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3.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
  • 현실적 사고와 진경의 답사, 천기론적 진경산수화
박은순

진경산수화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회화의 한 경향으로 정립된 것은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과 같은 위대한 화가의 역할 때문만은 아니다. 진경산수화는 좀 더 보편적인 시대 정신과 정치 사회적·사상 철학적·문예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을 반영한 회화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대변하는 큰 흐름이 될 수 있었다. 진경산수화의 성격과 의의를 좀 더 보편타당하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진경산수화를 거시적으로,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진경산수화를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형성 배경, 특징, 의의, 회화적인 양상의 변천을 정리하려고 한다.253)이러한 관점은 금강산도를 연구하면서 이미 정립되었다. 금강산도는 사실상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주제였고 금강산도를 그린 화가들은 모두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들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19세기 이후의 진경산수화를 규정하기 위하여 ‘절충적 진경’이란 개념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박은순, 앞의 글, 2000 ; 박은순, 앞의 글, 1999, 289∼329쪽 참조. 진경산수화의 4단계에 대하여는 이후 여러 논문을 통하여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켰다. 진경산수화의 네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 전반 낙론계 문인들의 현실 지향성을 반영하며 형성된 천기론적(天機論的) 진경, 둘째, 18세기 중엽부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선비 화가들이 지닌 현실 관조적인 경향을 반영하며 형성된 사의적(寫意的) 진경, 셋째, 18세기 후반 서양 문물과 투시도법의 수용에 따라 나타난 사실적(寫實的) 진경, 넷째, 19세기 이후 이전 진경산수화의 개념과 화풍을 전통(傳統) 및 전범(典範)으로 인식하면서 형성 된 절충적(折衷的) 진경이다. 진경산수화를 여러 단계 및 개념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서 진경산수화의 제작 동기, 성격 및 전체 양상, 화풍의 특징과 의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정선은 18세기 전반 조선에 실재하는 경물을 다룬 진경산수화를 그리면서 진경산수화의 기반을 정립시켰다.254)정선의 진경산수화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박은순, 앞의 책, 108∼211쪽 ; 박은순, 「겸재 정선과 이케노 타이가(池大雅)의 진경산수화 비교 연구」, 『미술사 연구』 17, 미술사 연구회, 2003, 133∼160쪽 참조.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현실적인 제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그러한 경물을 직접 답사하고 현장의 느낌을 담아 재현하는 방법론과 경물을 사실적이면서도 개성적인 화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정선과 주변 문인들은 전국 각지와 생활 주변의 산수를 유람하고 그 경험을 문학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을 즐겼다. 이는 산수를 이적(理的) 탐구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물성(物性)으로부터 객관성과 보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자연과 물상, 또는 현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낙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물성동론에 의하여 진전된 것으로 물(物)과 아(我)를 동일시하며, 체(體)보다 용(用)을, 정(靜)보다 동(動)을 중시한 새로운 사상과 관련된 현상이었다.

산수라 하여도 평범한 대상, 즉 상경(常境)을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는 이에게 각별한 영감과 자연의 요체를 각성해 줄 만큼 기이하고 특별한, 즉 기준(奇雋)한 산수를 찾아가 경험하고자 하였다. 18세기 이후 낙론계 문인들 사이에 금강산 유람이 성행하였던 이유 중의 하나는 기준한 진경을 만나는 산수유를 통하여 천기를 잘 발현하고, 성정을 고양시키는 것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선이 그린 진경은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물을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아무 곳이나 그린 것은 아니다. 그가 다룬 진경은 대부분 특별한 의미와 상징성을 가진 대상이었으며, 각 작품의 주제와 소재, 화풍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삶을 담은 진경산수화이다. 정선이 평생 살았던 곳이나 그가 관직으로 나아갔던 곳 등 자신의 행적과 관련된 경치를 그렸다.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정선이 평생 동안 살았던 인왕산 주변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전형적인 화풍은 인왕제색도처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인왕산을 화면에 꽉 채운, 밀밀지법(密密之法)이라고 하는 강렬한 구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화강암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진 인왕산은 그 강한 형세와 인상을 전달하기 위하여 빠르고 강한 필선과 짙고 윤택한 묵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바위의 표면에는 뭉툭한 붓을 반복적으로 문질러서 세월을 이겨 낸 바위의 중량감과 거친 질감을 강렬하게 드러내어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바로 이것이 정선 특유의 개성을 드러낸 화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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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
인왕제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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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그리는 대상의 특징과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화풍을 구사하였다. 양천관아도(陽川官衙圖)는 정선이 양천의 현령으로 재임한 시절 자신이 소속한 관아를 그린 것으로, 화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려는 듯 한 폭의 사의적인 문인화처럼 그윽한 아취(雅趣)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처럼 정선은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경물과 대상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관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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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관아도
양천관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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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산수유와 관련된 기행 사경도로 정선의 개성과 천기론의 특징이 가장 잘 발현된 제재이다. 금강산, 관동팔경, 단양의 승경, 개성 등 명승으로의 여행을 기록한 사경도 가운데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 지역을 그린 작품을 자주 제작하였다. 정선은 경물의 특징과 성격에 따라 화법을 분명하게 조절하였다. 즉, 산속의 경치를 그릴 때는 빽빽한 구성, 강한 필치, 풍부한 묵법을 구사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는 반면 바닷가 경치는 여백을 많이 두고 부드러운 필선과 절제된 묵법을 구사하여 그윽한 시정(詩情)을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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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폭동도(萬瀑洞圖)
만폭동도(萬瀑洞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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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석정도(叢石亭圖)
총석정도(叢石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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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대하여 그의 평생 지기였던 조영석은 정선의 장기를 “일필휘쇄(一筆揮灑)함, 필력의 웅혼함, 기세의 유동함, 웅장한 포치(布置, 구성을 의미함), 구도의 밀색(密塞, 빽빽함)”이라고 지적하였는데, 바로 이런 특징이 천기론과 관련된 요소들이다. 때로는 경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경물의 특징과 분위기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취(趣, 분위기)를 구할 뿐 형사(形似, 모양의 비슷함)를 구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이것 또한 범상하지 않은 절경(絶景)을 찾아 특별한 천기를 경험하고, 현장에서의 감흥과 개성적인 해석을 중시한 천기론을 회화로서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이다.255)천기론에 관한 다른 분야의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참고가 된다. 김흥규, 「조선 후기 시경론과 시의식」, 『민족 문화 연구』 2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 김혜숙, 「한국 한시론에 있어서 천기에 대한 고찰(1)」, 『한국 한시 연구』 2, 한국 한시 학회, 1994 ; 김혜숙, 「한국 한시론에 있어서 천기에 대한 고찰(2)」, 『한국 한시 연구』 3, 한국 한시 학회, 1995 ; 이승수, 「17세기 말 천기론의 형성과 인식의 기반」, 『한국 한문학 연구』 18, 한국 한문학회, 1995 ; 임유경, 「18세기 천기론의 특징」, 『한국 한문학 연구』 18, 한국 한문학회, 1996 ; 진영미, 「천기의 개념과 특성」, 『한국 한시 연구』 5, 한국 한시 학회, 1999 ; 이동환, 「조선 후기의 ‘천기론’의 개념과 미학 이념과 그 문예·사상적 연관」, 『한국 한문학 연구』 2, 한국 한문학회, 2001 ; 조성산, 「18세기 초반 낙론계 천기론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 『역사와 현실』 44, 한국 역사 연구회, 2002.

세 번째로 주변 문인들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 많은데, 이는 진경산수화가 문인 특유의 문화를 전제로 발전된 회화임을 시사한다.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단 일원을 위하여 베푼 전별연 행사를 기념하여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그런데 정선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별연이 있었 던 주변의 경치를 부각시켜 그림으로써 이 행사를 기념하였다. 화면에는 현재 서울의 독립문 자리에 있던 영은문(迎恩門)과 그 주변의 모화관, 전별연의 장면을 에워싸고 있는 안산과 인왕산, 홍제동 고갯길이 나타나고 있다. 당당한 구성으로 주변의 경물을 재현한 이 작품에서는 웅장한 구도, 굳세고 빠른 필치, 윤택하고 풍성한 먹이 구사되었다. 화가는 현실에 대한 낙관적인 인식과 한양 승경에 대한 애정, 전별을 위해 모여든 문인 간의 따스한 동료 의식을 담아낸 것이다. 이처럼 정선은 자신뿐 아니라 문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정선은 1720년(숙종 46) 금강산을 여행하고 돌아온 안중관(安重觀, 1675∼1752)의 요청으로 구룡폭포도(九龍瀑布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이 완성되자 안중관은 다음과 같이 정선 화풍의 특징을 지적하였다.

그림은 반드시 모든 것을 모습대로 그려 낼 필요는 없고 그 뜻을 얻는 데 있을 뿐이다. …… (정선의 그림은) 다만, 천척이나 되는 기이한 형세를 드러내어 완연히 본경(本境, 본래의 경치)이니 시원하구나. 오직 바람이 이는 듯이 물거품이 뿌옇게 부슬거리는 것과 골짜기에 줄곧 비가 오는 모습은 생략하고 그 변화를 다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큰 뜻은 다 좋으니 구차하게 논할 필요는 없겠다.256)안중관(安重觀), 『회와집(悔窩集)』 권4, 「제구룡폭첩(題九龍瀑帖)」.

안중관은 그려진 장면이 자신이 보았던 비 오는 날의 구룡폭과는 달라 다소 의아하지만, 크게 보아서는 만족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선이 진경을 그리는 방식이다. 이즈음 정선은 이미 금강산을 다녀온 이후였고, 안중관의 요청으로 진경을 그렸지만, 적당히 변형하여 표현하였다고 짐작된다. 안중관은 자신의 여행을 기념할 기념물로 정선에게 진경을 주문하였으며, 정선은 사실적인 재현과 자신의 해석이 적당히 융합된 장면을 그려 주었다. 이처럼 정선이 자주 그린 진경산수화에는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주변 문인들 의 삶과 취향이 기록되어 있다.

정선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현실적 주제 의식과 현장을 중시하는 방법론, 강렬한 세를 강조한 화풍, 개성의 분출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표현력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정선 자신의 개성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좀 더 보편적인 요인은 정선과 주변 문인들이 가졌던 새로운 현실 의식과 이를 반영한 문예관에서 찾을 수 있다. 정선은 노론계 집안 출신으로 평생 인왕산 기슭에서 살면서 낙론계 경화 세족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257)정선의 교유에 대하여는 최완수, 앞의 책, 1993 참조. 18세기 초엽 한양의 낙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행과 사경, 서화 고동의 감상과 수장, 문인 아집 등 새로운 문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현실을 중시하는 사실적 문예론으로 성정론(性情論)과 천기론(天機論)이 주창되었고, 그림 분야에서는 특별한 경관이나 의미 있는 진경을 직접 관찰하고 현장에서 경험한 흥취를 표현하는 천기론의 특징을 그림으로 담은 천기론적 진경산수화가 제기되었다.

정선이 제작한 진경산수화는 천기론에 의하여 규정된 여러 가지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우선 강인한 형세를 가진 자연을 찾아 경물을 대면하여야 한다는 답진모실(踏眞摸實)의 개념, 진경을 만나기 위한 방법론으로 현장을 찾아가는 산수유, 천기가 유동(流動)하는 현장에서 자신의 천기를 쏟아 내듯이 그리는 방식, 그 결과 나타난 빽빽한 구도, 어느 정도 사실적인 재현, 강렬한 필묵법, 경물에 따른 분위기의 조절 등 주제로부터 방법론, 화법에 이르기까지 천기론을 회화적으로 표현하였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많은 특징들을 구비하고 있다. 정선이 정립한 진경산수화는 17세기까지 유행한 관념적인 주제, 의고적(擬古的)인 방법론, 전범의 중시, 화원 화가들에 의한 화풍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 되었다. 특히, 진경산수화의 저변으로 작용하였던 현실 지향적인 사상과 이를 반영한 예술의 추구라는 의식은 이후에도 진경산수화가 문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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