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특징과 의미
  • 조선 성리학에서 피어난 조선의 사군자
백인산

조선 중기는 성리학적 체계와 문화가 점차 기반을 잡아 가며 전기 문화의 잔재를 청산하는 한편,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달해 가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표출되던 시기였다. 이에 회화 분야에서는 수묵 문인화가 크게 유행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후일 사군자로 대별되는 매, 난, 국, 죽 그리고 포도, 소나무 등이 주된 화재(畵材)였다. 이 시기 사군자화의 발전 과정이 성리학의 심화 과정과 동궤(同軌)를 이루고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에 성리학의 정치적 구현과 연구의 심화가 표면화되기 시작한 중종∼명종 연간(1506∼1567)에 신잠(申潛, 1491∼1554), 유진동(柳辰仝, 1497∼1561) 등 묵죽화에 전일(專一)하는 문인 화가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잠과 유진동 두 사람 모두 조선 사림의 중조라 할 수 있는 조광조를 직·간접적으로 사승(師承)하고 존숭한 인물이라는 점은 이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 한,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심화 발전하여, 토착화되기 시작한 선조∼인조 연간에 이르러 수묵 문인 화가 정점에 이른 것이나, 이를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인 황집중(黃執中, 1533∼?), 이정(李霆, 1554∼1626), 어몽룡(魚夢龍, 1566∼1617) 등 소위 선조 연간(1567∼1608) 문인화 삼절(文人畵三絶)이 모두 성리학을 조선화시킨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계열의 문인들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295)백인산, 『선조 연간 문인화(文人畵) 삼절(三絶)-황집중(黃執中), 이정(李霆), 어몽룡(魚夢龍)-』, 『간송 문화』 65,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 2003.

현존하는 실작(實作)을 통해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이들이 활동하였던 선조 연간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다. 그중 이정은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으로 시서화에 두루 능해 당대를 대표하는 문예지사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묵죽화는 명실 공히 한국 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을 만큼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소재의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시키는 화면 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하는 조형 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정의 묵죽화는 조선 묵죽화의 전형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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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 통죽(筒竹)
이정의 통죽(筒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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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이 묵죽화로 명성을 떨치던 무렵, 어몽룡은 묵매화에 천착하여 조선 묵매화의 기틀을 닦아 놓는다. 어몽룡의 묵매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월매(月梅)이다. 화면 하단에는 오랜 풍상을 겪은 듯, 상단이 부러진 둥치를 강렬한 비백(飛白)으로 그려 넣고, 거기에서 새로 벋어 나온 두 줄기 마들가리는 이제 맺히기 시작한 꽃망울을 달고 하늘을 찌를 듯이 올곧게 솟아 있다. 화면 상단 왼편에는 둥근 보름달을 아스라이 그려 넣어 시정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지극히 단순한 구도와 묘사처럼 보이지만, 늙은 둥치와 새로운 가지, 흐트러짐 없이 날렵하게 솟아 오른 직립한 가지의 강직한 직선미와 둥근 달의 유현한 곡선미가 절묘한 대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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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몽룡의 월매
어몽룡의 월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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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매화에 비해서 비중과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난초와 국화도 이 시기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난초를 그린 작가로는 이정과 허주(虛舟) 이징(李澄, 1581∼?) 등이 있다. 이정의 난초(蘭草)는 일경다화(一莖多花)의 혜란(蕙蘭) 한 포기를 그렸는데, 지면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지는 역삼각형 구도에 좌우 대칭으로 적당한 길이의 난엽을 뽑아 내어 전체적인 균형을 중시하고 있다. 이른바 봉안(鳳眼), 상안(象眼), 파봉안(破鳳眼) 같은 명대 이후 정형화된 난화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또한, 중간이 끊어져 보일 만큼 비수(肥瘦)의 차이가 큰 필선으로 처리한 난엽 묘사도 이채롭다. 변화와 운율감을 살려 냄으로써 도식적인 형태로 인해 야기된 경직성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인 듯하다. 전체적으로 엄정하면서도 활달함이 넘쳐 묵죽화에서 보여 주었던 미감과 지향이 큰 차이 없이 드러나 있다.

한편, 묵국(墨菊)의 경우는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작품이 가장 이른 예에 속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에 그려진 다른 묵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문헌 기록으로도 묵국을 그렸다는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쉽게 단정하여 말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이즈음에는 중국에서도 묵국이 별반 유행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좀 더 세심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는 묵죽, 묵매를 위시한 사군자화가 본격적으로 그 려지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조선 고유의 양식적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이다. 이 시기 사군자화가 이처럼 크게 발전한 것은 확대된 명과의 교류를 통한 명대 문인화풍과 화보 등의 유입도 한 원인이었지만, 그보다는 자기 시대와 자신들의 이념과 지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밑바탕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전란을 겪은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런 혼돈과 고난의 시기를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군자가 지닌 심상인 절개와 지조는 당시 문인 사대부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자 정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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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 난초
이정의 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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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위기, 그리고 극복으로 이어지는 조선 중기 사회 문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초창(初創)의 건실성과 역동성, 절체절명의 위기가 주는 절박함과 비장함,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낸 자신감 등은 이 시기 문인들의 보편적 정서였고, 이들이 추구하는 미적 지향도 이런 정서가 투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 중기 사군자화에는 이런 시대적 정서와 미감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 시기 사군자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직설적이리만큼 강경하고 명징(明澄)하게 화재(畵材)의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시대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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