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2. 유람의 유형과 유람을 담은 그림
  • 외국으로의 유람과 사행도
박은순

사대부들의 삶 가운데 넓은 세상을 견문하고 체험하는 일은 또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의 작음을 알았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도 작음을 알았다고 한 공자의 고사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하여 여행을 권장한 맹자의 논리, 그리고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기 전에 중국 사방을 돌아보아 견문을 넓힌 장유(壯遊)의 정신은 사대부들의 심상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이상이며, 이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 및 방법론이 되었다.219)문인들의 산수관과 여행관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책, 36∼43쪽 참조.

평생 동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대의를 이루고자 꿈꾸던 사대부들은 유람을 통하여 세상을 알려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문인들이 즐겨 했던 유람은 유람의 계기와 목표, 여행지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람 가운데 가장 멀리, 그리고 장기간 동안 하는 여행으로는 중국과 일본으로의 여행을 꼽을 수 있다. 이 여행들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파견한 사신으로서 외교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공적인 여행이다. 따라서 신중한 절차를 거쳐 선별된 사대부들과 여 러 계층의 수행원들이 대규모 사절단을 이루어 파견되었으며, 여행의 중요한 목표는 역시 국가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었다. 중국은 당시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된 대국이었다. 공적 자격인 사신으로 가거나, 사신을 수행하는 자제 군관(子弟軍官)이 되어 좀 더 자유로운 신분으로 가건 간에 일생에 한 번 갈 수 있는 중국 여행은 유람 가운데 가장 설레는 마음으로 가는 유람이고,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세계를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 중국 사행만큼은 아니지만 장기간 국외로 가는 여행으로 일본 사행이 있었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은 조선 초부터 있었지만 장기간 동안 대규모의 사행단이 파견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행(通信使行)이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일본 사행은 중국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지만, 역시 이국의 낯선 풍물과 번화한 상업 문화는 조선 사대부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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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조천도』 중 한 작품
『항해조천도』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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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으로 사행한 뒤에는 공식적인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사행단에 소속된 수많은 사대부는 또한 각기 사행의 과정과 견문을 기록하였고, 때로는 중요한 장면과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 후세에 전하였다. 사 행이란 유람 가운데 가장 영광되고, 감격적인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대부분 사행원을 따라 파견된 화원들이나 직업 화가들이 그렸다. 사행 관련 그림은 모든 장소와 견문이 아니라 일정한 대상과 여정을 선별하여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림의 구성과 표현도 어느 정도 전형화된 특징을 유지하는 관례가 형성되었다. 이는 이러한 작품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인상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공적인 사행의 기록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적인 성격을 드러내어 사대부 문인으로서의 영광된 행적을 길이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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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 중 한 작품
연행도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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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행은 한양에서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 현재의 북경 조양문(朝陽門)까지 보통 두 달 정도 걸리고 전체 거리는 3,111리로 왕복 넉 달에 6,000리가 넘는 장도의 여행이었다.220)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서 의주까지가 1,050리요, 의주에서 북경까지는 2,061리라고 하였다(조규익, 「화이 통합의 보편적 세계관, 그 현장의 기록」,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국문 사행록의 미학』, 도서출판 역락, 2004, 131∼133쪽). 중국 사행은 마땅한 교통편도 없고 숙박 시설도 여의치 않은 고생길로, 먹을 것, 목욕, 의복 모두 불편하지만 정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여행이며, 동시에 경제적·문화적 교 류를 위한 여행이었다. 사행원들은 중국의 경관과 선진 문물을 경험하고 당시로서는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된 중국을 향한 탐구심을 채우는 계기를 가졌다.

중국 사행의 견문을 기록한 조천도(朝天圖)와 연행도(燕行圖)는 연경으로 가는 조선 사신단의 행로 가운데 중요한 경관과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는 국내의 여정은 거의 표현되지 않았고, 대부분 중국 국경에 도착한 이후부터 연경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과 연경의 경관이 재현되었다. 연경에 파견된 사신단은 보통 한양에서 출발하여 평안북도 의주까지 일정한 경로를 거쳤다. 그중 평양의 연광정(練光亭)이나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처럼 이름 있는 명승이 있는 곳에서는 지방관의 대접을 받으면서 음주가무가 동원된 큰 잔치를 즐기기도 하였다.221)윤광봉, 「연행가에 나타나는 연희 양상」, 『연행록 연구 총서』 9, 복식·건축·회화·지리, 학고방, 2006, 209∼243쪽 ; 조규익, 「관심·발견·놀라움, 그 지향성과 문화 의식,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국문 사행록의 미학』, 도서출판 역락, 2004, 172∼173쪽. 먼 이국으로 떠나는 여행길에는 노고도 있었지만 평소에 가기 어려운 곳을 들러 보고 풍류로 즐기는 기쁨도 있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진 경로를 따라 형성된 유명한 명승지인 관서팔경(關西八景)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거치는 길인 동시에, 한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단이 거치는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관서팔경의 형성과 유명세에는 중국 사신단과 중국으로 파견된 사행원이 지나다니는 여정이라는 정치적·문화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천도나 연행도는 국내의 명소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사행 이후 남긴 공사간의 견문록에 비하면 사행을 기록한 현존 그림은 적은 편이다. 현존 작품들은 사행록에서 기록된 것보다도 더욱 선별된 장소와 사건, 경험을 수록하였다. 그림의 구성은 단순하고, 인물보다는 건물이나 경치를 주로 하면서 기록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물화로서의 특징보다는 실경산수화와 계화(界畵)로서의 특징이 부각되고 있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는 1624년(인조 2)의 사행을 재현한 작품이다.222)현존하는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정은주, 「명청 교체기 대명 해로 사행 기록화 연구」, 『명청사 연구』 27, 명청사학회, 2007 참조. 당시는 명나라 말 청나라 형성기로 북쪽 지역의 육로를 후금이 장악하고 있던 시점인지라 해로로 사행을 하였다. 그림은 평안북도 곽산(郭山) 의 선사포(宣沙浦)에서 시작하여 바닷길에서 본 경관과 사건, 북경의 전경도 등을 담았고, 마지막에는 선사포로 귀환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사행도는 대개 사행원을 수행한 화원에 의하여 제작되었는데, 이 당시 사행한 화원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아서 필자를 알 수 없다. 간결한 구성으로 경관과 사건의 주요한 요소들을 축약하여 담았고, 비교적 정확하게 지명과 상황을 전달하고 있어서 기록화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사행도는 궁중 회화, 그중에서도 행사를 재현한 기록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 구성이 간략하고 내용은 함축적이며 뛰어난 표현력을 갖춘 경우가 많다. 이 그림들은 당시 파견된 사행사들이 오랜 여정을 함께한 관리로서의 자부심과 나라에 대한 충의를 담고, 또한 동지로서의 우의를 기억하려고 제작한 관료 문화의 산물이다. 관료 계회도로부터 사행도까지 관료 문화의 산물로서 공리적·기록적 회화의 제작이 이어지면서 조선시대 회화의 다양한 면모를 형성하였다.

1760년(영조 36)의 연행을 계기로 제작된 화첩인 『심양관도(審陽關圖)』는 영조의 어명으로 제작된 특이한 경우이다. 영조는 효종의 탄신 60주년을 맞아 사행원들에게 효종의 행적지를 찾아 그림으로 그려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여행은 물론 조정을 위한, 공식적인 여행이었지만, 파견된 관리들은 중국을 여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졌다.223)이 화첩에 대하여는 박은순, 「조선 후기 『심양관도(瀋陽館圖)』 화첩과 서양 화법」, 『미술 자료』 58, 국립 중앙 박물관, 1997, 25∼55쪽 참조. 사행의 견문을 기록한 『심양관도』 화첩에는 심양에 있던 효종의 거처뿐 아니라 산해관(山海關)을 비롯하여 연경의 주요한 유적지와 경관이 수록되었다. 그림은 함께 파견된 화원 이필성(李必成)이 그렸다. 좌우 대칭적이고 정적인 표현을 주로 구사하여 안정감과 위엄을 전달하였고, 간결한 선묘와 압축된 묘사, 담채 위주의 은은한 색감으로 궁중 회화의 격조와 취향을 반영하였다. 경관과 건물의 모습은 평면적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구체적으로 재현하였다. 전체적으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궁중 계화의 성격을 유지한 이 작품 중에 특이하게도 서양 화법을 구사한 산해관외도(山海關外圖)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장면은 다른 장면과 달리 투시도법(透視圖法)에 가까운 시점과 사실적인 표현을 구사하면서 실경산수화에 서양적인 기법을 적용하였다. 궁중의 실경산수화로서는 일찍이 서양 화법을 적용한 점에서 주목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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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외도
산해관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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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이면에는 중국에 대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영조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효종에 대한 공경심과 청나라에게 짓밟힌 과거의 역사를 현재화시키고,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삼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림이란 단순한 시각적 기록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강화시키고 집중시키는 효과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그림의 기능과 특징을 영조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로의 조천을 기록한 사행도의 전통은 청나라로의 사행이 정상화되면서 연행도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연행도는 18세기 후반의 연행을 그린 작품이다. 역시 간결한 구성과 묘사로 연행 때 거쳤던 중요한 장소와 명 소를 그려 기록하였다. 연행도에서는 조천도와 달리 연경의 경관과 건물들이 더 많이 재현되었다. 이는 연행 이후 연경에서의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워졌고, 사행원들이 청나라의 문물을 관찰, 기록,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분위기를 반영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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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 중 한 작품
연행도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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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도와 연행도를 제작하던 사대부 관료들은 일본으로의 사행도 그림으로 기록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절단의 상호 파견은 조선 초부터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국교가 단절된 기간이 있었지만, 이 시기를 제외하면 두 나라 사이의 국교는 사대선린(事大善隣)의 명분 아래 지속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행단은 부산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주요한 지점까지 갔던 사행의 여정을 기록한 해사록(海槎錄)을 작성하여 일본 사행의 과정과 견문, 중요한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사로(槎路)’란 바닷길을 의미하는 말로 대한 해협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사행의 특징을 반영한 제목이 다. 현재 전해지는 해사록은 적지 않지만 일본 사행의 견문을 기록한 그림은 많지 않다. 일본 사행을 그린 현존하는 작품들은 17세기 이후 임진왜란의 상처를 딛고 재개된 통신사의 모습과 견문을 재현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통신사의 파견을 정례화한 것은 1636년(인조 14)부터였다. 이후 1811년(순조 11)까지 총 12회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1655년 이후 통신사는 ‘도쿠가와 쇼군(德川將軍)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으로 파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양국의 선린우호(善隣友好)를 다진다는 명분을 가지고 지속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쓰시마 섬(對馬島), 오사카를 거쳐 에도(江戶)까지 여행하였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단은 입국한 후 기본적으로 상경(上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부산의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허가된 왜관(倭館)에서 머무르도록 제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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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 통신사입강호성도(仁祖十四年通信使入江戶城圖) 부분
인조 14년 통신사입강호성도(仁祖十四年通信使入江戶城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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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통신사를 조선의 문화를 경험하고 신문물을 수용하는 적극적인 기회로 삼았기에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통신사는 대부분 4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이 이동하는 행사였기에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통신사를 수록한 그림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모두 제작되었는데, 일본에서는 더욱 많이 제작되어 통신사에 대한 일 본 측의 호기심과 환영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224)일본 통신사의 수행 화원과 화원의 역할, 그림에 대하여는 홍선표, 「17·18세기 한일 간 회화 교섭 연구」, 『고고 미술』 143·144, 한국 미술사 학회, 1979 ; 홍선표, 「조선 후기 통신사 수행 화원의 파견과 역할」, 『미술 사학 연구』 205, 한국 미술사 학회, 1995 ; 홍선표, 「조선 후기 통신사 수행 화원과 일본 남화」, 『조선 통신사 연구』 창간호, 조선 통신사 학회, 2005 ; 로널드 토비, 「한국이 가시화되다: 17, 8세기 일본 예술과 문화 속의 한국 사절단」, 『조선 통신사 연구』 창간호, 조선 통신사 학회, 20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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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승구도』 중 한 작품
『사로승구도』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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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에 시행된 일본 사행을 수록한 조선 측의 그림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행단의 모습을 반차도(班次圖)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행 과정에서 본 견문을 기록한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경우는 임진왜란 이후에 자주 제작된, 각종 궁중 행사의 의례를 기록한 반차도의 구성과 표현 방식을 따르고 있다. 긴 두루마리 형식의 화면에 중요한 의장 행렬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나타난다.225)차미애, 「강호 시대 통신사 등성행렬도(登城行列圖)」, 『미술사 연구』 20, 미술사 연구회, 2006 참조.

두 번째는 이성린(李聖麟, 1718∼1777)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의 방식이다.226)이 작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권혜은, 「조선 후기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의 작자와 화풍에 대한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참조. 이 작품은 긴 두루마리 형식에 통신사행이 출발한 부산의 영가대(永嘉臺)에서 시작하여 에도에 도착하기까지 거쳤던 중요한 기항지와 일본의 명승지, 사행 중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지역의 경치나 관아, 연향(宴享)을 독립된 연속 화면으로 담았다. 각 장면에는 장소, 관아, 때로는 날짜, 행사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며,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사실성과 기록성을 중시한 작품이다.

사행을 통하여 본 새로운 문물과 견문은 사대부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때로는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자극하였다. 따라서 조천도와 연행도, 사로도는 견문의 구체적인 기록으로 의미가 깊다. 그런데 조선의 사신들만 사행의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조선에 파견된 사신들도 조선에서의 견문과 경험, 교류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였다. 조선 초 실록 중에는 중국 사신들이 그림과 시문, 선물을 요구한 것이 실려 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풍속과 경치를 그린 그림을 요구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사신들의 행적을 수록한 그림을 화원에게 그리게 하여 선물로 주는 관행도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조선에서 경험한 사건과 경관 등을 그림으로 정리한 『봉사도(奉使圖)』가 제작된 적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조선을 보지 못한 중국 화가가 그린 조선의 경치와 풍속 등이 나타나는데, 조선에서 선사한 풍속화, 실경산수화 등의 자료를 토대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사도』의 표현은 연행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두 나라의 유람을 기록하는 회화적 관행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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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 중 한 작품
『봉사도』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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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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