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1. 화조와 사군자의 의미와 심상
  • 전승(傳承)과 통교(通交)의 매개체
백인산

인간의 정서와 인식이 투사된 문예의 소재로서 자연물은 개인적·문화적·역사적·계층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다양한 관념을 내포한다. 특히, 상고(尙古)와 감계(鑑戒)의 전통이 강하였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관념화된 전승(傳承) 가치를 절대화하였고, 고전적인 명현(名賢)이나 대문호들과 연관된 전고(典故), 고사 역시 문예 창작의 소재로 반복되었다. 따라서 고사에 등장하는 동식물들은 단순한 현상적인 사물이 아닌 문화적 기재(機材)의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를 매개로 옛 성현들의 삶과 정신에 교감하고 계승하려는 의식이 강했다. 이황이 지은 다음 시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 많은 사물이 어디서 왔는가?

막막한 근원은 비어 있지 않도다

전현(前賢)께서 감흥을 얻은 곳을 알려 하면

뜰의 풀과 동이 속의 물고기를 살펴보시길.283)이황(李滉), 『퇴계집(退溪集)』 권3, 「임거십오영-관물(林居十五詠-觀物)」.

사물의 존재 원리를 만물에 내재된 이(理)에서 찾으려 한 이황은, 뜰의 풀을 베지 않고, 어항 속에서 물고기를 키우면서 ‘생의(生意)’를 보고자 하였던 북송대 성리학자인 정호(程顥, 1032∼1085)의 관물 정신으로 귀의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풀과 물고기는 그가 귀감으로 삼았던 정호와의 통교(通交)를 가능케 하는 매개인 셈이다.

김인후가 대나무, 매화, 국화, 연꽃과 더불어 물을 소재로 지은 다음 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흥건히 흐르는 한줄기 물 하늘을 열어젖히고

솔개 그림자 낮을 적에 물고기 돌고 도네

모으고 얻어 허한 가운데 함양코자 뜻을 두니

그대는 친히 회옹(晦翁)을 뵙고 왔겠지.284)김인후, 『하서집』 권7, 「오영정차운-수(五詠亭次韻-水)」.

김인후는 자연히 흐르는 물줄기와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솔개와 물고기를 통해 천지조화의 법칙을 발견하고, 도리와 정서를 함양하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고 이는 회옹, 즉 주자(朱子)를 만난 것과 다름없다고 읊고 있다. 그에게 물과 솔개와 물고기는 단지 하나의 자연물이 아니라 주자와 통교하여 그 정신을 전승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주변의 동식물에 의탁하여 성현이나 고전적인 문인들과 통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소를 보고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떠올리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은일을 대표하는 인물인 노자(老子)나 허유(許維), 소부(巢夫)를 연상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자는 노자가 푸른 소(靑牛)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빠져나가 서역(西域)으로 가서 불타(佛陀)가 되었다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의 내용과 연관된 것이며, 후자는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물려주고자 하였으나 이를 듣고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영천에 가서 귀를 씻자, 소를 끌고 물을 먹이려 왔던 소부가 더러운 말을 씻어 낸 물이라 하여 상류에 가서 먹였다는 영천세이(潁川洗耳)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거위를 통해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와 통교하기도 하였다. 거위의 목놀림을 보고 변화무쌍한 운필의 묘를 깨달았고, 마음에 드는 거위를 얻기 위해 도사(道士)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잔설(殘雪)이 있는 겨울에 매화를 찾아 장안의 동쪽에 있던 다리인 파교(柁橋)를 건넜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이나 대나무를 ‘이사람(此君)’으로 부르며 혹애(惑愛)하였던 왕휘지(王徽之), 대숲 속에서 거문고를 타며 은일과 한유의 미덕을 노래한 왕유(王維)는 매화와 대나무를 통해 통교할 수 있는 대문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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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의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심사정의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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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조선의 사대부들은 동물이나 식물과 관련된 옛 성인이나 문인들의 행적과 시문에 감응하고 동조함으로써 그들의 정신과 지향을 계승하고 나아가 그들과 동질화되는 과정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의 장에서 통시적으로 확인하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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