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2. 유람의 유형과 유람을 담은 그림
  • 사적 유람과 장유관(壯遊觀), 기행 사경도
박은순

사대부들은 평생 동안 수많은 여행과 유람을 통하여 심신을 수양하고, 견문을 넓히며, 세상에 대한 큰 뜻을 키웠다. 문인들의 인생 여정을 담은 문집(文集)에는 수많은 기행의 기록이 나타난다. 그 기행의 자취는 승경으로 유명한 산과 유적지, 연고지를 돌아본 기록이며, 시대를 만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들이 적극적으로 여행을 하거나 산수에 파묻혀 세속의 티끌을 벗어나고자 한 흔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관직에 오르는 기쁨과 보람보다 더한 의미를 부여하였을 정도로 여행을 즐겼다.241)이하 여행과 장유관, 기행사경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책, 35∼77쪽 참조.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임춘(林椿)은 여행의 의미와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비록 다 보았다 하여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사마천은 회계산에서 노닐며 우임금의 묘혈을 보고서 천하의 훌륭한 경관을 다 보았다. 그리하여 기가 더욱 기이하고 위대하여졌고 그 문장이 더욱 호탕하여졌으며 호걸스럽고 장한 분위기가 있게 되었다. 그런즉 대장부란 두루 멀리 돌아보고 팔극(八極)을 휘척(揮斥)함으로써 가슴속의 빼어난 기운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다.242)임춘, 『서하집』, 「동행기(東行紀)」 ; 박은순, 앞의 책, 39쪽 참조.

이러한 여행의 의미는 조선 말까지 이어져 갔다. 1825년(순조 25) 관동 지역을 여행하고 기행 시화첩인 『동유첩(東遊帖)』을 꾸민 이풍익(李豊翼, 1804∼1887)은 기행의 의의를 요약하여 “여행하며 보려는 뜻을 가지는 것은 그 안목을 넓히려는 것이고, 그 뜻을 크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43)『동유첩(東遊帖)』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으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사대부 문인들은 여행을 하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꺼렸다. 18세기 말 강세황이 서관을 지나면서 시를 한 편도 짓지 못하여 늘 마음에 걸렸는데, 쌍천옹이 서관을 여행하며 지은 대자첩(大字帖)을 보면서 웅장하고 수려하며 기이하고 장하며(雄秀奇壯) 고도(古都)의 아름다운 산수와 이름 있는 누각을 묘사하여 감동적이라고 칭송한 것도 그러한 사례의 하나이다.244)강세황, 『표암유고』권5, 제발, 「서관희묵(西關戲墨)」, 369쪽.

사대부들 간에 명승명소를 유람하는 것은 성정을 도야하고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넓히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행위였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명분이지만, 그러한 명분이 있었기에 유람은 사대부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로 늘 존재하였고 향유되었다. 사대부들 사이에 유람이 유행한 것은 특히 17세기 이후 사림 문화가 정착된 이후부터였다. 이즈음에는 유람의 성과를 유산기와 유시(遊詩)로 표현하는 전통이 정립되었고, 이와 동시에 여행하며 보고 겪은 것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일도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 한 예로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금강산으로 여행하면서 화공 표응현과 피리 부는 적공(笛工) 함무금을 동행한 것을 들 수 있다. 풍류적인 유람을 즐기면서 그 자신은 금강산기(金剛山記)라는 유기(遊記)를 지었 고, 아쉽게도 작품은 전해지지 않지만 화공에게는 금강산의 명승을 사경(寫景)하게 하였을 것이다. 사대부가 여행을 하면서 직업 화가를 데리고 가서 실경을 그리게 하는 일은 조선 말까지 꾸준히 지속되면서 사대부 기행 문화의 한 단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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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촌연응도(湖村煙凝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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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의 견문을 그림으로 사경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데에는 사대부 화가 조속(趙涑, 1596∼1668)의 공이 컸다. 조속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지만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방관을 역임하여 지조 높은 사대부로 존경을 받았다. 조속은 서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금석학(金石學)을 개척하였고, 문인적인 상징성과 이를 반영한 새로운 화제(畵題)와 화풍(畵風)을 모색하였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조속은 기행을 통하여 보고 들은 것을 사경하는 일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고, 새로운 성취를 이룩하였다. 조속의 시도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금강산을 그린 방식이다. 조속은 이전에는 한 장면에 모든 경관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그리던 금강전도식(金剛全圖式)의 표현을 비판하였다. 예컨대, 18세기에 정선이 그린 금강내산도는 조선 초 이래로 지속된 보수적인 금강전도의 전통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조속은 새라면 하늘을 날아올라 금강산의 모든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 크고 넓은 공간을 한눈에 보고 그려 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중요한 장면을 보이는 만큼 여러 장면으로 재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였다.

조속의 시도는 참신하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조속의 새로운 구상은 중 국에서 새롭게 도입된 산수 유람과 산수 경관을 다룬 산수 판화집의 영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17세기 이후 중국에서 수입되기 시작한 다양한 판화가 삽도로 실린 책자들 가운데 『삼재도회(三才圖會)』, 『명산기(名山記)』, 『해내기관(海內奇觀)』, 각종 지방지(地方誌)에 실린 명승명소를 한 폭씩 나누어 담아낸 방식이 조속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다.245)고연희, 『조선 후기 산수 기행 예술 연구』, 일지사, 2001 참조. 17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각종 서책과 화보, 소설류의 서적이 유입되었다. 조속이 그러한 자료들을 참조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분야에서 이미 이루어졌던 유산기나 유기, 유시를 회화적으로 해석하여 반영해 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유기와 유시는 여행 중에 본 중요한 장소와 명승을 개별적으로 다루면서 경관의 특징을 세밀하게 형용하거나, 경관을 보고 받은 감흥을 기술하는 체제를 정립하였다. 조속은 새로운 문학적 성과를 회화 분야에 적용하면서 대규모의 경물을 한눈에 보이게 재현하는 비현실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각각의 경물을 독립적으로 재현하는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선비 화가인 이정(李霆, 1541∼?)이 그린 관동도(關東圖)에서도 확인된다. 이정은 관동 지역을 여행하고 그중 경치가 좋은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을 각기 독립시켜 그렸다. 이 밖에 윤휴(尹鑴, 1617∼1680)가 금강산을 여행할 때 정양사의 헐성루에 올라 보이는 경관을 간략히 그려 본 헐성루망금강도(歇惺樓望金剛圖)도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 작품이었을 것이다.246)박은순, 앞의 책, 76쪽.

사대부 문인들의 씩씩한 유람(壯遊)을 그림으로 담아낸 기행 사경도(紀行寫景圖)는 17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경향으로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행 사경도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진경산수화가 대두된 18세기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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