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특징과 의미
  • 서화 일치를 통한 일격(逸格)의 이념미(理念美)
백인산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군자 역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양식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이런 시기에 김정희와 그의 문도들이 사군자의 고전적인 특질인 고고한 이념미의 표출과 서예적 법식의 준용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게 되니, 이후 사군자는 추사화파의 주도 아래 조선 말기 화단의 주류로 부상하게 된다.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가 이를 선도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후기에서 말기로 전환되는 시대적 전환기를 살다 간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와 같은 명청대(明淸代) 화보의 임모(臨摸), 강세황 묵죽화풍의 계승, 청대 묵죽화풍의 수용으로 집약될 수 있는 신위의 묵죽화에 나타나는 여러 성향과 요소들을 시대적 산물이자 당시 조선 문예계의 경향성을 보여 주는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신위의 묵죽화는 분명 전대 이정이나 유덕장은 물론, 심지어 스승인 강세황과도 다른 지향과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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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의 편연수죽
신위의 편연수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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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간송 미술관에 비장되어 있는 편연수죽(便娟修竹)은 신위의 만년 묵죽화풍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생각 된다. 강가의 습윤한 대기를 머금은 대나무와 바위를, 물기 많은 먹으로 부드럽고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천연스런 먹의 번짐과 미묘한 농담의 어울림이 너무도 분방하고 파격적이어서 사의라기보다는 유희에 가깝다. 예술 작품에서 구체화된 형식과 양식의 변화는 필시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위의 묵죽 양식 역시 대나무에 새로운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가 대나무를 통하여 보이고자 한 것은 절개와 지조가 아닌 아름다움과 우아함이었다. ‘아리따운 긴 대(便娟修竹)’라는 화제는 이를 단적으로 예증하고 있다. 이런 탐미적인 취상(趣尙)은 곧 필묵의 유희로 나타났으니, 여기에는 굳건한 기상이나 응축된 기세는 물론이거니와 강세황 때까지도 면면히 유지되어 오던 사생에 대한 잔영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위의 묵죽에서 보이는 인식의 전환과 양식의 변화는 청조(淸朝) 학예에 기반한 조선 말기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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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불이선란
김정희의 불이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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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를 필두로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사군자가 화단의 주류로 떠오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는 추사 김정희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그는 글씨는 물론 그림에서도 지고한 이념미를 추구하였으며, 서법(書法)에 충실한 그림을 요구하였다. 이런 그의 회화론을 가장 집약적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화과가 사군자화였다. 그중에서도 추사는 묵란에 천착(穿鑿)하였는데, 산수화나 인물화는 물론 묵죽이나 묵매 등 사군자의 여타 화 목을 제쳐놓고 묵란을 통해 자신의 회화 이념을 구현하려 한 것은 묵란이 지니고 있는 고아하고 간일한 기품을 높이 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과 점을 위주로 하는 기법적인 특성이 사군자 중에서도 단연 서예의 필법과 친연성(親緣性)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추사 묵란화의 정수(精髓)는 불이선란(不二禪蘭)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김정희는 그림과 글씨의 조화보다 한걸음 나아가 서화 일치의 경지가 무엇인지를 유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묵란화에서 이룬 경지는 서화 합일(書畵合一)뿐만이 아니다. 졸박(拙樸)함 속에 함축된 지극한 세련미, 적요(寂寥)함 속의 잠재된 충일한 역동성(力動性), 강인함 속에 흐르는 유연함,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미감을 한데 혼융(渾融)하여 묘사해 내었다. 추사는 이를 일체 만물의 합일과 절대 평등의 경지인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에서 견주며, 자신의 삶과 예술의 궁극적인 지향을 토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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