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특징과 의미
  •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자화상
백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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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의 묵란
이하응의 묵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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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으로 잘 알려진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김정희와 조희룡(趙熙龍), 허유(許維)로 이어지는 이른바 추사파(秋史派) 사군자화의 명맥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에게는 비록 김정희와 같은 심오한 학문적 깊이는 부족하였지만, 왕가(王家)의 엄중한 풍모와 당당한 기개가 있었다. 김정희는 이하응이 지닌 이런 천부의 자질과 품격을 갈고 다듬어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내니, 그 산물이 바로 ‘석파란 (石坡蘭)’으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던 그의 묵란화이다. 그러나 만년에 그린 이하응의 묵란화에는 김정희를 충실히 계승하던 초기 묵란화에 비하여 필치는 원숙하지만, 강인함과 자신감이 훨씬 약화되어 있다. 만년의 원숙함과 세련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밀려 오는 외세와 외래 문화에 압도되어 가던 조선 말기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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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의 노근묵란도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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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과 더불어 조선 사군자화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 바로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다. 민영익은 조선 말기 최후의 세도 재상으로 군림하던 정치가로서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여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는 상하이로 망명한 후, 정치적으로 패퇴한 조선 사대부들이 늘상 그랬듯이 서화와 한묵(翰墨)으로 자오(自誤)하며 일생을 마치게 된다. 민영익의 사군자화는 당시 상하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던 포화(蒲華, 1830∼1911), 오창석(吳昌碩, 1844∼1927)과 같은 화가의 작풍과 유사성이 묻어나 그들과의 교유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필치가 명료하고 엄정하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느낌이 강하다. 조선 사군자화의 전통적인 미감이 반영된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묵란화와 묵죽화에는 난세를 만난 사대부의 회환과 울분이 오롯이 묻어난다. 강철 회초리를 연상케 하는, 비수의 변화가 없는 강경한 난엽과 땅 밖으로 뿌리를 다 드러낸 형상의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는 나라를 잃고 온전히 뿌리 내릴 곳 없는 자신의 심경을 담아낸 것이다. 상해 망명 후에 주로 그린 묵죽화도 기법과 필치는 다소 차이 나지만, 그 내면의 지향과 목적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조선에서는 좀처럼 그리지 않았던 묵죽화를 중국 망명 이후부터 그려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나라를 잃고 먼 이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과 심경을 반영하는 듯하여 의미심장하다. 사군자 중에서도 불변의 기개와 절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소재인 대나무의 의미와 상징이 새삼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묵죽화가 예외 없이 비바람에 흩날리는 풍우죽(風雨竹)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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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의 묵죽
민영익의 묵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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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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