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문인화로서의 화조화와 사군자화
백인산

조선시대 문인화의 주요한 일원으로, 화조화와 사군자화가 이루어낸 성취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원소재가 지니는 내재적인 정신성과 상징성, 혹은 문화적 함의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문인화가 갖추어야 할 심미적인 요건은 물론, 구체적인 표현 방식에서 문인 사대부의 취향과 능력에 부합한 것도 주요한 원인이다.

문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인 사의성(寫意性)은 작가의 주관과 개성을 존중하여, 개인의 미묘한 감정과 정서, 사상을 표현하는 밑거름이 된다. 따라서 사대부 화가는 인습적 규범과 작의적인 화풍을 거부하고, 일정한 함의를 지닌 자연물을 자신의 시각과 정신에 따라 재해석하여 형상화시킨다. 여기서 작품에 개입되는 작가의 성정은 주관적 심의와 흥취만이 아니며, 인격과 교양 및 이상과 염원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다.

문인화론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식(蘇軾, 1036∼1101), 미불(米芾, 1051∼1107), 황정견(黃庭堅, 1045∼1105) 등 북송의 문인들은 형태만을 닮게 그리는 행위를 비판하고, 대상물에 내재된 철학적·문화적 함의를 화가 자신의 품성과 교양을 통해 재창조하는 그림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문인화 전통은 구도, 기법, 색채 등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소보다는 오히려 작품 이면에 담긴 작가의 인품, 학식, 정서 등의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문인들의 그림은 곧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회화 인식은 조선의 사대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문인화 발전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그림은 물상을 형용하는 것으로 대개 하나의 예술이다. 그러나 이를 업으로 삼아 공교로움에 나아가는 사람은 열에 하나둘 정도이며, 더불어 오묘함에 이르는 자는 전무할 정도로 거의 없다. 대나무에 이르러 종신토록 매달려도 공교하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니, 하물며 그 오묘함을 바라겠는가.

이곳에서 오묘한 경지에 이른 자를 살펴보면, 무릇 공자(公子)나 왕손(王孫), 소인묵객(騷人墨客)이 많은데, 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않으면서도 문득 오묘한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일찍이 그 까닭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급기야 옛사람이 그림을 논하는 것에서 ‘기운은 타고나는 것(氣韻生知)’이라는 말을 보고 난 후 반드시 하늘에서 얻은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땅히 그 풍골(風骨)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종류로 이를 말하면, 난은 대나무 다음이고, 매화는 또한 난 다음이다. 대저 식물이라는 것은 본디 고요한 것이어서, 형상에 활기를 넣으려면 어려운 것인데, 특히 이 세 가지 것은 더욱 어려울 뿐이다.285)최립(崔岦), 『간이집(簡易集)』 권3, 「삼청첩서(三淸帖序)」.

이 글은 조선 중기 명문장가인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이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인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의 『삼청첩(三淸帖)』에 쓴 서문(序文) 중 일부이다. 대나무, 난, 매화 같은 소재는 단지 손재주에 능한 직업 화가가 아닌, 타고난 풍격이 뒷받침되어야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으로 문인화로서의 사군자화에 대한 조선 사대부의 인식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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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 『삼청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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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 『삼청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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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 『삼청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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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 『삼청첩』 서문
이정의 『삼청첩』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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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성정을 중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앞서 살펴본 관물 정신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는 형사와 전신의 논의로 진전되었다. 그 결과 문인 사대부는 단지 대상의 외형을 화폭에 옮기기보다는, 내면에 지닌 본질을 파악하고 정신성을 옮겨 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여기서 화조화와 사군자화의 전신(傳神)은 형태적 유사성이 아닌, 대상이 지닌 풍부한 문화적 함의와 상징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러한 전신의 표현은 심안(心眼)으로 대상을 궁구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는 작가의 학식과 소양이 두루 갖춰져야만 가능하다. 특히, 사군자의 경우, 대상의 본질 을 간취(看取)하는 행위는 군자의 이상과 자연의 도를 발흥시키는 일과 관련되었고, 작품 창작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였다.

한편, 형사와 관련하여 사군자의 형태적 특징 중 특기할 만한 점은 글씨와의 유사성이다. 일상적인 필기 수단인 한자에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 그림이 이루어지는 사군자화의 형사(形似)와 운필(運筆)의 특성으로 인해 사대부에게 비교적 평이하고 친숙한 소재로 인식되었다. 더구나 서화동원(書畵同源)과 시서화 일치(詩書畵一致)를 주창하는 문인화의 견지에서 볼 때, 사군자화는 그 기초 조건을 완벽히 겸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은 한자의 상형성에서 기인한다. 표음 문자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물상을 형용하는 데서 출발한 한자는 그 자체가 극도로 추상화된 그림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이러한 글씨를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명제가 가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한자 문화권의 문인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반드시 ‘글씨 쓰는 법(書法)’으로 그려야 한다는 서화 일치(書畵一致)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원대의 대표적인 서화가로 조선 초기 문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 1254∼1322)는 이와 관련해 “돌은 비백(飛白) 같고, 나무는 주서(籒書) 같되, 대나무를 그릴 때는 오히려 팔법(八法)에 통해야 한다. 만약 이를 아는 자가 있다면, 글씨와 그림이 본래 같음을 알 것이다.”286)갈로(葛路), 강관식 옮김, 『중국 회화 이론사』, 미진사, 1989, 311쪽. 라고 설파하였다.

조선 말기 예림(藝林)의 종장(宗匠)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역시 “난을 치는 법은 역시 예서(隷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을 치는 법은 화법(畵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한 붓질이라도 화법이 있다면,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287)김정희(金正喜), 『완당선생문집(阮堂先生文集)』 권2, 「여우아(與佑兒)」.라며 서화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그림과 글씨를 동일시하는 관념은 진일보하여, 그림과 시를 결합시키려는 단계로까지 발전된다. 이는 단지 그림으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화의(畵意)를 시문으로 보충한다는 발상이 아니라, 시의 시각성, 그림의 청각성을 요구하는 시화(詩畵)의 적극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문인화의 종조(宗祖)로 추앙되는 왕유(王維, 699?∼761)의 그림을 일러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之詩).”고 한 소식(蘇軾, 1036∼1101)의 언급은 바로 그런 경지를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시구가 없어도 감상자로 하여금 무한한 시정(詩情)을 느끼게 하고, 작가의 성정과 학식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그림이야말로 이상적인 문인화라는 것이다.

“매화를 그리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그 취상이 같다.”288)이선옥, 『조선시대 매화도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4, 31쪽.라는 원대 문인 화가 오태소(吳太素)의 주장이나,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묵죽화가 정홍진(丁鴻進)의 묵죽화에 대해 “보자마자 당장 시가 이루어지니, 이 대의 가치가 한층 올라가는구나.”289)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후집(東國李相國集後集)』 권5, 고율시(古律詩), 「차운이학사화사정비감묵죽영자시견기(次韻李學士和謝丁秘監墨竹影子詩見寄)」.라고 한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언급은 문인화의 요체로서 ‘시서화일률론(詩書畵一律論)’을 명확히 인식하고, 사군자 그림을 통해 이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던 흔적들이다.

사군자화를 비롯한 문인화에서 시서화 일치를 추구하는 경향은 조선시대에도 강고하게 유지되었다. 조선 초기 문인인 김일손(金馹孫, 1463∼1498)이 이종준(李宗準)의 매죽 그림에 쓴 “나는 서화를 모르나 오히려 능히 정신으로 그 신묘함을 알 수 있다. 서화 시문은 모두 한 가지. 가슴속 깊은 것이라, 가슴속에 든 것이 없다면 어찌 능히 시서화로 꽃피울 수 있겠느냐.”290)김일손(金馹孫), 『탁영집(濯纓集)』 권1, 「서중균화(書仲鈞畵)」.라는 제시가 그 예이다.

사대부 화가들은 작가의 심의를 대상물에 실어 표출하는 과정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어떤 요구나 강압에 의해 그림 그리기를 가장 꺼려하였다. 글을 읽고 심신을 수양하는 가운데 문득 가슴속에 일어난 성정과 감흥을 화폭에 옮겨 내는 것을 문인화의 필수적인 특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로부터 여기(餘技)와 묵희(墨戲)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여기는 화업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 화가가 아닌, 학식과 교양을 갖춘 문인이 취미로 그리는 경우를 말한다. 문인화의 여기적 특성은 먹장난이란 의미의 묵희라는 용어로 한층 강조되었다.

고려 말의 문인인 이인로의 묵죽화가 “이 가지와 마디는 보통 화사는 그릴 수 없는 것이니 동산(東山, 미불의 사위인 오철(吳澈)의 호)의 묵희(墨戲) 풍골(風骨)이 있습니다.”291)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閑集)』 권상(卷上).라고 평가받은 기록이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아들인 김군수(金君綏)의 묵죽화에 이인로가 쓴 “설당거사(雪堂居士, 김군수의 호)가 시(詩)로써 떨쳤는데 묵희의 풍류로서 살아 있는 듯 그려내었구나.”292)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 권상.라는 제시는 고려 말 사대부들이 문인화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묵희나 여기를 중시하였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문인들이 이토록 여기나 묵희를 강조하였던 이유는 직업적인 화가들의 화업(畵業)과 차별성을 두려는 의식도 없지 않았지만, 이른바 완물상지를 경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그림을 말예(末藝)나 천기(賤技)로 인식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문예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대부들은 문인화의 여기적 특징과 사의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대자연의 섭리와 군자의 이상, 혹은 현세적 욕망이 투영된 화조와 사군자는 산수에 비해, 한층 정형적이고 즉물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제재는 심오한 상징이나 관념적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작가는 물론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과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교감을 나누기에 용이하였다. 또한, 화조와 사군자가 지니는 주변성과 일상성, 친밀성은 여기나 묵희의 대상으로 매우 적합한 소재였다. 이는 산수와 같은 대자연의 중량감과도 거리가 있고, 인물화에서 요구되는 사생적(寫生的)인 형상성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시창서안(詩窓書案) 아래서 책을 읽고 시문을 지으며, 남은 여가에는 화목을 기르거나 감상하고, 나아가 시정을 듬뿍 담은 화조화나 군자의 충의(忠義),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화를 여묵(餘墨)으로 묵희하는 일상을 가장 고상하고 아취 있는 생활 태도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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