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3. 생활 속의 화조와 사군자
  • 도자의 문양
  • 문방 기물의 장식 문양
백인산

조선 사대부의 서재이자 침실이며,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던 사랑방에는 다양한 가구와 문방구(文房具)들이 제각기 용처에 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사랑방에 있는 대표적인 가구는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서안(書案), 책장(冊欌), 책탁(冊卓), 문갑(文匣),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문방구를 담는 연갑(硯匣, 벼룻집), 필통(筆筒), 지통(紙筒), 취미와 오락을 위한 바둑판이나 연초함(煙草函) 등이다. 이러한 가구와 문방 기물의 장식 문양 중 가장 빈번하게 쓰인 소재는 사대부의 취상이 잘 반영된 화조와 사군자였다.

흔히 문방사우(文房四友)로 불리는 붓, 먹, 벼루, 종이 중에서 장식 문양이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 기물은 벼루이다. 벼루의 장식은 먹을 가는 부위인 먹당 주변 가장자리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나타나는데, 화조를 위시한 동식물 문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매화연(梅花硯)과 같이 사군자의 군자적 상징성을 표출하려 한 문양도 더러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포도나 복숭아, 혹은 사슴, 거북이를 위시한 십장생과 같은 현세적 염원을 담은 소재가 선호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등룡연(登龍硯)이 대표적인 예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를 힘차게 뛰어오르는 잉어를 먹당 주위에 양각으로 시문하여 등용문의 고사를 형상화하였다. 벼루의 주인은 먹을 갈 때마다, 늘상 이 조각을 보면서 등과나 승차를 꿈꾸며 학문에 매진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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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연
매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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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룡연
등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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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매화 무늬로 장식한 연상(硯床)은 사군자를 소재로 한 문방 가구 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연상이란 지필묵연(紙筆墨硯)을 보관하는 용도로 문인의 사랑방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문방 가구 중 하나이다. 연상은 대부분 문양이나 장식을 생략하지만, 이처럼 돋을새김으로 문양을 넣거나 나전(螺鈿)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측널 상단과 하단, 뚜껑에 각각 국화와 매화를 도드라지게 새겨 넣은 이 연상은 장식성을 추구하였지만 격조와 기품을 잃지 않아 단아하고 방정한 조선 사대부의 의취가 오롯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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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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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필통
나전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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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과 더불어 문방구를 보관하는 주요한 도구인 필통은 붓만을 보관하는 용도로 제작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필통은 도자가 주류를 이루지만, 나무나 종이로 된 필통도 적지 않다. 국립 민속 박물관 소장의 나전필통(螺鈿筆筒)은 높이가 다른 팔각통(八角筒) 세 개를 붙여 하나로 만든 특이한 형식으로 하나의 통마다 각기 사군자, 화조, 산수 등을 나전으로 장식하였다. 키가 제일 작은 통에는 대나무와 소나무, 중간 통에는 추규(秋葵)와 복숭아, 가장 큰 통에는 포도와 산수 등을 새겨 넣었다. 조개나 전복 혹은 금은 금속판을 표면에 박아 넣는 나전 기법의 한계로 인해 정치한 사실성은 부족하다. 그러나 나전 문양의 목적은 조형적인 완성도보다는 소재의 함의만 적절히 전달하고 장식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문양 소재로 쓰인,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송죽과 장수와 다자의 기원을 담은 복숭아, 포도 등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분히 길상의 의미를 강조한 전체적인 소재를 고려하면, 여기서 소나무와 대나무는 지조나 절개보다는 장수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나전칠포도무늬서류함(螺鈿漆葡萄文書類函)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포도를 시문하였지만, 앞서 보았던 나전필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기법상의 어려움에도 열매, 잎, 덩굴과 벌 등의 세부 묘사가 비교적 사실적이며, 크고 작은 공간을 적재적소에 운용한 구도와 포치 또한 전문 화가 못지않은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장수나 다자와 같은 길상적 소재를 공통으로 하는 두 작품이 이렇듯 예술적인 성취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원인은 특정 소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문화적 역량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문예 수준이 최고조에 이른 영조와 정조 연간의 문화 역량이 공예품에까지도 여실히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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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포도문서류함
나전칠포도문서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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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에는 연상이나 필통처럼 시문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 필요한 가구뿐만 아니라 의관(衣冠)을 보관하기 위한 의걸이장이나 의함(衣函)이 필요하였다. 이들은 안채와 사랑에서 모두 필요한 가구이므로, 실제 어디서 사용하였는지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대체로 나전 장식의 화려하고 우미함이 주조를 이루는 가구들은 규방(閨房)에서, 소문(素文)의 검박하고 정중한 느낌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주로 사랑방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물론 가부장적 질서가 강고하였던 조선시대를 상기하면, 규방의 가구 역시 집안의 가장인 사대부들의 미감과 취상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을 터이다.

대나무를 새긴 의걸이장은 규방이나 사랑채 어느 곳에 놓아도 무방할 듯하다. 양쪽 여닫이문 정면에 나란히 새긴 대나무 문양은 바위, 난을 첨가하여 구성의 묘미를 살리고, 제시까지 새겨 넣었다. 그러나 좌우 문양이 판에 박은 듯 똑같으며, 그림 자체도 형식화되어 도안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대나무 문양의 의도 또한 장수나 복락의 기원과 같은 길상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닫이문 하단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이란 글귀를 새겨 대나무 문양과 호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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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걸이장
의걸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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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 기물은 응당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 화려함보다는 검박하면서도 단아하고 정중한 미감을 선호한 사대부들이 사용한 문방 가구들은 주로 자연목의 재질과 무늬를 그대로 살려 소박한 천연의 멋과 맛이 진솔하게 베풀어져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던 연상, 필통, 서류함과 같이 일부 문방 기물과 같이 다소간의 문양을 첨가하여 장식한 예도 종종 눈에 띈다. 기실 이런 장식 문양은 소재의 상징성이나 의미를 명확히 인지하고 제작하였다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고착된 특정 도상을 인습적(因習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런 소재가 변함없이 애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재가 지닌 상징과 심미가 사대부를 위시한 실수요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호응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문방 기물과 그 문양들은 비록 장인의 손으로 제작되었지만, 사대부들의 이상과 염원, 취향과 심미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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