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3. 생활 속의 화조와 사군자
  • 도자의 문양
  • 책과 종이의 문양
백인산

책과 종이가 없는 사대부의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책은 학문 도야와 지식 획득의 근간이자 선인들과 통교하는 매체로서, 사대부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필수품이었다. 책의 재료이기도 한 종이 역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를 타인에게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였다. 책을 항상 가까이 두고 읽으며, 종이에 시문을 쓰고, 또 이를 주변 사람과 공유하는 행위는 사대부의 생활 그 자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책과 종이를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이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책이나 종이를 치장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다양한 문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각종 문양으로 장식한 책의 표장(表裝)이나 시, 편지 등을 쓰기 위한 종이를 다양한 문양과 색상으로 꾸민 시전지(詩箋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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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언행록』
『퇴계선생언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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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책의 표장이나 시전지의 문양으로 선호하던 소재는 역시 화조나 사군자였다. 현전하는 고서와 시전지는 물론, 책의 표지 장식을 위해 쓰였던 목판인 능화판(菱花板)이나, 종이의 장식을 위해 문양을 새긴 목판인 시전지판(詩箋紙板) 등에서 화조와 사군자의 자취가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책 표지의 문양은 대체로 바탕 문양과 소재 문양으로 크게 구분된다.298)남권희, 「조선시대 고서의 표지 문양」, 『우리 옛 책의 아름다움』, 한국 문화 콘텐츠 진흥원, 2005, 372쪽. 바탕 문양은 대체로 능화문(菱花紋), 만자문(卍字紋), 뇌운문(雷雲紋) 등 기하학적인 문양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형태가 보통이며, 소재 문양은 단연 화조, 사군자를 위시한 동식물 문양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퇴계 이황의 글을 모아 펴낸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의 표지 문양은 구름을 바탕 문양으로, 다양한 형상의 학과 연꽃을 소재 문양으로 구성되었다. 소재 문양은 퇴계의 행의(行 誼)와 성정(性情)을 기리려는 의도에서 꽃 중의 군자로 불리는 연꽃과 문사의 고고한 자태를 닮은 학을 선택한 듯하다. 그러나 매화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황의 생전 행적을 떠올렸다면 연꽃이나 학보다는 매화 문양이 훨씬 적절하였을 것이다. 이로 보아 책의 표지 문양은 저자의 생애나 책의 내용을 고려하기보다는 책 자체의 외형적인 장엄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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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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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문집인 『기언(記言)』의 표지 장식도 대동소이하다. ‘회(回)’ 자 형태를 연접시킨 회문(回紋)을 바탕 문양으로, 도안화된 연꽃, 모란, 여러 보배(雜寶)를 소재 문양으로 배치하였다. 길상적 의미를 지닌 전형적인 소재인 모란이나 보배는 위의 예와 마찬가지로, 허목의 학문과 완고한 성정을 담아내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이 역시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두기는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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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렬매죽문판
빙렬매죽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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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현존하는 능화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빙렬매죽문판(氷裂梅竹紋板)과 같이 매화와 대나무만을 소재 문양으로 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능화판은 대부분 길상적 소재를 훨씬 많이 사용하였다. 복(福)과 부귀(富貴)를 상징하는 박쥐(蝙蝠)와 모란을 주재(主材)로 하는 박쥐모란문판(蝙蝠牧丹紋板)이나 이하응이 제작하였다고 전하는 만자모란석류문판(卍字牧丹石榴紋板) 등이 대표적 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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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자목단석류문판
만자목단석류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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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책 표지의 문양은 소재의 상징적 의미보다는 자체의 조형적 미감에 무게가 실려 있다. 서화에 비해 양식적인 보수성이 강한 공예의 일반적인 양상이 반영된 부분으로 책의 표지 문양 역시 공예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연꽃이나 ‘만(卍)’ 자 문양이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 책의 표지 문양으로 거부감 없이 애용되었던 사례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대부의 책 표지는 화려한 무늬로 된 비단으로 표장하던 중국의 그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창성을 지닌다. 이는 가능한 한 치장을 줄이고 치장을 하더라도, 화려함과 난만함보다는 검박함과 단아함을 추구하였던 조선 사대부의 미의식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한편, 시전지는 책의 표지와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양자 모두 화조나 사군자를 소재로 한 문양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책의 표지 문양은 사군자보다는 화조, 특히 길상이나 벽사의 의미를 담은 소재를 선호한 반면, 시전지의 장식 문양은 상대적으로 사군자 계통의 소재를 선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의 시전지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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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의 시고
최명길의 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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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연간에 영의정을 지냈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어떤 시의 운(韻)에 맞춰 지은 시를 쓴 시고(詩稿)가 대표적인 예이다. 죽간(竹簡)을 형상화한 16줄의 줄간과 줄의 테두리 밖 오른쪽에 굵은 방안선(方眼線)으로 구획된 공간에 한 줄기 매화를 새겨 넣었다. 곧게 뻗은 가지에 소담한 몇 송이 꽃을 베푼 매화의 생김새는 당시 크게 유행한 묵매화와 흡사한데, 맑고 깔끔한 필치의 글씨와 맞물려 시고의 운치와 품격을 한층 고양시키고 있다. 조선 중기에 단색 시전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수묵의 사군자화를 통해 담백하고 정제된 함축미를 표출하던 당시 사대부들의 미의식을 진솔하게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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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연의 설평기려제시(雪坪騎驢題詩)
이병연의 설평기려제시(雪坪騎驢題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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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군자가 새겨진 시전지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지만, 화훼를 소재로 꾸민 시전지도 종종 나타난다. 겸재 정선이 한강 주변의 경치를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장첩된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시가 적힌 시전지도 그중 하나이다. 이 시전 지의 문양은 대나무와 매화를 비롯하여 불수감(佛手柑), 모란 등을 소재로 하는데, 두세 가지 색이 어우러진 다색 판화로 묘사도 비교적 사실적이다. 도안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조선 중기 단색 판화의 시전지 문양과는 달리 회화미가 물씬 묻어난다. 사생을 중시하면서도 서정이 깃든 문예를 추구하던 당시의 문예 조류와 어울리는 시전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진경 문화를 이끌던 두 대가가 시와 그림으로 통교하던 감동적인 일화가 이 아름다운 시전지로 인해 더욱 찬연히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시전지와 그에 장식된 여러 문양은 여타의 공예품보다도 조선 사대부의 주관과 심의가 잘 드러나 있다. 사대부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녹아든 글의 운치와 멋을 배가시키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글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단장하였다. 또 다른 의미의 시서화 일치와 조화의 경지이다. 그래서 시전지의 문양으로 상용되던 화조나 사군자는 조선 사대부 문예의 지향은 물론, 그 현실적 소통까지 가능케 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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