首韻)에 이어 각 곡(曲)마다 곡운구곡도 화면 매폭 상단에 적힌 각 곡의 위치, 거리 특징 등에 관한 글이 그대로 실려 있다. 차운시는 김수증의 일곡(一曲) 방화계(傍花溪)에 이어 이곡 청옥협(자 창국)(靑玉峽(子昌國)), 삼곡 신녀협(종자 창집)(神女峽(從子昌集)), 사곡 백운담(종자 창협)(白雲潭(從子昌協)), 오곡 명옥뢰(종자 창흡)(明玉瀨(從子昌翕)), 육곡 와룡담(자 창직)(臥龍潭(子昌直)), 칠곡 명월계(종자 창업)(明月溪(從子昌業)), 팔곡 강의연(종자 창집)(隆義淵(從子昌輯)), 구곡 촉석대(외손 홍유인)(疊石臺(外孫洪有人))의 순서이다. 이는 자신의 아들로부터 종자(從子), 외손으로 이어지는 동성 중심의 부계적 질서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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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회우도
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회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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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연거도
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연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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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수조도
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수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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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과농도
이만부의 『누항도첩』 중 과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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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17세기 전반의 사대부가 문화와 확연하게 달라진 점으로 17세기 전반의 경교 사족(京郊士族)들의 사가(私家)에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별서도를 중심으로 가전시화첩을 제작하면서 가능한 한 당대의 이름난 명사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해에 걸쳐서 시문을 받아두곤 하였다.125)이 점에 관해서는 조규희,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경교 사족들의 문화와 사가 행사도」,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사회 평론, 2006 참조.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곡운구곡도첩』은 이러한 시화첩들과 달리 외부의 인사들을 배제한 채 가문의 인사들만을 중심으로 가전화첩에 글을 싣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 그림이 가문 내의 소유지의 재현, 소유권의 명시와 같은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17세기 후반 이후 문중 의식의 대두와 부계친 중심의 종족 질서가 강화된 이 시기의 달라진 사가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곡운구곡도첩』처럼 건물의 전경이 그려진 가도와 함께 원림에서 유유자적하는 은자적 이미지를 여러 장면으로 함께 그린 또 다른 화첩으로 이만부의 『누항도첩』이 주목된다.126)이 작품에 관해서는 이선옥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와 『누항도(陋巷圖)』 서화첩(書畵帖) 연구」, 『미술 사학 연구』 227, 한국 미술사 학회, 2000 참조. 1714년(숙종 40)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이 화첩에는 식산정사(息山精舍)의 전경을 그린 식산정사도를 비롯하여 연거도(燕居圖), 회우도(會友圖), 의장도(倚杖圖), 종수도(種樹圖), 과농도(課農圖), 수조도(輸租圖) 모두 일곱 점이 해당 글과 함께 화첩으로 꾸며져 있다. 이들 작품은 이만부가 자신의 정사에서의 일상을 읊은 한거잡영(閑居雜詠) 15수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문집인 『식산집(息山集)』에 실린 15수의 시 중 일부의 내용이 그림으로 남은 것으로 보아 화첩이 다시 성첩되는 과정에서 그림의 일부가 결실되고 그림 순서도 바뀌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127)이만부(李萬敷), 『식산집(息山集)』 Ⅱ, 별집(別集) 권1, 누항록(陋巷錄), 「한거잡영(閑居雜詠)」에 실린 15수 7언시의 제목은 강학(講學), 수서(修書), 회우(會友), 연거(燕居), 사전(寫篆), 탄금(彈琴), 투호(投壺), 보정(步庭), 기장(倚杖), 관어(觀漁), 탁정(濯泉), 치포(治圃), 종수(種樹), 과농(課農), 수조(輸租)이다.

이들 각 작품에는 자신의 장원에서 보내는 사계절의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회우도에서는 정자의 문을 활짝 열고 선비들과 모임을 갖는 모습을 그렸으며, 연거도에는 추운 겨울에 홀로 정자에 앉아 화로에 피우는 향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과농도에는 사천장팔경도에서와 같이 밭갈고 쟁기질하는 장면이 보이며, 의장도와 종수도 등에서도 장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수조도에는 세금(稅金)을 통보하러 온 관리의 모습과 뒤편으로 물레방아가 보이는 등 향촌의 진솔한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화첩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문집에 보이는 치포(治圃), 관어(觀漁) 등을 그린 그림도 장원의 일상과 관련된 작품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이만부의 화첩 그림들은 고증조부 이래 만석꾼 집안으로 경북 상주에 넓은 장원을 경영해 온 이만부가의 향촌 생활을 잘 보여 준다.128)권태을,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문학 연구』, 효성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19쪽. 이만부는 강학 (講學), 수서(修書), 보정(步庭) 등이 포함된 원림에서의 일상을 읊은 한거잡영 15수와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외에 연악(淵嶽), 식산(息山), 나부(羅浮), 이천(伊川), 동노곡(東魯谷), 서노곡(西魯谷) 등 주변 팔경을 읊은 산천잡영(山川雜詠) 8수도 지었지만 전대의 그림처럼 자신의 별서를 중심으로 주변 팔경의 넓은 지역을 그리지 않고 원림의 일상을 제재로 삼아 그린 점이 주목된다.129)이만부, 『식산집』 Ⅱ, 별집 권1, 「노곡기(魯谷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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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회당종택도
유회당종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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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무수동도(無愁洞圖) 병풍 역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원림도의 특징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자신의 종가와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 무수동(현 대전시 중구)을 1729년(영조 5)에 화공에게 그리도록 주문한 것이다. 원래 8폭 병풍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재 이 병풍은 유회당도(有懷堂圖), 보문산(普文山)과 보문사도(普文寺圖), 유회당종택도(有懷堂宗宅圖), 장수공가도(長水公家圖), 옥녀봉도(玉女峯圖), 유등천도(柳等川圖), 갑천도(甲川圖)의 일곱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이진의 4대손인 권감(權瑊)은 권이진이 호조 판서를 지내며(1727∼1729) 삼 년 동안이나 고향에 가지 못한 간절함이 이 화첩의 제작 배경인 것으로 기록하였다.130)이 작품에 관해서는 『고문서에 담긴 옛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3, 188∼189쪽 참조. 권이진은 1728년(영조 4)에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민간의 전답을 매입하지 말 것과 공물을 정액 이상으로 거두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 이듬해에 제작하였다. 이 작품에 향촌 재지 사족 출신인 그의 시각이 담겨 있음은 단순히 고향의 승경을 담은 것이 아닌 이 작품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유회당도, 보문산과 보문사도, 유회당종택도, 장수공가도, 유등천도의 다섯 폭은 모두 종가와 별서 건물들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변의 전답과 농가들을 함께 주된 묘사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보문산과 보문사를 그린 그림에서 보문사의 위치는 원산 위에 조그맣게 그려진 반면 화면의 전경 대부분을 전답 묘사가 차지하고 있어 이 화면도 장원 지역을 회화적으로 재현코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장원과 그 주변의 승경을 병풍으로 제작한 예는 이미 16세기 중반에 그린 유중영의 하외화병에 관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병풍 마지막 폭의 갑천도에 보이는 선유(船遊) 장면의 인물 묘법과 배의 묘사에서는 상당히 여유 있는 필치가 느껴지며 선유를 즐기는 인물이 이상적인 은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 작품에도 매우 상세하고 사실적인 건물 및 장원의 모습과 함께 이상적인 원림도의 형식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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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과 보문사도
보문산과 보문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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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도
갑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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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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