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특징과 의미
  • 국법으로 정한 1등 그림
백인산

고려 중기 이후에 문인 귀족들에 의해 유행하였던 사군자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풍미하였다. 이는 사군자가 지니고 있는 군자적(君子的) 상징성과 단순하면서도 강직한 미감이 조선 왕조를 개창하고 문화 전반을 주도한 성리학자들이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관과 미적 지향에 적절히 부합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원의 선발 시험에서 산수나 인물보다 대나무가 더 중시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사군자화가 더 이상 고려시대와 같이 일부 문인 귀족들이 ‘묵희’나 ‘여기’로 그리는 그림을 넘어 화원 화가들에게까지 폭넓게 파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 사군자화도 현전하는 작품이 없어 기량이나 품격, 양식적 특징 등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신빙성 있는 현전작이 전무한 상황에서 몇몇 시문을 통해 조선 전기 묵죽화의 이상과 지향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서거정(徐居正)이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1427∼1497)의 묵죽화에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문동(文同)의 대그림이 천하에 기이한 것임을, 또 보지 못했는가, 동파(東坡)가 대그림과 시에 능하였음을. 지금 칠휴(七休, 손순효의 별호)가 바로 이들이 아니겠는가.”293)서거정(徐居正), 『사가집(四佳集)』 권52, 「손칠휴화죽일지증이군(孫七休畵竹一枝贈李君)」.라고 한 제시에서 중국 묵죽화의 비조인 문동과 소식(蘇軾)을 이상으로 하는 조선 초기 묵죽화의 경향성을 가늠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의 사군자화에는 북송대 사군자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중기 사군자화의 이상과 지향이 강고하게 유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고려 말기 새로이 유입된 조맹부와 그의 부인인 관도승(管道昇, 1262∼1319), 그리고 이간(李衎), 1245∼1343)으로 대별되는 원대 묵죽화 양식을 새로운 이상적 전형으로 인식하고 추종하기도 하였다. 서거정이 강희안(姜希顔)의 또 다른 묵죽에 제한 시에서 “미산(眉山, 소식의 본향(本鄕))은 이미 돌아가고 자앙(子昻, 조맹부의 자)도 없으니, 길고 가는 대 상쾌하게 한번 쓸어낼 사람 다시 없는데, 그 후신(後身)인 강 학사(姜學士, 강희안)가 있어, 풍류 문채(風流文彩)가 무성하여라.”294)서거정, 『사가집』 권14, 「제이은대소장강경우묵죽 2수(題李銀臺所藏姜景愚墨竹二首)」.라고 하여, 조맹부를 소식이나 문동에 견줄 만한 묵죽화의 대가로 인식하며 상찬하고 있는 것이 그 증좌(證左)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신빙성 있는 작품이 전무한 상태에서 조선 전기 사군자화풍의 경향을 확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세종대에 안평 대군(安 平大君, 1418∼1453)이 소식, 문동, 조맹부, 이간의 묵죽화, 설창(雪窓, ?∼1350)의 묵란화, 왕면(王冕, 1287∼1359)의 묵매화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초기의 사군자화가 북송과 원에서 활동한 문인 화가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조선 초기의 사군자화는 북송 문인화풍을 토대로 고려시대의 전통과 고려 말 조선 초에 유입된 원대 문인화풍, 그리고 사행(使行) 등을 통해 접촉한 명대의 문인화풍 등 다양한 요소들이 축적되면서 서서히 조선 고유의 독자적인 양식의 형성을 모색해 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사군자화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조선 사군자화풍을 예시하고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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