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3.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
  • 서학과 서양 화풍의 영향, 사실적 진경산수화
박은순

18세기 중엽 이후에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각적 사실성을 강조하는 사실적 진경산수화가 제기된 것이다. 사실적 진경산수화는 서양 문화와 자연 과학, 서양 화법의 영향이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우며 자연과 인간, 세계에 대한 철학적·과학적·예술적 재고를 통하여 정립된 점에서 중요하다.262)사실적인 진경산수화와 서학 및 서양 화풍의 도입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은순, 앞의 글, 1999 ; 박은순, 앞의 글, 2000 참조.

조선이 서양 문물을 접한 17세기 이후 처음에는 주로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 즉 기적(器的) 차원에서 시작된 서학(西學)이 차츰 사상적·종교적 차원인 서교(西敎), 즉 이적(理的) 차원으로까지 심화되었다.263)서학에 대하여는 강재언, 『조선의 서학사』, 민음사, 1990 ; 박성순, 『조선 유학과 서양 과학의 만남』, 고즈윈, 2005. 과학 기술 문물의 탐구와 실용에서 시작된 서학은 이어 현실 개혁의 대안으로까지 연구되었으며, 18세기 말엽에는 서학이 일종의 교양으로 인식될 정도로 선비들 사이에 유행되었다. 특히, 기호 남인들은 관료 학인들에 비하여 서학 전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았고, 과학 지식을 토대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우주관과 만물균시(萬物均是)의 새로운 세계관, 객관적 자연관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실생활에 소용된 합리적인 실용 과학을 중시하고, 예술에서도 실용성과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사실적 묘사를 강조한 형사론(形似論)을 지지하였다.

사실적인 묘사에 뛰어난 표현력을 인정받았던 서양 화법은 18세기 초부터 영정(影幀)과 동물화에서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경산수화에서는 가장 늦게 적용되었다. 이는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일이 우주와 자연, 현실에 대한 철학적·사상적 사유를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사변적·규범적 존재로 인식하여 온 조선인들에게 객관적 자연관을 전제로 하고 시학(視學)과 기하학 등 서양의 학술이 결합된 투시 원근법(透視遠近法)을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진경을 그릴 때 투시 원근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사실적 진경산수화는 강세황 같은 진취적인 선비 화가들과 강희언 같은 여항 화가들, 궁중 화원들이 투시도법과 원근법을 진경을 그리는 데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실적 진경산수화는 서양 문물에 대하여 포용적인 정책을 취하였던 18세기 말 정조 연간(1752∼1800)에 성행하다가 19세기 이 후 서학과 서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쇠퇴하였다. 이는 서양 화법에 대한 관심과 실험이 다만 민간의 차원에서, 그리고 문화적인 차원에서만 시도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또는 사상적인 맥락에서 수용된 것을 시사한다.

확대보기
환어행렬도
환어행렬도
팝업창 닫기

정조 연간에는 궁중 화원들 사이에서 한쪽 눈을 가리고 보면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畵法)’, 즉 투시도법이 유행하였다. 정조는 서양 화풍의 수용을 대변하는 제재(題材)인 책가도병풍(冊架圖屛風)을 자신의 서재에 설치하고는 신하들을 불러 그 의의를 직접 설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1801년(순조 1)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795년(정조 19) 이후에 제작된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등을 제작할 때에도 투시도법과 원근법 등이 활용되었다.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는 중국에서 제작된 고소창문도(姑蘇閶門圖) 판화와 구성과 공간 개념, 투시도법의 적용 방식이 매우 유사하여 이 수법이 중국에서 들어온 다양한 매체를 매개로 전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 연간의 이러한 사례들은 서양 화풍이 국가적인 후원을 받으며 확산된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이즈음 서학은 선비들 간에 하나의 유행 이 되었다.

확대보기
개성시가도
개성시가도
팝업창 닫기

18세기 중엽 강세황이 제작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서양 화풍을 진경산수화에 접목시킨 이른 예이다. 그가 그린 개성시가도(開城市街圖)는 개성의 상징인 남문과 송악산을 두 축으로 삼은 구성을 보여 준다. 남문에서부터 송악산까지 가까운 것은 크고 진하고, 먼 것은 작고 희미해지는 서양 투시도법과 원근법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서양에서는 멀어지면서 사라져 버리는 소실점(消失點)의 개념이 사용되지 않은 사실이다. 원래 서양 투시도법이라면 송악산은 작고 희미하게 보여야 한다. 강세황은 개성의 상징이며 풍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산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강세황은 서양 화법을 수용하되 전통적인 자연관, 풍수적인 개념, 누정을 중심으로 하는 실경산수화풍의 원리를 적절히 융합시켜 절충적인 화풍으로 표현하였다.264)풍수적인 실경산수화와 누정을 중심으로 한 실경산수화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글, 2006 ; 박은순, 「조선 중기 성리학과 풍수적 실경산수화: 석정처사유거도를 중심으로」 참조. 이 작품은 전통적인 산수 개념과 화풍, 새로운 서양 화풍이 교묘하게 결합된 사례로서 이후 서양 화풍의 수용에 적용된 기본적인 원칙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강세황은 소북 출신의 선비로 기호 남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며, 자녀들을 이익 문하에서 가르칠 정도로 기호 남인의 학풍을 따르고, 영향을 받았다. 강세황이 자화상을 비롯하여 서양적인 개념과 기법을 회화에 실험하는 데 앞장섰던 것은 현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던 선비로서의 의식과 진취적인 실험 정신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서양 화풍은 단순히 하나의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조선의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시도되었으며, 새로운 학술과 사상으로 인식된 서양 문화에 대한 반응에서 유래된 화풍이다.

확대보기
총석정도
총석정도
팝업창 닫기

강세황 이후 정조가 가장 애호한 화원 김홍도는 왕의 주문으로 금강산과 관동 지역의 그림을 그려 바쳤다. 관동팔경 중 한 명승을 그린 총석정도(叢石亭圖)는 서양 화법을 이해한 정도와 방식을 보여 준다. 정조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화원 김홍도와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을 영동구군(嶺東九郡) 지역, 즉 금강산과 관동팔경에 보내어 명승을 그려 오도록 하였고, 그 과정에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다. 조선시대 동안 왕이 화원을 파견하여 금강산과 주변의 명승을 그려 오게 하는 일은 조선 초부터 말까지 이어졌다. 김홍도는 서양 화풍을 수용하되 전통적인 화법과 절충적으로 융합시키고 있어 서양 문물 및 화풍에 대한 반발을 잠재우고 서양 화풍이 수용될 수 있었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확대보기
서성우렵도
서성우렵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서장대야조도
서장대야조도
팝업창 닫기

김홍도는 경물을 일정하게 정해진 시점에서 관찰한 다음 재현하였고 이를 위하여 서양식 투시도법과 원근법을 수용하였다. 지그재그식 포치를 통한 깊고 넓은 공간의 확보, 가까운 것은 크고 뚜렷하며, 멀리 갈수록 작고 희미해지는 대기 원근법(大氣遠近法) 등은 모두 서양화에서 유래된 수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밀하고 변화감이 넘치는 필묘를 기초로 한 사실적인 사생을 중시하면서 서양 화법에서 유래된 기법을 절충하였다.

김홍도의 서양 화풍에 대한 다양한 시도는 같은 장면을 그린 서성우렵도(西城羽獵圖)와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서성우렵도는 서양 화풍에 좀 더 충실하여 서장대를 화면의 아래쪽에 두고 거기에서 보이는 화성 시가를 작게, 또한 운연(雲煙)에 쌓이게 표현하였다. 이에 비해 서장대야조도는 중요한 대상을 화면의 위쪽에 두는 전통적인 수법을 보여 준다. 결국, 서성우렵도와 같은 구성은 조선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질감을 주었고, 마침내 서장대야조도식의 구성과 표현이 절충적인 방식으로 용인되어 살아남았다. 이처럼 서양 화풍에 대한 수용은 조선의 문화와 정서를 통해 걸러지면서 정착되었다.

사실적인 수법의 진경산수화는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가문 출신인 김하종(金夏鍾, 1793∼1875 이후)이 그린 『해산도첩(海山圖帖)』은 1815년(순조 15)에 제작한 것으로, 19세기 초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화첩은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이 주문하여 제작되었는데, 이광문은 조부인 이재와 아버지 이채를 이은 노론 명문가 출신의 사대부였다. 이광문은 화원인 김하종을 데리고 금강산과 설악산 지역을 여행하고 김하종에게 진경을 그리게 하였다. 이광문은 이 화첩에 직접 서문을 썼는데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한 회화관을 드러내고 있어서 이즈음 사실적인 수법이 애호된 것을 시사한다.265)홍선표, 「조선 후기의 회화관」, 『산수화』 하, 중앙일보사, 1982, 224쪽 참조. 형사(形似)를 무시하는 사의(寫意)를 배격하고, 경험과 관찰, 사실적인 묘사를 강조하는 회화를 선호한 문인들의 후원과 주문에 힘입어 19세기에도 사실적인 수법의 진경산수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확대보기
환선구지망총석도(喚仙舊趾望叢石圖)
환선구지망총석도(喚仙舊趾望叢石圖)
팝업창 닫기

이후 19세기에는 왕실과 사대부 문인들이 진경산수화의 주문과 후원을 지속하였고, 민간에서도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 등 일부 지역을 그린 민화가 유통되면서 진경산수화가 저변화되었다. 그러나 19세기의 진경산수화는 이전처럼 새로운 화풍과 개성 있는 대가들이 나오기보다는 18세기에 활동한 여러 대가의 진경산수화를 복합적으로 융합시켜 그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정선, 강세황, 심사정, 이인상, 김홍도 등 이전 대가가 이룬 진경산수화의 성취를 하나의 전범으로 의식하면서,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절충적 경향의 진경산수화는 19세기 진경산수화의 상황을 보여 준다.

19세기가 되면서 화단의 관심은 급속히 관념적인 방향으로 선회되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비롯한 주요한 문인들은 청나라의 고증학풍(考證學風)에 경도되어 금석학과 고동 취향에 젖어들었고, 18세기와 같이 현실 지향적인 의지와 사실적인 표현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방운, 윤제홍, 이의성 등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선비 화가들과 김석신, 김하종, 허련, 조정규, 김영 등 19세기의 직업 화가들은 궁중과 사대부 등 특별한 수요와 후원에 힘입어 기행과 사경을 전제로 한 진경산수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하였다.

19세기 초 선비 화가 이방운은 단양, 제천 등의 명승을 그린 『사군강산참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을 그렸다. 이것은 이 지역의 지방관인 안숙이 한가한 틈을 타 여행을 한 뒤 이방운에게 주문하여 그린 작품이다. 이 중 구담도(龜潭圖)는 정선 화풍의 영향을 보여 주며, 한벽루도(寒碧樓圖)는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사인암도(舍人巖圖)에서는 심사정과 강세황 화풍의 영향을 고루 수용하고 있다. 이전의 대가들을 필요에 따라 차용하면서 각 경물의 특징과 정취를 부각시킨 것은 18세기의 진경산수화를 전통으로 존중하는 새로운 경향이 정착된 것을 시사한다.

확대보기
구담도
구담도
팝업창 닫기

또한, 소론계의 명류로 영의정을 역임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1865년(고종 2) 김하종에게 제작하게 한 『풍악권(楓嶽卷)』도 유사한 경향을 보여 준다. 이유원은 1865년 흥선 대원군과의 정권 다툼에서 실각한 시기에 금강산과 관동 지역, 설악산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이미 팔십을 바라보는 노대가인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그리게 하고 직접 서문을 짓고, 써 넣어 시서화 삼절의 작품을 만들었다.266)김하종의 『풍악권(楓嶽卷)』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책, 355∼360쪽 참조. 이유원은 이 화첩에 쓴 글에서 사실적인 화풍보다는 사의적인 화풍을 선호하는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김하종은 20대의 『해산도첩』과 달리 정선, 심사정, 강세황, 김홍도, 김응환 등 18세기 대가들의 진경산수화풍을 골고루 참조하면서 다소 보수적인 경향을 추구하였다.

백구암도(白鷗巖圖)는 18세기 문인화의 대가 심사정이 그린 해암백구풍범도(海巖白鷗風帆圖)와 제재, 구성, 기법이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복합적인 화풍을 구사한 작품을 통하여 기행을 전제로 한 진경산수화가 19세기까지 성행하였고, 18세기의 진경산수화를 전범으로 의식하는 흐름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백구암도
백구암도
팝업창 닫기

진경산수화는 선비 계층의 사상과 문화, 예술에 대한 취향을 반영하며 제작된 그림이다. 조선 후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조선 후기의 시대 정신과 예술의 특징을 대변하는 분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진경산수화의 이면에는 조선 초부터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중시한 성리학적인 사상과 문화가 자연과 실경산수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그 전통과 관습의 영향이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로 꽃피운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회화는 다양한 요인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지만, 특히 유학적인 사상과 철학을 가진 사대부 문인 계층이 지대한 역할을 한 사회였기에 그림 속에도 그들의 사상과 문화, 예술에 대한 애호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주문, 후원, 감상한 사람들의 내면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의 주제나 소재뿐 아니라 그림의 필선과 먹, 색채와 분위기, 구체적인 기법들을 잘 읽어 내게 되면 어떠한 문헌 기록보다도 더 정확하고 더 심오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철학, 일상과 취향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미술 작품이 가지는 매력이며 의의인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그러한 세계를 경험하였기를 기대한다.

확대보기
해암백구풍범도
해암백구풍범도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