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1. 화조와 사군자의 의미와 심상
  • 자연의 함축과 도의 구현체
백인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예술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어느 사회의 문예 성격과 지향은 그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예는 자연 친화적인 사유와 인식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는 단순히 원시적인 숭배, 감상적인 심미(審美)나 탐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인간보다 자연을 우선시하여 늘상 인간의 자연화를 추구하였으며, 자연에서 진리와 이상의 원형과 본질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연과 자연물은 자신의 정서와 심회를 표출하는 유용한 방편이기도 하였지만, 나아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생명체로서 그 본질은 항상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하며, 그 삶도 자연의 원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자연관은 산수와 같은 대자연은 물론 주변의 동식물에도 적용되어 풀 한 포기, 곤충 한 마리도 우주의 섭리를 함축하는 소자연(小自然), 혹은 소우주(小宇宙)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에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자연을 피상적으로 인지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속에 내재된 원리와 이치를 인 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유 방식은 성리학의 발전으로 한층 심화되었다. 송나라 때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옹(邵雍, 1011∼1077)의 다음 글은 동아시아 문인들의 자연관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무릇 관물(觀物)이라 이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理)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의 물은 이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성(性)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명(命)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267)소옹(邵雍),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내편(觀物內篇).

만물에는 한결같이 이와 성과 명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과 이치로 바라보고 교감해야만 거기에 내재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옹의 언술은 성리학적인 관점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동아시아 문인들의 보편적인 자연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리학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들도 소옹의 자연관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이 새로 지은 집의 당호를 ‘관물당(觀物堂)’이라 명명하고, 그 연유를 밝힌 글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은 능히 천지 만물을 살펴 그 이(理)를 다할 수 있다면 영장(靈長)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나, 천지 만물을 능히 보지 못하고 그 소종래(所從來)에 어둡다면 박아군자(博雅君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 날고 침잠하는 동식물과 초목 화훼(草木花卉)의 종류가 형형색색으로 각기 그 천진(天眞)을 얻으니, 일물(一物)을 보면 일물의 이치가 있고 만물(萬物)을 보면 만물의 이치가 있어 한 근본에서 나와 만수(萬殊)로 흩어지며, 만수를 미루어 한 근본에 이르나니, 그 유행(流行)의 묘는 어찌 이리 지극한가. 이런 까닭에 관물(觀物)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봄만 같지 못하고, 마음으로 봄이 이(理)로 봄만 같지 못하니, 만약 이로 볼 수 있다면 만물에 환히 통하여 내 안에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다.268)권호문(權好文), 『송암선생문집(松巖先生文集)』 권5, 「관물당기(觀物堂記)」 : 정민, 「관물 정신(觀物精神)의 미학 의의」, 『한국학 논집』 27,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5, 228쪽 번역 참조.

이 글은 사물을 통해 이치를 살피려는 이른바 ‘관물찰리(觀物察理)’의 정신을 설파한 내용으로 소옹의 관물론(觀物論)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조선의 문인들은 주변에 산재한 자연물을 통해 우주에 편재한 기운과 생명력을 느끼고, 그 안에 내재된 천기(天機)와 이법(理法)을 읽어 내고자 하였다. 조선 중기의 사대 문장가 중 한 명인 계곡(溪谷) 장유(張維, 1587∼1638)가 풍죽(風竹)을 논한 다음 글도 사대부들이 자연물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이것이 비록 미물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지극한 이치가 있다. …… 성현은 말 없는 가운데 계합(契合)하고 학자는 그것을 체행(體行)한다. 아! 그대가 이를 취한 것이 어찌 겉으로만 즐기기 위함이겠는가. 사물을 보고 자기를 성찰하며, 명목을 살펴 실질을 구함이다. 그러면 어디 간들 대나무가 없을 것이며 어느 때인들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한 번 보는 사이에 도를 파악하게 될 것이니, 나는 이제 그만 말하려 한다.269)장유(張維), 『계곡집(谿谷集)』 권4, 「풍죽설증최자겸-정자왈풍죽편시감응무심(風竹說贈崔子謙-程子曰風竹便是感應無心)」.

장유는 바람을 맞고 있는 대나무를 진리가 응축된 도체(道體)로 인식하였다. 여기서 대나무는 감흥과 흥취를 유발하는 감각적 대상과 구분되며, 절조와 기개를 지닌 군자라는 일반적 우의(寓意)에서 한층 심화된 철학적 심상으로 해석된다. 현상적으로 보면 초목에 불과한 대나무의 고유한 본질을 탐색, 궁구함으로써 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도체로서 자연은 개인의 심성과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근거인 동시에, 순리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알려 주는 규준(規準)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사대부인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다음 글은 초목화훼를 대하는 태도와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삶의 궁극적 효과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아! 화초는 식물이어서, 지식이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양하는 이치와 거두어 보관하는 법을 몰라, 습한 것을 건조하게 하고, 추운 것을 덥게 하여 천성을 어기게 되면 반드시 시들어 죽을 뿐이다. 어찌 다시 꽃을 피워 그 빼어남을 발하여,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식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 그 마음을 태우고, 그 몸을 괴롭혀 천성을 어기고 성정을 해치겠는가. 내 이제야 양생(養生)하는 법을 얻었으니, 이로 미루어 넓히고 채워 간다면 장차 나아가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270)강희안(姜希顔), 「양화소록서(養花小錄序)」, 『양화소록(養花小錄)』 : 이병훈 옮김, 을유문화사, 1977, 30쪽.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불리며 당대 문예를 주도하던 강희안이 손수 꽃과 나무를 기르며 얻은 경험을 기술한 『양화소록(養花小錄)』 서문의 일부이다. 그에게 화초를 기르는 행위는 하찮은 물건에 마음을 뺏겨 뜻을 잃어버리는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아니며, 양생의 법을 배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지혜를 체득하는 유용한 방편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사대부들은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들도 자연의 일부임과 동시에 우주 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하나의 도체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를 보고, 기르는 것은 단지 감각적 쾌락을 위한 행위로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자연의 묘리를 터득하고 성정을 함양하며, 나아가 세상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교훈을 얻고자 하였다. 다양한 초목과 화훼를 키우며 출세간(出世間)의 낙을 즐겼던 강희안, 화분에 심은 대나무를 살리고자 갖은 정성을 다하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271)김인후(金麟厚), 『하서집(河西集)』 권9, “丙午夏 余旣病無所事 惟致意於種蒔 而盆具顧未可卒得 乃移竹於汲罌 至再皆用種法 猶不活 各節解而死 冬有樵童得稚松一叢 其株三十有二 栽之碗中 亦死 又嘗有溪蓀二叢 一傅之蠔背 以爲常玩 一仍在石上 雪山交代 適來見 爲敎工人 略倣鼎爐爲制以送之 石上者 傍列他奇石 下鋪以白沙 而放以小魚 寘之庭 極寒凍裂 魚亦不能存 舍南有菜畦 泉流自籬外入圃 鑿一掬地 累石而潴之 所畜魚先後凡若干尾 或殘於猫 或蝕於蟲 又或爲兒輩之烹食焉 無孑遺者 申彦沃氏致盆柚 長可尺餘 益所撫玩 至冬而失其養 且爲兒童所振搖 遂以槁死 梅則丙午春 在長城家 少子從虎所移上破器者三 而自來南山家 夏死其一 一死於丁未冬春之交 而盆改於許應瑞 所存一株 再爲生員叔之羔所齧枝葉尙未能更萌焉 陳惟善家 有怪石 今致之牆下 時四月壬辰也.” 국화가 핀 것을 기념하여 친우들과 술을 마시며 “집이 가난해도 꽃은 많다.”고272)정약용(丁若鏞),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3, 「죽란국화성개 동수자야음(竹欄菊花盛開同數子夜飮)」. 자랑스러워하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사대부들의 공통적인 취상(趣 尙)과 지향을 대변한다.

확대보기
이징의 난죽병
이징의 난죽병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이징의 난죽병
이징의 난죽병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이징의 난죽병
이징의 난죽병
팝업창 닫기

조선 사대부의 이와 같은 인식과 사유 방식은 자연을 소재로 하는 미술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를 방증하는 예는 허다하다. 허주(虛舟) 이징(李澄, 1581∼?)이 그린 난죽병(蘭竹屛) 마지막 폭의 글은 조선 사대부들이 문예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궁극적 지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확대보기
이징의 난죽병
이징의 난죽병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이징의 난죽병
이징의 난죽병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이징의 난죽병
이징의 난죽병
팝업창 닫기

아! 도(道)가 드러나고 어두워짐에 따라 물(物)의 성쇠가 달려 있으니, 물의 성쇠에 따라 도가 퍼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점칠 수 있다. 이 난죽(蘭竹) 그림을 선생(趙光祖)이 감상하고 그 위에 제시(題詩)를 쓰시니, 난초는 더욱 향기롭고 대나무는 더욱 맑아져 난죽의 융성함은 여기에서 극에 다다랐다. 불행히도 선생의 도가 어두워지고 밝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비록 난초가 있으나 누가 난초로 여겼겠으며, 비록 대나무가 있으나 누가 대나무로 여 겼겠는가. 하물며 선생의 시를 그 누가 보배롭게 여기고 입으로 외웠겠는가. 그 향기는 빈 골짜기에 묻히고, 그 신비로움은 강 언덕에 끊겼도다. 마침내 병화(兵禍)에 소실되어 8편의 절구(絶句)를 보고 들을 수 없게 된 데에 이르러서는 이 난초와 대나무의 쇠함은 또한 극심해졌다. ……

사물의 성쇠가 과연 도가 드러나고 어두워짐과 무관하다 하겠는가. 슬프다! 선생의 도는 드러나고 어두워짐이 있었고, 난죽도 역시 성하고 쇠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난죽과 선생의 만남이 어찌 운수가 있음이 아니겠으며, 선생의 도가 드러나고 어두워짐을 난죽으로 인하여 볼 수 있으니, 선생이 난죽에 제시를 쓴 것도 어찌 우연함이겠는가. 그러나 난죽은 형체가 있는 물건이요, 도는 형체가 없는 것으로 때도 없이 무너지고 장소도 없이 일그러진다. 지난날 (도가) 11어두워졌을 때 그 밝음이 없어졌던 것은 아니요, 지금 (도가) 밝아졌다고 해서 또한 그 밝음이 더해진 것은 아니다. 후세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난으로써만 난을 보지 말고 선생의 향기로운 덕을 생각할 것이며, 대나무로써만 대나무를 보지 말고 선생의 맑고 곧은 절개를 생각해야 한다.273)정온(鄭蘊), 『정암집(靜庵集)』 부록(附錄) 권4, 「난죽병발(蘭竹屛跋)」 ; 유홍준, 「허주(虛舟) 이징(李澄)의 난죽병(蘭竹屛) 고증과 작품 분석」, 『조선 후기 그림과 글씨』, 학고재, 1992, 124쪽 참조.

이 글은 사림(士林)의 중조(中祖)로 추앙받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제화시(題畵詩)가 적힌 난죽 그림을 복원한 뒤, 인조대의 명신(名臣)인 동계(桐溪) 정온(鄭溫, 1569∼1641)이 지은 발문(跋文)이다. 여기서 정온은 도와 물과 인간을 흥망성쇠를 지닌 유기체로 상정하여, 대나무와 난을 이른바 ‘도(道)’의 발현·성쇠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설명하였다. 조광조의 행의와 정신을 기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 사대부의 자연관과 이를 소재로 하는 문예의 본질적인 목적을 가늠하게 하는 글이다.

동아시아 특유의 자연관과 성리학적 이념의 토대 위에서 산출된 조선 사대부의 미술 문화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산수, 화조, 사군자 같은 자연 물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창작한 모든 문예가 이와 같이 성리학적인 탐리(探理)와 철리(哲理)의 시각만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작가의 감각적 느낌과 순수한 감상을 담아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자연관과 이에 기반한 미의식이 미술 창작의 동인이자 목적으로 사대부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조선 사대부의 미술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임에 틀림없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