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화조화의 특징과 의미
  • 길상의 소재로 장식성을 추구하다
백인산

조선 초기 화조화는 다른 화목(畵目)과 마찬가지로 현재 전해오는 작품이 극히 부족하여 구체적인 특징을 논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당시 화원 취재(取才)에서 날짐승과 길짐승을 그린 영모(翎毛)가 3등으로, 화훼와 초충이 4등으로 배점된 사실로 보아 궁정을 중심으로 화조화가 선호되었고, 그 수요 또한 적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십장생도를 비롯한 다양한 화조화풍의 그림들이 궁정 내부의 장엄 등을 위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들은 대체로 북송대 채색 공필(工筆) 화조풍을 계승한 화원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되어 사대부들의 미적 취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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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미의 지곡송학도
유자미의 지곡송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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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대부들도 일정 부분 장식성이 강한 공필의 화조화풍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현전 학사 출신 사대부인 유자미(柳自湄, ?∼1462)가 그린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가 그 예이다. 소나무와 대나무, 영지가 있는 계곡에 한 쌍의 학이 깃든 정경은 화면 구성과 소재 운용 면에서 화조화보다는 산수화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초기 화조화풍을 가늠하기에는 충분하다. 화원이 아닌 사대부 화가가 그린 지곡송학도가 화려하고 정치한 궁정화풍을 보이는 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화조화에 대한 취상의 일 단을 보여 준다. ‘부귀연년(富貴延年)’과 ‘기수만년(杞壽萬年)’이라는 세속적인 내용의 인문(印文)도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조선 초기에도 일부 사대부 화가는 수묵 위주의 사의성을 중시하는 화조화를 시도하였겠지만, 그 정도와 빈도는 지극히 미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히려 그보다는 지곡송학도와 같이 왕실 취향의 화려하고 정치한 장식풍이 대세를 이루어, 사대부들 또한 사의적인 화풍보다는 길상적(吉祥的) 목적의 장식적인 화조화풍을 선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사대부들이 화조화에서 추구하였던 심미와 지향이 고려시대 귀족적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조선 개창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성리학이 체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시대적 한계로 사대부들의 성리학적인 문예관과 미의식 역시 성숙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생래적으로 장식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화조화에까지 그들의 인식과 지향이 투영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는 어려웠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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