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특징과 의미
  • 문사의 아취와 시인의 풍류를 좇다
백인산

조선 후기 사군자화는 사실성을 중시하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풍미 속에서 다소 부진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 등 당대를 대표할 만한 문인 화가들 이 사군자화를 지속적으로 그려 내면서 명맥을 유지해 갔다. 이들은 각기 조선 중기의 사군자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회화 이념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화풍을 선보이기도 한다.

조선 후기 전반기 사군자화의 전개는 묵죽화에 전일한 유덕장 한 사람에게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는 탄은 이정의 묵죽화풍을 토대로 자신의 묵죽화풍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초반기 묵죽화에서는 이정 묵죽화의 구도나 기법 등이 형식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내보이게 되니, 담백하고 원만한 필치, 여유롭고 서술적인 화면 구성, 대나무 주변의 경물들을 적극적으로 화면 구성 소재로 끌어들여 서정성을 배가시킨 점 등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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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장의 설죽
유덕장의 설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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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9세 때인 1753년(영조 29)에 그린 간송 미술관 소장의 설죽(雪竹)은 다채로운 화면 구성에 바위나 토파(土坡) 그리고 주변의 초목을 적극적으로 진설하고, 부드러운 필치로 있는 그대로의 전경을 차분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골기 있는 필법으로 과감한 생략과 대비를 통하여 주제를 부각시켰던 이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 사군자화의 전개에서 일획을 긋는 인물로 심사정과 강세황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주지하듯이 명대(明代) 오파계(吳派系) 문인화풍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변화를 꾀하였던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문인화의 주요한 분야 중 하나인 사군자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전통적으로 사군자화의 주간(主幹)이었던 묵죽화나 묵매화는 물론이거니와 묵란화와 묵 국화까지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정은 특유의 감각적인 필치로 시적(詩的) 정취(情趣)와 사의성(寫意性)을 중시하는 난죽화를 그려 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산수화나 화조화 등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사군자화도 화훼화와 동일한 감각으로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군자화에서 보이는 강한 회화성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생의 바탕 위에 기세를 온축(蘊蓄)시키면서도 생동감을 고양시키는 데 주력하였던 조선 중기의 사군자 화풍과는 판연히 다른 감각이다. 조선 중기 사군자 화풍의 전형이 심사정대에 이르러 작가의 내적인 정서와 의취를 투영시키는 사의성과 필묵 자체의 느낌을 중시하고, 창작 행위를 통해 자기 만족적인 유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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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의 괴석형란
심사정의 괴석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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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미술관 소장의 괴석형란(怪石荊蘭)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괴석과 난을 어울려 그린 기본적인 형식은 『개자원화전』 같은 화보를 참고한 듯 보이지만, 표일(飄逸)한 아취(雅趣)가 넘쳐 형식적이고 경직된 화보의 그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록 중국의 화보에서 형식은 빌려 왔지만, 감각적인 필묵의 운용과 여기에서 비롯된 흥취와 정서는 심사정만의 개성이다. 심사정의 사군자화는 그의 회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다지 높지 않고, 따라서 현존하는 작품 수도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군자 화풍의 전환을 보여 주고, 향후 대두되는 사군자 화풍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와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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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의 난죽도
강세황의 난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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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 속에서 쇠잔해 가던 사군자화를 다시 화단의 주류로 부상시킨 인물이다. 조선 후기 사군자화의 전개에서 심사정이 변화와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라면, 강세황은 이론과 실제에서 이를 완성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강세황은 매난국죽 사군자를 한 벌의 그림으로 인식하여 구성한 작품을 다수 남긴 것도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78세에 그린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난죽도(蘭竹圖)는 만년에 접어들면서 가경(佳境)에 이른 그의 난죽화 솜씨가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횡권(橫卷)의 화폭 좌측과 우측에 바위를 포치시켜 화폭 중간에 넓직한 공간을 마련한 후, 여기에 몇 그루의 대나무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화면 우측 바위 옆에 난 한 포기를 그려 화면 구성을 좀 더 다채롭게 하였다. 바위와 난은 지면에서부터 그린 반면 중앙의 대나무는 지면보다 훨씬 시각을 올려 대나무의 상단부만을 그려 내었다. 이로써 상하의 폭이 좁은 횡권의 화폭임에도 불구하고 튼실한 죽간을 가진 성죽(成竹)을 한층 부각시켜 화폭에 담아 내었으며, 나아가 짜임새 있으면서도 확대된 공간감을 조성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세부 묘사에서도 우아하면서도 엄정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구현하였는데, 이는 안온하고 평담함을 중시하는 명대 문인화풍을 추종하던 강세황의 회화 전반적 성향 위에 조선 전통 사군자 화풍 특유의 강인함과 엄정함이 결합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강세황은 명대 오파풍의 문아함을 추구하면서도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강세황 사군자화에서 간취할 수 있는 다층적인 미감은 전대 양식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여전히 사실성을 중시하는 당대 문예 의식의 일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나오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심사정이 제기하고 강세황이 정립한 사의성과 시적 정취를 중시하는 조선 후기 사군자 화풍은 다음 세대인 김홍도, 임희지(林熙之) 등에 의해 계승된다. 이들은 비록 신분적으로는 중서층(中庶層)에 속하였지만, 이른바 ‘사인 의식(士人意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묵죽화에서 간취되는 자유로움, 파격성, 탐미성 등은 이러한 신분적 기반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들에게 난죽을 위시한 사군자는 지조나 절개의 상징이라는 의미는 퇴색되었고, 희노애락의 감흥을 의탁하여 풀어 내는 또 다른 매개체일 뿐이었다. 이에 그들의 사군자화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추구보다는 표현 자체에 탐닉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김홍도의 백매(白梅)와 임희지의 난죽석도(蘭竹石圖)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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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백매
김홍도의 백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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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백매는 특 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 놓아, 강인함을 강조한 기존의 묵매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어렵게 받은 그림 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을 즐겼던 단원에게는 기세등등한 매화보다는 이 백매와 같이 소탈하고 시정 넘치는 매화가 훨씬 마음에 끌렸을 것이다.

한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난죽석도는 속도 있는 필치로 대담한 농담(濃淡)의 변화와 능란한 파발묵(破潑墨)을 구사하며 바위와 함께 어우러진 난과 대나무의 기세를 거침없이 묘사해 내었다. 또한, “원장(元章, 미불)의 돌, 자유(子猷, 왕휘지)의 대나무, 좌사(左史, 굴원)의 난을 한꺼번에 그대에게 주노니 무엇으로 보답할 터인가.”라는 내용의 화제는 분방한 필치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쳐난다.

김홍도의 백매나 임희지의 난죽석도는 조선 중기 이정이 보여 줬던 팽팽한 긴장감이나 내재(內在)된 기운, 강세황이 보여 줬던 부드럽고 평담한 아취와는 거리가 있다. 또한, 사군자를 그리는 데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졌던 서예적 법식도 그다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넘치는 흥취(興趣)와 분출하는 표현 욕구를 한껏 드러내어 형상화시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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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지의 난죽석도
임희지의 난죽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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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군자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나 본질보다는 감성과 흥취를 중시하고, 표현 자체에 탐닉하는 작화 태도(作畵態度)는 분명 조선 중기의 이정, 어몽룡은 물론이거니와 바로 전대의 강세황 화풍과도 현격한 거리를 보이는 것으로,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던 당시 청대 화풍의 영향도 없 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조선 후기에 문예 전반에 걸쳐 노정(露呈)되기 시작한 난만성이 사군자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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