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1. 화조와 사군자의 의미와 심상
  • 도덕적 이상의 표상
  • 단금(斷金)의 우의
백인산

충의나 절개가 대체로 군신(君臣)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덕목이었다면, 동등한 사회적 관계라 할 수 있는 친우 관계는 우의(友誼)와 신뢰가 무엇보다도 중시되었다. 실제 군주와의 관계는 직접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서는 관념적인 당위로 그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지만, 교우 관계는 달랐다. 배움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는 친우는 출사하였을 때뿐만 아니라, 초야에 있을 때에도 늘상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였다. 또한, 교유 관계는 단지 사회적 관계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인격과 행의(行誼)를 반영하는 또 다른 자아로 인식되곤 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유교적인 윤리관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다른 어떤 관계 이상으로 친구의 존재를 매우 중시하였다. 공자는 『논어(論語)』의 첫 장에서 “벗이 있어서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으며, 유교적 윤리 강령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오륜(五倫)의 “벗 사이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조항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처럼 우의를 중시하는 관념과 인식은 수많은 고사(故事)와 미담(美談)으로 유전되었고, 문학과 예술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상을 통해 우의의 상징성을 찾고자 하였다. 난초가 대표적인 예이다. 난초가 이런 상징을 가지게 된 것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이로부터 ‘금란(金蘭)’은 친구들 사이의 깊은 우정을 일컫는 아칭(雅稱)으로 상용되었다. 세종대의 명유로 이름이 높았던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친우들과 모임을 갖고 지은 다음 계문(契文)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인륜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붕우가 그 가운데 하나인데

벗으로 인을 도우니 이는 삼익(三益)을 취함일세

계를 맺어 마음을 같이하니, 이름을 금란(金蘭)이라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잊지 않길 다짐하네

이 말을 저버리면, 신명이 허여하지 않으리.279)변계량(卞季良), 『춘정집(春亭集)』 권11, 「금란계문(金蘭契文)」.

『주역』의 내용에서 비롯된 우의의 상징으로서 난에 대한 인식은 묵란화(墨蘭畵)와 같은 그림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조선 말기 최고의 묵란화가였던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자신이 그린 묵란화에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라는 제사를 남겼다. 또한, 이하응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석란도(石蘭圖)에 적은 제시도 역시 난을 우의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는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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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원의 석란도
이유원의 석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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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여! 난이여! 그 지조는 아취 있고, 그 향기는 맑구나. 이에 군자가 늘상 더불어 살았으며, 이것 없이는 교우의 도가 불가하니, 난으로 맹세하고 돌로 사귀니, 그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들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유학, 그중에서도 성리학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유 방식과 삶의 규범을 설정하고 이를 실천궁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군자적인 풍모와 덕행, 충의와 절개, 속진을 멀리하는 은일의 미덕, 친우와의 우의 등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늘상 지향하고 소망하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도덕적인 이상을 여러 동식물에 가탁하여 담아내곤 하였으니, 사군자나 세한삼우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이상들이 현실 속에서 변질되고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적 이상과 지향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된 경우는 결코 없었다. 이에 조선의 많은 사대부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는 별개로 자신들의 도덕적인 이상을 문예에 적극적으로 담아내었다. 조선시대 사군자화(四君子畵)와 화조화(花鳥畵)의 발전은 이들 소재가 지니는 이상적 상징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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