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3. 눈과 마음이 노닐 만한 원림 그림
  • 그림에 반영된 원림의 이상
조규희

17세기를 전후하여 수용되기 시작한 만명기(滿明期)의 심미적 문인 문화는 서울과 부근에 세거하던 문사들의 시회 같은 동호인 모임을 통하여 확산되었고, 이러한 문화적 풍조 속에서 유희경의 침류대, 이안눌의 동원, 김상용가의 청풍계 같은 사가 원림은 경교 사족들의 모임과 문화 활동의 공간이 되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정쟁(政爭)이 치열해지면서 명가의 특권을 이어받은 경화 세족 중에는 벼슬길에 오르기보다는 유람을 즐기고 중국에서 수입한 각종 서적과 고동 서화가 수장된 자신의 서재와 원림에서 지인들과 교유하며 피세(避世)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경치가 뛰어난 곳을 유람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이러한 문화적 풍조 속에서 실제 경관 또한 감상자의 ‘눈과 마음이 노닐 만한’ 이상적인 그림으로 환출되었다.

‘성시산림(城市山林)’의 문화적 풍토 아래 별서기와 별서도 제작을 통한 전대의 장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경교 제택의 원림과 서재로 옮겨가 원기(園記)와 원거도(園居圖)의 제작을 촉발하였다.145)조선 후기 원기(園記)에 관해서는 심경호, 「조선 후기의 원기」, 『한국 고전 소설과 서사 문학』 하, 집문당, 1998, 303∼338쪽 참조. 원거도(園居圖)에 관해서는 조규희, 『조선시대 별서도 연구』, 237∼258쪽 참조. 그런데 조선 후기에 경화 세족들의 제택 원림이 이렇게 문학과 예술의 주된 제재로 부상한 데는 17세기 후반 이후 전대부터 누적된 균분 상속으로 인한 토지의 부족과 분산으로 사족들의 재지적 기반이 약화되어 이들의 경제력에 변화가 온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146)조규희, 『조선시대 별서도 연구』, 236∼237쪽 ; 마르티나 도이힐러, 이훈상 옮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아카넷, 2003, 312∼319쪽 ; 미야자마 히로시, 노영구 옮김, 『양반』, 도서출판 강, 1995, 209∼222쪽. 다음의 글은 경화 사족들의 이러한 정황을 잘 대변해 준다.

예전에는 조정에 벼슬하는 사대부들 치고 향려(鄕廬)를 두지 않는 자가 없어서, 관직이 있으면 서울로 오고 관직이 없으면 시골로 돌아가기 때문에 서울집을 여관 보듯 하였다. 이로 인해 농사나 벼슬살이 둘 다 잃지 않고 거취(去就)와 출처(出處)에서 넉넉하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괴이하게 여기는 한 가지 사실은 근세의 사환가(仕宦家)들은 성 밖 10리 너머의 땅을 거의 황폐한 변방이나 더러운 시골구석이라서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처럼 본다는 것이다. 벼슬길이 떨어진 뒤에도 자손을 위하는 자들이라면 번화한 서울 거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려 하지 않으므로 사내는 쟁기를 잡지 않고 여자는 베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닥치면 할 수 없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몽땅 팔고 지붕 새고 구들 꺼진 집 하나를 멍하니 지키고 살 뿐이다.147)서유구(徐有榘), 『풍석전집(楓石全集)』, 금화지비집(金華知非集) 권1, 「시태손(示太孫)」 ; 안대회, 「18·19세기의 주거 문화와 상상의 정원-조선 후기 산문가의 기문(記文)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97, 진단학회, 2004, 114쪽 재인용.

앞의 글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이 향촌의 장원을 다 팔더라도 한양 집을 유지하려는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관심은 향촌의 별서가 아니라 한양 집의 원림을 번잡한 도시 삶과 구별되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꾸미는 데 있었다. 또한, 이것이 가능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원림 소유의 강렬한 욕구를 의원기(意園記)에 담기도 하였다.148)의원기(意園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안대회, 앞의 글 참조. 또한, 거주하는 곳에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원림의 모습을 담은 원림 그림을 걸어 놓고 이를 통한 은거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윤유(尹揄, 1647∼1721)가 자신이 상상한 정원의 모습을 조세걸(曺世杰)에게 그려 달라고 한 다음의 산수정사도(山水精舍圖) 기문에 잘 드러나 있다.

지금 만약 한때의 감정으로 적막한 물가에 몸을 숨기고 다시는 세상과 교유하지 않는다면 이는 세속과 인연을 끊은 이단자들이나 편안히 여길 일이니, 어찌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백성의 곤궁함을 걱정하는 우리 유학자의 뜻이겠는가. 이때부터 다시는 은둔하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의 뜻은 하루도 여기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리하여 밤낮으로 생각하던 것을 창녕 조자평(曺子平)에게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뚝 솟아올라 위아래로 굴곡이 지며 뒤쪽에 둘러쳐진 것은 산이요, 힘차게 흘러내리며 오르락내리락 용솟음치다 눈 아래쪽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것은 호수요, 산을 등지고 호수를 바라보며 높은 봉우리와 움푹 패인 계곡 사이에서 파란 대나무와 푸른 소나무 속에 은근히 내비치는 사립문과 초가집이 정사이다. 정사는 세 칸인데 그 가운데에는 만 권의 책과 거문고 하나가 있어 빈객과 주인이 마주 앉아 토론하다 거문고 가락에 뜻을 펼쳐 본다. 그 밑으로는 계단 하나가 있고 찬 매화 두 분을 두었는데 기이하고 고아하며 이리저리 얽혀, 마치 서로 지탱하고 있는 듯 우뚝 서 있다. 뜰 앞 트인 곳이 연못인데, 마름과 연꽃, 수련들이 심어져 있다. 연못 둘레에는 또 누런 국화 여러 떨기를 심어 놓았는데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그 속에는 술동이와 술잔 하나씩을 놓아 두었다. 또 백학 한 쌍이 연못을 돌아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하나는 고개를 쳐들고 있다. 연못에서 동쪽으로 몇 발을 움직이면 맑은 샘 하나가 있어, 바위 사이에서 물이 흘러 나와 구덩이를 채우고는 도랑으로 흘러 넘쳐 호수에까지 이른다.149)윤유(尹揄), 『봉계집(鳳溪集)』 권1, 「산수정사도기 소시작(山水精舍圖記少時作)」.

윤유는 앞의 산수정사도기(山水精舍道記)에서 산수 속에 은거하고 싶은 이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정을 떠날 수 없는 선비의 도리를 내세우면서 대신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원림도인 산수정사도를 제작한 후 “이를 벽에 걸어 두고 눕거나 소일할 때의 감흥을 그것에 의지하였다.”고 하였다. 이러 한 풍조는 만명기(晩明期) 지식층의 문화적 풍조를 수용한 것으로 명말에 활동하였던 문진형(文震亨, 1585∼1645)이 저잣거리의 혼잡한 자취 속에서도 “마땅히 아름다운 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금석(金石)과 도서(圖書)를 펼쳐 놓아 거하는 이는 사심을 잊게 하고 머무르는 자는 돌아감을 잊게 하고 노니는 자는 피곤함을 잊게 한다.”고 한 언급이나,150)趙洪寶, 「雅趣-古代文人理想中的居舍文化」, 『故宮文物』 135, 國立故宮博物院出版組, 1994, 72쪽. 항성모(項聖謨, 1597∼1658)가 “나 스스로를 불러 은거하려 한다. 이전에 조정(朝廷)과 시정(市井)에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고, 산림 속에 은거하려던 뜻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이제는 시와 그림으로 은둔하겠다.”라고 한 언급과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51)박은화, 「항성모(項聖謨)의 초은산수도(招隱山水圖)」, 『미술 사학 연구』 197, 한국 미술사 학회, 1993, 90∼91쪽.

조선 후기에 삼정승을 역임한 고관이자 이 시기의 대표적 경화 세족의 한 사람이었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을 위해 이인문(李寅文)이 그려 준 산거도(山居圖) 역시 이러한 이상적인 원림 그림이었음을 다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지난해 나를 위해 산거도를 그린 것은 내 일찍부터 벼슬 버릴 마음 있는 줄 알았음인가. 남녘 봉우리 북녘 언덕에 나무꾼 노래 일어나고 작은 섬과 겹쳐진 모래톱 사이로 고깃배가 움직이네. 검은 구름 돌을 안고 대숲 집을 둘러 있고 푸르른 낭떠러지 낀 냇물은 묵지(墨池)로 쏟아지네…… 내 이제 빽빽이 줄여 담아 척폭(尺幅) 속에 가졌으니 방 위에 높이 걸고 한잔 술을 기울이네.152)남공철(南公轍), 『금릉집(金陵集)』 권4, 「이화사인문산수희묵(李畵師寅文山水戲墨)」.

이렇게 경화 사족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싶은 이상적인 원림의 모습을 담은 산거도 같은 그림을 통해 번화한 서울 삶 속에서도 은거를 실현할 수 있었다. 산수정사도나 산거도 같은 그림의 제작은 도시 속에 위치한 자신의 거주 공간 속에다가 산림과 같은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성시산림’적 문화가 18세기를 전후하여 그림 속으로 은둔하고자 하는 풍조를 만 들어 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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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성의 산정일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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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의 산정일장도
이인문의 산정일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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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화 사족들의 그림으로 은둔하고자 한 풍조 속에서 상상 속의 이상적인 원림을 그린 그림들이 성행하였는데, 특히 당경(唐庚, 1071∼1121)의 시 첫 구절인 “산정사태고(山靜似太古) 일장여소년(日長如少年)”으로 시작하는 남송 문인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 「산정일장편(山靜日長篇)」의 내용을 도해한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가 조선 후기 화단에서 매우 선호되며 이 시기 경화 사족들의 서재 장식화의 하나가 되었다.153)산정일장도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1998, 83∼92쪽 ; 오주석,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신구문화사, 2006, 110∼125쪽 참조.

김창흡은 정선이 그린 『해악전신첩』 중 김수증의 농수정을 그린 곡운농수정도에 부친 제시에서 당경의 이 시구를 김수증이 특히 즐겨 읊었던 것 이라고 하였으며,154)김창흡, 『삼연집』 권25, 제발(題跋), 「제이일원해악도후(題李一源海嶽圖後)」. 청풍계의 안동 김문 세거지에는 이 시구를 딴 태고정도 있었다. 따라서 안동 김문을 위시한 경교 사족들의 이 시구에 대한 선호와 이들의 요청으로 산정일장도를 그렸던 정선의 작업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8세기 중엽 이후에 산정일장도 병풍이 크게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화단에서 정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후배 화가들인 김희성(金喜誠), 심사정(沈師正), 정수영(鄭遂榮), 이인문(李寅文), 김홍도(金弘道), 오순(吳珣), 이재관(李在寬), 허련(許鍊) 등도 이 주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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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여산초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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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인곡유거도
정선의 인곡유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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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중국 장시성(江西省)의 명산인 여산(廬山)의 초당을 그린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는 대폭(大幅)의 원림도인데, 겹겹이 싸인 산속에 자리 잡은 이상적인 원림 속 초당에 한 선비가 앉아 있는 그림이다. 초당 뒤로는 죽림이 우거져 있고 앞뜰에는 노송이 우람하게 서 있으며 연못 옆으로는 학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모습들은 앞서 살펴본 윤유의 글에도 묘사된 당시 사대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원림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이상적 한거(閑居) 이미지는 실제로 당시에 조성한 자신의 원림을 재현한 그림에도 반영되었는데, 여산초당도는 정선의 인왕산 처소를 그린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의 이미지와 통하는 면이 있다. 김홍도가 즐겨 그린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에 보이는 이상적인 원림의 모습 또한 김홍도 자신의 원림을 그린 단원도(檀園圖)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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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단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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