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2. 원림도에 담은 가문의 문화적 자부심
  • 경교 사족가의 문화적 공간, 사가 원림에서의 행사를 그린 그림
조규희

관료로 성장하여 중앙에서 벼슬하며 서울과 그 근교에 세거지(世居地)를 마련한 이들은 경교 사족으로서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16세기 후반 무렵부터 당대 문사들의 모임이 주로 열렸던 특정 개인의 제택 원림은 이미 당 대의 명원(名園)으로 경교 사족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 “서울 장안에 경치 좋은 명원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이향성(李享成)의 세심대(洗心臺)가 가장 절승(絶勝)하다.”고 하여 경거(京居) 사족가의 정원 중에는 인왕산곡의 세심대 정원처럼 잘 조성된 정원이 상당수 있었음을 알려 준다. 심수경은 이어 “이 공(李公)이 자못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 음상(吟賞)하기를 즐겨하므로 나도 여러 차례 간 일이 있다.”고 하여 이렇게 잘 가꾸어 놓은 경교 사족들의 가원(家園)에서 시회(詩會) 같은 여러 모임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131)심수경(沈守慶), 심석규 옮김, 『견한잡록(遣閑雜錄)』, 백야문화사, 1980, 122∼123쪽.

이러한 사족가의 사적인 모임들은 16세기 후반 이후에 특히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132)이 점에 관해서는 조규희,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경교 사족들의 문화와 사가 행사도」, 212∼217쪽 참조. 이 무렵 사족층 사이에서는 친척이나 친구, 공적이거나 사적인 각종 일로 찾아오는 손님을 깍듯이 접대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어 사족들은 상당한 접대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에 빈객(賓客) 접대 여하에 따라 관직자의 평판이 달라지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접빈객(接賓客)’의 풍속과 관련하여 이들이 지출하는 사회 유지 비용은 곧 그들의 신분 유지 비용이기도 하였던 것이다.133)김성우,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328∼329쪽.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은 진사 심호(沈鎬) 가문의 경수연(慶壽宴) 잔치를 그린 수연도(壽筵圖)에 붙인 제영에서 서쪽 성곽 밖의 무악산 기슭에 자리 잡았던 심호 가문의 제택(第宅)에서 1565년(명종 20) 9월 9일에 76세 상공(相公)의 수연석(壽筵席)이 멋지게 베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 글에서 심호 가문의 저택을 ‘화옥(華屋)’이라고 표현하여 이 집이 사가이지만 매우 화려한 저택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제택에서 벌어진 잔치에는 조회에서 물러난 헌차(軒車)들이 자리하였는데, 정유길은 이 장면을 “만석꾼의 문중에는 수놓은 수레가 모여들었다.”고 표현하였다.134)정유길(鄭惟吉), 『임당유고(林塘遺稿)』 상(上), 제영록(題詠錄), 「진사심호가수정도(進士沈鎬家壽筵圖)」. 이처럼 16세기 후반이 되면 지배력을 공고히 하게 된 사족들의 경교 ‘화옥’에서 각종 행사와 모임이 벌어졌다. 이러한 경화(京華) 세거지의 화려함은 조선 후기에 더욱 심화되어 이들 제택의 사치를 논한 글까지 나오게 되었다. 윤기(尹愭, 1741∼1826)는 논제택사치(論第宅奢侈)라는 글에서 거실세족(巨室世族)들이 집을 지을 때면 아름답게 꾸밀 뿐만 아니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짓는데 서까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헐고 다시 고쳐 짓게 하고 기와 한 장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철거하고 다시 짓게 한다고 하면서, 당실(堂室)의 장식에는 대모(玳瑁), 유리(琉璃), 금벽(金碧) 같은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지적하였다.135)윤기(尹愭), 『무명자집(無名子集)』 책14, 「논제택사치(論第宅奢侈)」.

이렇게 사족들이 공들여 가꾼 제택의 정원이 친구나 동호인들에게 공개되는 열린 공간이 되면서 이러한 성사(盛事)는 그림으로도 기록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봄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세거지인 청풍계(淸風溪)의 태고정(太古亭)에서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병조 판서 이상의(李尙毅), 판돈녕부사 민형남(閔馨男), 예조 판서 이덕형(李德泂), 이경전(李慶全), 이필영(李必榮) 등 일곱 명이 상춘(賞春)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여 청풍계도(淸風溪圖)를 제작하였다.136)『여주 이씨(驪州李氏) 성호 가문(星湖家門) 전적(典籍)』,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에는 계첩의 전폭이 실려 있다. 『청풍계첩』에 관해서는 『성호 기념관(星湖紀念館)』, 안산시청, 2002, 121∼12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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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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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 주인 김상용은 상춘 모임 당시 외직(外職)에 나가 있어 참석하 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 점은 이곳이 사택임에도 주위 승경이 빼어나 당대의 많은 문사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는 장소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김상용은 그의 백증조인 김영(金瑛, 1475∼?)이 물려준 청풍계의 세거지에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와유암, 청풍각, 태고정 등을 새로이 지어 조경하였다.137)이경구, 『17∼18세기 장동 김문(壯洞金門)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68∼69쪽. 이곳은 침류대(沈流臺) 주인인 유희경 등이 즐겨 찾아와 시회를 가진 곳이었다.

유희경의 침류대 정원 역시 당대 문사들이 즐겨 모임을 열던 곳인데, 유희경은 자신의 침류대 정원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관에 20경의 명승을 정하고 이를 읊은 침류대이십영(沈流臺二十詠)을 짓기도 하였다.138)유희경, 『촌은집』 권1, 강화유희경응길저(江華劉希慶應吉著), 「침류대이십영(沈流臺二十詠)」. 유희경이 읊은 침류대 20경은 북악단풍(北岳丹楓), 남산취애(南山翠靄), 차계완사(叉溪浣紗), 휴암채초(鵂巖採樵), 이원모종(尼院暮鍾), 천단효경(天壇曉磬), 삼산모우(三山暮雨), 만정취연(萬井炊烟), 상림완월(上林玩月), 어원상화(御苑賞花), 화계접무(花階蝶舞), 유시앵가(柳市鶯歌), 고정추형(古井秋螢), 신풍주기(新豐酒旗), 성령장송(星嶺長松), 곡성잔조(曲城殘照), 필봉청설(弼峯晴雪), 어구홍엽(御溝紅葉), 서반탁영(西泮濯纓), 동간채춘(東澗採春). 1625년(인조 3) 정월에 그는 이식(李植, 1584∼1647)을 비롯한 젊은 문사들과 이른 매화를 감상하기 위한 모임을 자신의 침류대에서 주관하고 이때의 모임을 기념한 그림인 침류대부시도(沈流臺賦詩圖)를 제작하였다. 이 모임에는 유희경보다 30, 40년 후배 문사들인 정백창(鄭百昌, 1588∼1635), 엄성(嚴惺, 1575∼1628), 이정귀의 아들인 이소한(李昭漢, 1598∼1645), 한백겸의 아들인 한흥일(韓興一, 1587∼1651), 이식 등이 참여하였다.

이식은 침류대부시도 서문에서 “유희경의 침류대에서 화분의 매화가 반쯤 떨어져 그 남은 향기가 아른거릴 때 유 옹(劉翁)이 술상을 내놓았으며 유 옹과 참여한 문인들이 시를 서로 주고받다 달이 떠오를 때쯤 모임을 끝냈다.”고 적어 유희경의 침류대 정원에서 문사들끼리 매화를 감상하고 주연(酒宴)을 갖고 서로 시문을 주고받던 아취(雅趣) 넘치는 장면을 짐작하게 한다.139)유희경, 『촌은집』 권3, 수창시속록(酬唱詩續錄), 「침류대부시도서(택당거사)(沈流臺賦詩圖序(澤堂居士))」. 이러한 경교 사족들의 사가 원림에서의 문사 활동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서울 학풍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이 시기 서울 학인들은 이른바 ‘성시(城市) 속의 산림(山林)’을 자처하며 서울과 근교의 거소를 중심으로 문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140)한영우, 앞의 글, 360∼366쪽. 유희경은 스스로 ‘시은(市隱)’이라고 자호(自號)하여 당시의 시은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잘 말해 준다.141)이수광(李睟光), 『지봉집(芝峯集)』 권3, 「증침류대주인유희경유자호시은(贈枕流臺主人劉希慶劉自號市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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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흠의 세년계회도
이신흠의 세년계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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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 사족들이 잘 가꾸어 놓은 자신의 사가 정원에서 이러한 각종 모임을 자주 갖게 되면서 지인들의 집에서 각종 행사가 열릴 때는 서로 참석하여 축하시를 전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때 연회를 베푼 택주(宅主)는 이를 기념하여 가전시화첩을 제작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호민, 이경엄 부자가 주최한 사가 계회의 장면을 담은 세년계회도(世年契會圖)는 이호민의 아들 이경엄을 포함한 신축년 사마시(司馬試) 동년들 중 부친들 역시 동년인 이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것으로 계회를 주최한 이호민의 집안에서 이신흠(李信欽)이란 궁중 화가를 불러 그리게 한 그림이다. ‘세년계회’의 의미와 이 모임이 열린 정황은 이호민이 1604년(선조 37)에 쓴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142)이호민(李好閔)의 「제묘축사마세년계권(題卯丑司馬世年契卷)」은 『세년계회첩(世年契繪帖)』에 실린 글로 『사천시첩(斜川詩帖)』에 함께 성첩되어 있다. 세년계회도를 주문하였던 이호민 역시 당시 서울에서 활발하게 열렸던 시회의 주된 구성원이었는데, 특히 동원(東園)에서 시단을 이끌었던 이안눌과는 막역한 사이로 이호민은 동원에서 권필(權韠), 홍서봉(洪瑞鳳) 등과 함께 시회를 가졌었다.143)이병주,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문학」, 『동경(東慶) 어문 논집』 1,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1984, 6쪽과 12쪽.

이렇게 사대부의 사저 후원에서 열린 계회 장면을 담은 그림은 조선시대 계회도의 전개에 있어 17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보인다. 세년 계회도는 제택의 후원에서 열린 계회 장면을 담았다는 점과 계회도의 작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17세기 사가계회도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144)세년계회도 및 17세기 사가 행사도에 관해서는 조규희,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경교 사족들의 문화와 사가 행사도」 ; 「17·18세기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문회도(文會圖)」, 『서울학 연구』 16, 서울학 연구소, 2001 참조. 모임의 장면은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지만 후원으로 통하는 담을 사이로 시종들이 음식을 나르는 모습과 주변에 연무(煙霧)로 처리된 사이로 연이어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이호민가 저택의 규모를 짐작해 보게 한다. 원림이 잘 조성된 후원에서는 아홉 명의 문사가 모여 주연을 열고 있는 모습이 아치 있게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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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
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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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인조 7)에 제작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역시 화면에 적힌 장유(張維)의 제발과 이경직(李景稷, 1577∼1640)이 화축의 좌우에 적은 서문으로 인해 71세부터 81세에 이르는 12공(公)이 숭례문 밖 남지(南池) 변에 위치하였던 홍사효(洪思斅, 1555∼?)의 사가에서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작품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에도 이기룡(李起龍, 1600∼?)이라는 도화서(圖畵署) 화원의 관서가 적혀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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