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2. 유람의 유형과 유람을 담은 그림
  • 관리로서의 유람, 환유(宦遊)와 실경산수화
박은순

[관리로서의 유람, 환유(宦遊)와 실경산수화]227)조선시대의 지방관은 지역 통치를 위하여 지리서 편찬과 함께 관할 지역 및 주변의 산수를 유람하는 환유(宦遊)를 긍정하였다(오도일(吳道一), 『국역(國譯) 청파집(西坡集)』, 「청풍지서(淸風誌序)」, 해주 오씨 추탄공파 문중, 1992, 193쪽).

외국과의 교류를 전제로 가질 수 있었던 유람의 기회가 중국이나 일본으로의 여행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파견되는 사신 이외에 중국이나 일본, 류큐(琉球)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응접(應接)과 관련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공적인 유람을 경험하였다. 일종의 접대용 유람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유람은 특히 중국의 사신단이 방한할 경우 자주 있었다. 중국에서 사신이 파견되면 조선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이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임시로 설치된 도감에는 여러 관아에서 차출된 관리들이 사신이 머무르는 동안 수행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 관리는 사신들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영접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시문에 뛰어난 문사 가운데서 선발되었는데, 의주까지 파견되어 사신을 맞아들이고 함께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 동반하였다. 이 접대를 맡은 인사들이 의주까지 가는 경로나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경로 가운데 소재한 경치가 좋은 곳과 유서가 깊은 명소는 오고가는 길에 들르는 주요한 지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사신들의 접대와 관련하여 제작된 명사들의 시문과 주요한 경관을 담은 그림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 경로에는 특히 관서팔경, 관서십경 등의 명승명소(名勝名所)가 형성되었다. 관서 지역의 명구(名區)와 명승을 의미하는 팔경 또는 십경은 의주의 통군정, 강계의 인풍정, 안주의 백상루, 은산의 담담정, 성천의 강선루, 영변의 약산동대, 개천의 무진대, 평양의 연광정과 부벽루 등 한양에서 국경까지 양국의 사신단과 접대차 방문하는 문사들이 거치는 경로를 중심으로 선별되었다. 작품으로 표현될 때는 노정이나 상황에 따라서 그 대상이 변하기도 하였다.228)관서팔경으로 구성된 작품들은 『우리 땅, 우리의 진경』, 춘천 국립 박물관, 2002, 도25, 도26 참조. 이들 관서 명구의 명성은 중국 사신들에게도 잘 알려져 그 지점을 거칠 때에는 명승을 감상하고 연회를 가지곤 하였으며, 그 행적 을 그림으로 그려 기념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점점 유명해지고, 또 자주 그림으로까지 표현된 것이 평양도(平壤圖)와 관서팔경도(關西八景圖),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 관서명구도(關西名區圖)이다. 조선의 사신단들은 국경을 넘기 전에 사행품을 일일이 점검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것은 사대(査對)라고 하였는데, 대개 정해진 지역인 황해도의 황주, 평안도의 평양, 안주, 의주 등에서 네 번의 사대를 시행하였다.229)이계호, 최강현 역주, 『휴당의 연행록』, 신성출판사, 2004, 70쪽. 사대라는 중요한 일정을 마친 뒤에는 주변의 명승고적을 찾아 잠시 짬을 내어 명승을 감상하거나, 연회를 가졌다. 황주의 제안당, 평양의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의 백상루, 의주의 통군정 등이 자주 그려진 것도 그러한 관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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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통군정도
의주통군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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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조태억(趙泰憶, 1675∼1728)은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하여 의주까지 파견되었을 때 주변의 명승들을 유람하고 이를 기념하여 『용만승유첩(龍灣勝遊帖)』을 제작하였다. 이 서화첩은 직업 화가의 솜씨로 보이며, 화려한 청록(靑綠) 산수화풍을 구사하면서 실경을 여러 장면에 나누어 재현하였다.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을 감안하면 다소 보수적인 화풍으로 보이는데, 아마 그 지역의 화공이 제작한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관료들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사적으로 유람할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고, 그 유람의 흥취를 시문과 그림으로 기록하곤 하였다. 이것은 관료 문화가 하나의 관습으로 작용하면서 회화의 제작에 일정한 영향을 준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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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승유첩』 중 한 작품
『용만승유첩』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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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승유첩』 중 한 작품
『용만승유첩』 중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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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들은 조선의 국경 내로 들어오면서 귀빈으로 영접을 받았고, 한양에 도착하면 여러 차례 공식 연회로 접대를 받았다. 대부분 사신 도착 이후 닷새 동안 다섯 차례의 연회가 있었고, 돌아갈 무렵 두 차례의 연회가 있어 모두 일곱 차례의 공적인 연회를 시행하였다. 또한, 공식 일정 이외에 보통 여러 곳을 돌아보는 사적인 유관(遊觀)이 관례화되어 있었는데, 이때에는 한양의 교외를 주로 유람하였다. 조선시대 중 명나라에서 파견된 사 신들이 한양을 관람한 것은 모두 138회였다고 한다. 유관의 장소로는 한강, 사찰, 도성 내, 성균관, 모화루, 남산의 순으로 선호되었다. 한강에서의 선유(船遊)는 인기가 가장 높아서 유관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고, 선유와 연회가 진행된 한강 유역의 정자 가운데 행사가 가장 많았던 곳은 현재의 한남동 한강가에 위치하였던 제천정이었다.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길 때는 정자선(亭子船)을 탔는데, 이 배는 60여 명 이상 탈 수 있는 호화로운 배였다. 한강의 선유에는 조선의 부원군, 정승, 관료들도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기녀와 악공을 동원한 풍류 넘치는 유람이 진행되었다.230)이상배, 「조선 전기 외국 사신 접대와 명사(明使)의 유관(遊觀) 연구」, 『연행록 연구 총서』 7, 학고방, 2006, 389∼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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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내산도
금강내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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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은 일정이 허락하고 특별한 동기가 있으면 멀리 금강산까지도 유람하였다. 고려 말 이후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로 중국과 일본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숭상한 중국의 황제와 황실 인사들이 때로는 공양물을 보내어 금강산의 사찰에 공양하였고, 이런 경우 사신들은 금강산에 다녀와야만 했다. 금강산에 갈 경우 물론 조정의 문사들을 대동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금강산은 고려시대에 이어 중요한 여행 대상으로 다시 부상하였다. 조선 전반기에 그려진 금강산 그림들은 중국 사신들의 수요에 응하기 위하여 제작되곤 하였다. 세조는 1468년(세조 3)에 화원인 배련(裵連)을 파견하여 금강산의 실경을 그려 오게 하였다. 이는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 사신들의 금강산 그림에 대한 요구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중국 황제에게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를 선사하기도 하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금강산은 중국 사신과 조선 문사들이 애호하는 유람의 대상이 되었다.231)금강산 여행과 금강산도의 제작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책, 67∼70쪽 참조.

사신으로서의 공적인 외국 유람과 사신을 수행하기 위한 공적인 국내유람은 사대부들에게 명예롭고 동시에 풍류 넘치는 여행으로 자리 잡았다. 사대부들의 유람 관행은 각 지역에 파견된 관료로서의 유람에서도 확인된다.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된 관리들은 각 지역의 역사와 문물, 명소를 유지, 개발, 부각시키는 방법을 동원하여 민심을 잡고, 지방을 통치하는 적극적인 방편으로 삼았다. 지방관은 관할 방어지와 군민의 풍속을 관찰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순력(巡歷)하는 관습이 있었다. 관찰사의 순력은 17세기 전반까지는 중요한 일과이며 집무 행태였다. 예컨대 선조 때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유희춘(柳希春)은 1571년(선조 4)에 관찰사로 지낸 210일 동안 20일만 감영(監營)에 머무르고 나머지 기간 내내 순력하며 도정(道政)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민폐와 공무의 효율성 문제 등으로 순력이 춘추 2회로 실시되었고, 기간도 1개월 이내로 변화하였다.232)이희권, 「조선 후기 관찰사와 그 통치 기능」, 『전북사학』 9, 전북사학회, 1985, 87∼147쪽. 지방관의 임무상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순력은 통치를 위한 자료로 회화식 지도를 제작하거나, 순력 및 지방관으로서의 이력을 그림으로 기념하는 관행을 낳았다.

지방관의 순력을 배경으로 제작된 그림 가운데는 실경으로 그려진 명승도(名勝圖)가 많다. 이러한 명승도는 관동, 관서, 충청, 제주, 함경도 등 전국 각 지역에서 제작되었다. 최립(崔岦, 1539∼1612)의 관동승상록발(關東勝賞錄跋)에는 17세기 초 강원도 관찰사인 한공(韓公)이 관할 지역을 순력한 뒤 관동명승도를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233)이보라, 「조선시대 관동팔경도의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38∼40쪽.

한공은 백성들의 풍속을 살필 겸 자연스럽게 산과 바다와 각 지역의 승경을 두루 살피며 지나왔는데, 그사이에 빈객이나 자제들과 함께 산수를 감상하고 시를 읊는 데 있어서 싫증 나도록 즐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한공은 화공에게 명하여 이를 묘사하게 하고 특별히 병풍으로 만들어서 집에 보관해 두고는 뒷날 생각날 때마다 볼 수 있게 하였다.234)최립, 『간이집(簡易集)』권3, 「관동승상록발(關東勝賞錄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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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진(城津鎭)
성진진(城津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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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력이 지속되면서 회화식 지도 및 실경산수화를 제작하는 일도 이어졌다. 『함흥내외십경도(咸興內外十景圖)』는 지방관으로 파견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함흥 지역에 열 곳의 명승을 선정하고 이를 기록한 뒤, 그림으로 제작하게 한 것이다.235)이수미, 「『함흥내외십경도』에 보이는 17세기 실경산수화의 구도」, 『미술 사학 연구』 233·234, 한국 미술사 학회, 2002, 37∼62쪽. 남구만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북방 정책을 강조한 인사이다. 함흥 지역의 명승으로는 이성계와 관련된 사적과 명승이 주로 선정되었고, 이 밖의 명승들은 함경도의 절경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남구만은 1673년(현종 14)에도 길주 이북 6진의 지도를 제작하여 왕에게 바친 적이 있어 그림과 지도라는 서로 다른 매체이기는 하지만 시각적인 자료를 통하여 북방 개척의 의지를 전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남구만은 앞의 작품 각 장면에 대한 설명에서 지역의 유래, 역사, 거리, 방향, 경물(景物)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함흥 지역이 왕화(王化)의 성은이 미친 지역임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수단으로 그림이 활용된 것으로 회화의 공리적·효용적 기능을 보여 준다. 남구만도 이곳들을 직접 답사하거나 명소를 선정하기 위하여 여러 장소를 방문하였을 것이다. 이 그림에 선정된 명승은 함흥 지 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돌아볼 만한 대상으로 추천된 것이니, 이 그림은 그 정치적·사회적 함의가 어떠하건 간에 유람의 개념이 내재된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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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산 전경
칠보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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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문인들의 유람은 여러 가지 명분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특히, 명승으로 이름난 지역의 수령으로 봉직하는 동안에는 수많은 지인들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수령들은 관아의 일이 한가한 틈을 내어 손님을 접대한다는 명분으로 유람길에 오르는 경우도 있어서 접대용 유람은 하나의 관례처럼 인정되었다. 조선 중기에 사림파 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수 유람의 풍조나 이를 산문으로 기록한 유산기(遊山記)의 유행도 지방의 관료로 봉직하던 사림파 인사들이 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6)이혜순, 『조선 중기 유산기 연구』, 집문당, 1997. 유람하려면 시간과 돈과 건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현대의 유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관료 문인들의 풍류 넘치는 유람 행차에는 수십 명의 관원과 시종들이 동원되곤 하였으니, 일반 서민에게는 부담되는 일이었다. 관료 문인들의 유람을 기록한 문학 작품이 17세기 중엽 이후 대량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기행(紀行)의 성과를 그림으로 담는 일도 잦아졌다. 기행 문학, 유산기, 유산시(遊山詩)와 함께 문학 작품에 수록된 여정과 지점, 경물을 그림에 반영하는 일도 진행되었다.

1664년(현종 5)에 제작된 『북관수창록(北關酬唱錄)』 서화첩은 함경도 길주에서 시행된 문무 과시(文武科試)를 진행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료들의 유람을 재현한 작품이다.237)이 작품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이태호, 「한시각의 북새선은도와 북관실경도: 정선 진경산수의 실례(實例)로서 17세기의 실경도」, 『정신 문화 연구』 3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207∼235쪽 ; 이건상, 「북새선은도와 북관수창록」, 『미술 자료』 52, 국립 중앙 박물관, 1993.12 ; 이경화, 「북새선은도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참조. 당시에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을 비롯한 관료들은 함경남북도 지역을 포괄하여 최초로 시행된 문무과 별시(別試)를 진행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므로 이들의 여행은 분명 공적인 것이다. 이때의 별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북변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소외된 지역의 안정과 통합을 위하여 지역 인재를 등용하고 이 지역을 개발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당시의 문과와 무과 별시 장면을 기록한 작품으로 『북새선은도권(北塞宣恩圖卷)』이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함께 파견된 궁중 화원인 한시각(韓時覺, 1621∼?)이 그리고, 과시에 관여한 여러 인사의 좌목을 적은 실경기록화이다. ‘북새선은(北塞宣恩)’이란 북쪽의 변방 지역에 미친 임금님의 은혜란 의미로 국왕의 은혜가 변방 지역까지 미친 것을 칭송하는 표제(表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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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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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과시를 성공적으로 치른 관료들은 이후 길주의 명승으로 유명한 칠보산을 탐승하였다. 『북관수창록』은 그 과정에서 서로 나눈 수창시(酬唱詩)와 한시각이 그린 여섯 점의 실경산수화를 모아 꾸민 시서화첩이다. 이들의 임무는 공적인 것이었지만 공무를 완수한 이후 경험한 유람을 담아낸 이러한 작품은 관리로서의 유람 또한 즐길 만한 풍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정철(鄭澈)이 관동 지역을 순찰하는 과정에서 지은 관동별곡(關 東別曲)처럼 사대부 관료들 사이에 회자된 하나의 풍류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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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금서도(浩然琴書圖)
호연금서도(浩然琴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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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도(竹西樓圖)
죽서루도(竹西樓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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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명승과 사적, 관아를 그린 『제주십경도(濟州十景圖)』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18세기 초 제주 지역에 부임하였던 관리들이 제주를 돌아본 환유의 결과를 반영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제주도의 경우 17세기 말 18세기 초 제주 목사로 부임하였던 인사들에 의하여 그림과 지도, 화첩으로 환유의 결과가 시각화되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238)1690년대에는 목사 이익태에 의하여 『제주십경도』가 제작되었고, 1702∼1703년에는 목사 이형상에 의하여 『탐라순력도』가, 1709년에는 목사 이규성에 의하여 대형 목판 지도인 ‘탐라지도’가 제작되었다(오상학, 「『탐라순력도』의 지도학적 가치와 의의」, 『탐라순력도 연구 논총』, 제주시 탐라순력도 연구회, 2000, 28∼30쪽). 이 가운데 가장 대작으로 역사적·민속적·회화적 가치가 높은 것은 『탐라순력도』이다. 이 화첩은 1703년(숙종 29) 제주 목사 겸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702년(숙종 28) 10월에 21일간 순력한 장소와 행사를 주로 담고, 제주 지도 등을 부가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그림은 제주목 소속의 화원인 김남길(金南吉)이 그렸고, 표제와 해당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형상이 지었다. 그림은 계회도처럼 표제, 그림, 행사에 참가한 인사들에 관한 좌목 등 삼단으로 구성되어 공리적 회화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 화첩에는 행사 장면뿐 아니라 제주의 명승 세 장면, 다른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행사인 양로연 세 장면과 과거 등 아홉 장면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단순히 순력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지방관으로서의 주요한 행적을 고루 기록한 것은 공적인 기념물이 되고자 한 것을 시사한다. 그림의 수준은 지방 화공의 작품이어서인지 매우 높은 것은 아니지만 화려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지향하였고, 민화에 가까운 소박한 미감도 나타나고 있다.

강원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이 관동 지역을 순력한 뒤 1748년(영조 24)경 제작한 『관동십경첩(關東十景帖)』은 그 체재와 화풍, 장황 등 모든 면에서 조태억이 제작한 『용만승유첩』을 연상시킨다. 이 서화첩은 아마도 그 지역의 화공을 동원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관동의 명승은 대부분 풍수적인 구성을 토대로 표현되어 고식의 화풍을 보여 주며, 준법과 수지법도 17세기에 가까운 화풍을 구사하여 당시 한양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진경산수화의 흐름과는 관련이 없는 화풍을 구사하였다.

1742년(영조 18) 황해도 관찰사 홍경보(洪景輔, 1692∼1745)가 경기도를 순력하다가 연천 근처의 임진강을 선유한 뒤 이를 기념하여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을 제작하도록 하였다. 67세의 노대가인 정선이 그린 이 작품은 18세기 전반에 유행한 진경산수화의 정수를 전해 주고 있다. 홍경보는 연천의 서북쪽 삭령 즈음에 도달하자 당시 연천 현감으로 봉직하던 글 잘하는 신유한(申維翰, 1681∼?)과 양천 현령으로 봉직하던 그림 잘 그리는 정선을 우화정(羽化亭)으로 불러내어 임진강을 따라 선유하였다. 관찰사의 순력 중에 이루어진 유람이었기 때문인지 그림에는 호위하는 관원들과 강변을 따라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많은 백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마침 이 날은 소식(蘇軾)이 적벽(赤壁)에서 선유하였던 날과 같은 10월 보름이었다. 홍경보는 적벽선유의 고사를 모방하여 풍류 넘치는 유람을 마친 뒤 글을 짓고, 정선에게 이 장면을 그리게 하였다. 홍경보는 글을 지어 소식은 불우한 시절 적적한 마음으로 선유하였지만, 자신은 태평한 시절 떳떳한 놀이를 하였으니 소식보다 더 성한 풍류라고 강한 자부심을 표출하였다.239)이 작품에 수록된 홍경보와 정선의 글은 『겸재 정선』 한국의 미 1, 중앙일보사, 1977, 도8에 함께 실려 있다. 웅장한 구성과 힘찬 필력, 윤택하고 화사한 먹색을 구사한 정선의 진경산수화에는 이들이 보았던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난다. 곧 평화로운 시절 관찰사의 성대한 유람이 칭송되고 있는 듯하다. 관리로서의 순력과 유람은 태평성세에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눈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명분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배경에서 명승의 유람과 흥취를 실경산수화로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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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등선도(羽化登船圖)
우화등선도(羽化登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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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유와 관련된 회화 및 지도의 제작은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초엽에 선비 화가 이방운(李昉運, 1761∼1815 이후)이 그리고 쓴 『사군강산참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은 이 지역의 수령인 안숙(安叔)이 한가한 시절을 틈타 이름 있는 사군 지역의 명승을 돌아본 기록이다.240)박은순, 「19세기 초 명승유연과 이방운의 『사군강산참선수석』 서화첩」, 『온지 논총』 5, 온지 학회, 1999.12 참조. 또한, 홍기주(洪岐周, 1829∼?)가 제작한 『환유첩(宦遊帖)』은 홍기주가 평생 동안 역임한 열네 고을의 지도 14장을 묶은 지도첩이다. 이 작품에는 1875년(고종 ~ 12) 경상도 용종, 1878년 전라도 순창, 1882년 함경도 함흥, 전라도 곡서 및 전주, 1884년 전라도 무주, 1885년 강원도 평강, 충청도 온양, 1886년 경상도 거창, 전라도 고산, 1887년 평안도 순안, 1888년 경상도 안의, 1890년 황해도 신천, 1892년 충청도 천안 등 열네 곳의 지도가 역임한 순서대로 실려 있다. 이 작품은 각 지역의 지방 지도를 토대로 화공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환유첩』은 한 관료가 통치했던 지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기념한 기념물이며, 실제로 그가 순력하였던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지방 관료들은 때로는 통치를 위한 자료로서, 그리고 차차로 자신의 이력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자료로서 지도와 실경산수화를 제작하여 후대에 전하였다. 이 같은 시각적 기록과 표현의 관습은 조선시대 동안 실경산수화와 회화식 지도의 제작이 성행한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제작되면서 실경산수화와 회화식 지도는 조선시대 회화를 대변하는 한 분야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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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도(寒碧樓圖)
한벽루도(寒碧樓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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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유첩』 중 온양지도
『환유첩』 중 온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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