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5장 고미술 취미의 탄생
  • 1. 고동 서화 취미의 발생
홍선표

‘취미’는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이나 그와 관련된 여가 활동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근대적 문화 향유의 장에서 정립된 것이다.299)천정환·이용남, 「근대적 대중 문화의 발전과 취미」, 『민족 문학사 연구』 30, 민족 문학사 연구소, 2006, 227∼265쪽 참조. 근대기에 있어서 취미는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일부로서, 새로운 지식 및 교양과 문화 실천의 한 형식으로 권장되고 관리되었다. 특히, 근대 국가는 ‘백성’을 주체적이고 균질적인 ‘국민’으로 계몽하고 개조하기 위하여 학교 교육과 함께 취미를 통해 건전한 대중 지성 및 감성의 구축과 고상한 대중문화를 조성시키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취미’가 사회화되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의 애국 계몽기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그 발생은 근대기 이전이었으며, 서구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지배층 혹은 상류층의 취향에서 비롯되었다. 그중에서도 고동 서화(古董書畵) 수집 및 감상과 결부된 고미술에 대한 취미는 고려 말기에 발생하여 조선 초부터 사대부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대두하였으며, 중국과 유럽에서의 유행과 거의 같은 시기인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애호벽(愛好癖)과 수집벽(蒐集癖)을 지닌 열성 취미인들의 활동과 함께 중서층(中庶層)으로 확산되면서 열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감평(鑑評)에 관한 안목과 지 식을 지닌 ‘상감가(賞鑑家, 감상가)’들이 등장하여 금석 고증학(金石考證學)과 결부된 고물학(古物學)을 태동시키고 고고 미술 사학을 싹트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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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현도(群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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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 서화 취미는 문사들이 서재나 정원에서 맑고 고상하게 즐기는 문방(文房)과 원림(園林) 혹은 산림(山林)에서의 한적한 여가 생활의 일환으로 형성된 것이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악기를 연주하고, 화초를 가꾸는 등의 취미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명산과 절경을 두루 여행하며 관상하는 ‘유상(遊賞)’ 풍조와도 결부되어 전개되는 등, 문사들의 청아하고 풍류적인 생활과 ‘상심(賞心)’ 및 ‘상회(賞會)’ 취향 전반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향유되었다. 따라서 고동 서화는 서책을 포함한 문사의 서재 문화와 수집하여 감상하는 풍조 전체를 분리해서 볼 수 없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사의 취미 대상물로서의 고동 서화는 고미술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취미가 발생되고 확산된 현상은 미술의 소비와 수용이란 미술사의 사회·문화사적 측면에서 관심을 끈다. 특히, 예술과 생활 사이에서 고미술에 대한 취미의 탄생과 형성은 문사들의 의식 세계와 문화의 활동 영역으로 확 고해지면서 이에 대한 판단력의 함양과 미술사적 지식의 집적 및 체계화가 시작되는 등, 창작과 수용의 지각 방식과 양식의 변동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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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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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 서화’는 골동품을 뜻하는 ‘고동(古董)’과 글씨 및 그림을 의미하는 ‘서화’를 함께 묶어 쓴 것으로, 중국에서 통칭하던 ‘고기 서화(古器書畵)’를 조선식으로 표기한 용어라고 생각된다.300)박지원(1737∼1805)이 필세설(筆洗說)에서 ‘서화 고동’이라 쓰기도 하였지만, 박제가(1750∼1805)가 『북학의(北學議)』(1778)에서 항목의 표제어로 사용한 것이나, 남공철(1760∼1840)이 문체 반정(文體反正)의 빌미를 제공하였던 1792년에 쓴 책문(策文)의 용례와 그의 ‘고동 서화각’이란 서재 이름 등으로 보아 ‘고동 서화’를 주로 쓴 것 같다.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에 수록된 중국 문헌에는 ‘고동 서화’의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고동’은 옛 그릇을 뜻하는 ‘홀동(匢董)’의 방언 혹은 와전어로 알려진 ‘골동(骨董)’의 속어로, 명대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01)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1, 경전류2, 자서(字書) ‘匢董’에서, 청대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을 인용하여 옛 그릇인 골동(骨董)은 匢董으로 써야 한다고 하면서, 골동은 홀동의 방언인데, 혹자는 소동파의 골동갱(骨董羹)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동파의 골동이란 말이 어디에 근원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양장거(梁章鉅)의 『칭위록(稱謂錄)』 상매(商賣) 골동(骨董)조의 “明人說部……骨董俗作古董非”를 참고한 듯, ‘古董’도 잘못 쓴 것이라 하였다. 명나라의 장훤(張萱)은 『사변록집요(思辨錄輯要)』 권5, 의요(疑耀)에서 “골동은 방언이고 고동(古董)은 요즈음 사람이 지었는데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였고, 방이지(方以智)는 『통아(通雅)』 권33, 기용(器用)에서 “골동은 홀동이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고동’은 옛 청동기인 ‘고동(古銅)’의 좁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주로 ‘고기’와 ‘고물’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었다.

이러한 고동 서화는 “고기 서화의 감별에 관하여 논의한” 최초의 서적인 남송대 조희곡(趙希鵠)의 『동천청록(洞天淸錄)』(1240년경)에 수록되어 있는,302)『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 자부(子部)10, 잡가류(雜家類)4, 동천청록제요(洞天淸錄提要) 참조. 옛 거문고인 고금(古琴), 옛 벼루인 고연(古硯), 청동 기물인 고종정이기(古鐘鼎彛器)를 비롯하여 원림에 놓고 즐기는 괴석(怪石), 문구류인 연병(硯屛)·필격(筆格)·수적(水滴), 서화와 금석류인 고한묵 진적(古翰墨眞迹)·고금 석각(古今石刻)·고금 지화 인색(古今紙花印色)·고화(古畵)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명나라 때 조소(曹昭)의 『격고요론(格古要論)』과 장응문(張應文)의 『청비장(淸秘藏)』 등에서 기와 자기류인 요기(窯器), 옥기(玉器), 칠기(漆器), 인장(印章), 옛 거울, 칼 등을 포함시켜 종류가 늘어났으나, 대부분 여가적 문예 활동에 소용되거나 서재에 두고 보는 오래된 공예품과 서화류였다.

고동 서화류에서 먼저 수집과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글씨와 그림이었다. 당나라 장언원(張彦遠, 815∼875)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의하면, 후한의 명제(57∼75)에 의해 시작되어 위진남북조시대에 동진의 안제를 폐위시키고 황위에 오른 환현(桓玄)과 남제의 고제(高帝)처럼 수집과 감상벽을 지닌 황제가 등장하였고, 당나라 때에 이르러 종친과 귀족 관리들 사이로 확산되었다고 한다.303)장언원(張彦遠),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권1, 「서화지흥폐(叙畵之興廢)」 참조. 그리고 정관(627∼649)과 개원 연간(713∼741)에는 서화를 애호하는 ‘사인(士人)’들도 진귀한 것을 구입하여 구름처럼 많이 모았다고 하였으며, 높은 감식안을 지니고 ‘축취가(蓄聚家)’로 호칭되던 수장가로 두찬(竇瓚), 반리신(潘履愼), 채희적(蔡希寂), 소우(蕭祐), 한유(韓愈) 등을 꼽았다.304)장언원, 『역대명화기』 권2, 「논감식수장구구열완(論鑑識收藏購求閱玩)」 참조. 4대에 걸친 대수장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장언원은 수집을 하면서 감별과 감상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호사가(好事家)’의 결점으로 지적하는 등, 서화의 감식과 수장, 구매, 완상 및 보존에 대한 논의를 최초로 언설화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8세기 전후의 귀족 문사의 수장품과 감상물로 대두된 글씨와 그림이 벼루, 붓, 먹 등의 문구류와 함께 문방의 청완물(淸婉物)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후반 남당의 후주(後主) 때부터였다. 그리고 북송대를 통하여 사대부들의 문구와 서화류에 대한 ‘명품’ 소유 욕구가 커지면서 서재의 애장품으로 수집과 완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생을 즐겁게’ 하는 기호물이 되었다.305)塘耕次, 「收藏家としての米芾」, 『米芾-宋代マルチタレヲトの實像』, 大修館書店, 1999, 60∼104쪽 ; 宇野雪村, 「文房淸供」, 『文房古玩事典』, 柏書房, 1993, 2∼6쪽 ; 荒川正明, 「中國の文人趣味と文房具-明窓靜几の愉しみ」, 小松大秀, 『日本の美術』 424-文房具, 至文堂, 2001, 89∼90쪽 ; 靑木正兒, 「文房趣味」, 『琴棋書畵』, 平凡社, 1990, 32∼43쪽 참조.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인 서화가 미불(米芾), 소식(蘇軾), 왕선(王詵), 황정견(黃庭堅) 등은 수장가와 감평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특히, 미불은 수장가를 이원화하여, 아는 것이 많고 안목이 높으며 마음으로 이해하는 ‘상감가’와 안목 없이 재력에 의지하여 축재하듯이 모으는 ‘호사가’로 구분하고, 자신의 식견 없이 귀에 의존하는 후자의 수집 태도를 비판하였다.306)塘耕次, 앞의 책, 94쪽 참조

한편, 북송대에는 새로운 통치 계층으로 등장한 신흥 사대부들이 유학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재현삼대(再現三代)’의 복고 계승 풍조를 일으켰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상징물인 옛 제기(祭器) 혹은 예기류(禮器類)를 비롯한 고동기를 수집하고 감평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307)陳芳梅, 「追三代於鼎彛之間-宋代從‘考古’到‘玩古’的轉變」, 『古宮學術季刊』 23-1, 2005 : 金立言 譯, 「追三代於鼎彛之間-宋代の‘考古’から‘玩古’への展開について」, 『美術硏究』 391, 2007, 3, 157∼196쪽 참조. 이에 따라 각종 기물의 고동기 방작(倣作) 풍조를 초래하면서 문 방 서화 취미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북송대의 고동기 수집 경향에는 도교적이고 기복적인 취향도 일부 작용하였지만, 삼대의 의상(意象)을 재생하고 유풍(遺風)을 추구하려 한 사대부의 유자적(儒者的) 가치관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대 경전(經典)의 원문과 고문을 중시하는 조류와 밀착되어 주로 언술되었으며, 금은보화와 성색(聲色)을 애완하는 것처럼 눈과 귀로만 즐기는 것과는 엄격하게 구별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강조하였다.308)陳芳梅, 앞의 글 참조. 유창(劉敞), 이공린(李公麟), 소식, 문언박(文彦博)을 비롯한 북송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고동기를 식별하고 수장하고 연구하여 후세로 전승하려는 풍조를 진작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북송의 사대부 사이에서 발생된 유자적 고동기 취향은 박고(博古)와 호고(好古) 의식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수집열을 촉발시켰으며, 남송대에 이르러 문구·서화류와 함께 ‘명창정궤(明窓靜几)’, 즉 밝고 깨끗한 탈속·한정의 거처인 문방의 청완물로 각광받게 되었다.309)陳芳梅, 앞의 글 참조. 고동기는 삼대의 유풍이란 상징적 의미를 지니면서 한적하고 고상한 여가 생활의 기호품인 문구·서화류와 함께 ‘고기서화지속(古器書畵之屬)’으로 병칭되며 범주화되기 시작하였다.310)서몽화(徐夢華),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권208, 소흥 12년 6월 11일 임신(紹興十二年六月十一日壬申)(1141). 이 시기 문사들은 이를 좌우에 두고 완상하면서 심성을 수양하려 하였으며, 고결하고 질박한 성정과 부합되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였다. 고기 서화류를 종합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인 조희곡의 『동천청록』이 나온 것도 이러한 풍조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천청록』의 서문에도 함축되어 있듯이, 고기 서화는 외물(外物)에 뜻을 두는 유의(留意)가 아닌 호고(好古)와 진외(塵外)의 뜻을 기탁하는 우의적(寓意的)인 청완물로 애호하고 청복(淸福)을 추구함으로써, 이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이 문사의 고상하고 탈속적인 취미로 확립되기에 이른다.311)조희곡(趙希鵠), 『동천청록(洞天淸錄)』 서(序). 산수, 화훼 등의 자연물을 유상(遊賞) 혹은 관상하는 기존 풍조와 함께 오래되고 뛰어난 인공물을 완상하는 것이 문사들의 애호와 감상의 대상으로 병행되어 여가 생활에서의 습속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남송대를 통하여 ‘문방청완’과 ‘연한청상(燕閒淸賞)’의 취미로 형성된 고기 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풍조는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경제적 호황 등을 기반으로 관료와 문인 사회 전반은 물론, 상인 등의 여러 계층으로 널리 퍼졌고, 지역적으로도 광범위하게 파급되어 전국 각지에서 크게 성행하였다.312)Chu_tsing Li and James C.Y. Watt, The Chinese Scholar’s Studio: Artistic Life the Late Ming Period, New York: The Asia Society Galleries, 1987 ; 楊新, 「明人圖繪的好古之風與古物市場」, 『文物』 1997年 4期, 文物社, 53∼61쪽 참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출판 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관련 서적들이 다투어 출간되었고, 이일화(李日華)의 『육연재필기(六硏齋筆記)』를 비롯한 여러 서책에서 ‘고기 서화’, ‘고기 법서 명화(古器法書名畵)’, ‘고물 서화(古物書畵)’, ‘고동기 서화(古銅器書畵)’ 등이 관용어로서 숙어처럼 사용되었으며, 만명소품(晩明小品)의 제재로도 애용되었다. 수요가 급증하자 미술 시장의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졌고 위조품이 범람하였는가 하면, 문진형(文震亨)이 『장물지(長物志)』(1615∼1620년경)에서 우려하였듯이 ‘아속막변(雅俗莫辯)’, 즉 고아한 감상과 통속적인 호사 취미를 구별하지 않고, 사치 풍조에 편승하여 유행 따라 축적에 몰두하는 과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공안파(公安派) 소품가인 원굉도(袁宏道, 1568∼1610)와 같은 새로운 성향의 지식인은 이러한 문방 취미에 탈속적이고 고결한 기운을 기탁하여 미친 듯이 몰입한 육우(陸羽)와 미불, 예찬(倪瓚) 등을 높이 평가하면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에 죽고 살기로 깊이 빠져 즐긴다면 재물의 노예와 벼슬아치가 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여, 취미도 목숨 바쳐 온 힘을 다해 광적으로 몰두하고 탐닉해야 정말 애호하는 것이라 하였다.313)원굉도(袁宏道), 『원중랑집(袁中郞集)』 권24, 「병사 병인-호사(甁史幷引-好事)」 : 심경호 외 역주, 『역주 원중랑집』 5, 소명출판, 2004, 400∼401쪽 참조. 고동 서화 취미의 광범위한 양적 확산과 함께, 취미라는 문화적 능력과 취향을 벼슬이나 재물보다 더 집착하고 생명처럼 애호하며, 최선을 다해 적극적이고 순수하게 향유할 것을 강조하는 인식상의 변화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북송대에 형성되고 남송대를 통해 사대부의 한적한 여가 생활의 습속으로 확립된 문방청완의 고동 서화 취미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로 여가적인 문인 화가가 출현하고 감상물 그림이 대두되는 고려 중기 무렵으로 생각된다.314)홍선표, 「고려시대의 일반 회화」, 『한국 미술사』, 예술원, 1984 ;홍선표, 「고려시대 전기의 서화」, 『한국사』 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참조. 서화 감식과 수장 가로는 고구려 출신으로 짐작되는 발해 사람인 복선사(福先寺)의 승려 졸(脺)과 동관위(同官衛) 고지(高至)가 『역대명화기』에 이름을 남기고 있지만,315)장언원, 『역대명화기』 권2, 「논감식수장구구열완」 참조. 문방 취향으로서의 고동 서화 취미는 1123년(인종 1)에 북송 사절단의 제할관(提轄官)으로 개성에 온 문인 서화가 서긍(徐兢)이 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긍은 휘종 연간(1100∼1125)에 전서(篆書) 등에 뛰어났던 서학박사로, 고동기를 고찰하여 금석문을 터득하였고, 산수 인물화에서도 신품(神品)으로 평가받은 인물이다.316)『강남통지(江南通志)』 권171, 인물지(人物志), 예술(藝術) 2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40에 수록된 행장(行狀) 참조. 서긍(徐兢)은 북송대 최고의 서화 감평가이며 수장가이고, 문방청완 애호자였던 미불의 아들인 미우인(米友人, 1074∼1151)과 서학박사로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미우인은 궁정의 미술품을 감정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제거조치서예소(提擧措置書藝所)에서 서긍과 함께 일하기도 하였다. 서긍 등이 김부식을 비롯한 접반관(接伴官)들을 숙소로 초빙하여 중국에서 가지고 온 옛 기물, 법서, 명화, 색다른 냄새가 나는 향, 진기한 차를 좌석에 늘어놓자 참석한 이들이 진귀하고 정채로움에 모두 감탄하므로 좋아하는 것에 따라 원하는 대로 집어 주었다고 한다.317)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6, 연례(宴禮) 관회(館會). 고려의 문사들이 분향 음다(焚香飮茶)와 고동 서화의 문방청완 취향을 접하고 찬탄한 최초의 사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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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풍류(布衣風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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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년(의종 16)에는 왕이 태평정을 지으면서 유명한 화초와 색다른 과 수를 심고 ‘기려진완지물(奇麗珍玩之物)’을 좌우에 진열하는 등 뛰어나게 아름답고 진귀한 기물을 완상하는 취향을 보인 바 있으나,318)『고려사』 권18, 세가(世家)18, 의종 16년. 문사들의 문방 취미는 무신 집권기에 이르러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는 그림이 사대부의 취향과 밀착되어 중세적인 감상물로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때로, 최초의 서화 감평가로 이름을 남긴 이규보(李奎報, 1168∼1241)와 ‘천만축(千萬軸)’으로 표현될 정도로 많은 양의 작품을 모은 수장가 이담지(李湛之, 1190년 전후 활동)가 나오기도 하였다.319)홍선표, 「이규보의 회화관」, 『미술 자료』 39, 국립 중앙 박물관, 1987.6, 28∼45쪽 ; 홍선표, 「고려시대 일반 회화의 발전」,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138∼139쪽 참조. 임춘(林椿, ?∼1174)은 평생 서예를 좋아하여 몸이 힘들거나 집이 가난하게 되는 것도 걱정하지 않고 천금을 뿌려서라도 모은다고 하였다.320)임춘(林椿), 『서하집(西河集)』 권3, 「기미수구초서(寄眉叟求草書)」. 이러한 취향은 이 무렵 새로운 문예 공간으로 등장한 문방을 중심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문방을 서재(書齋), 서실(書室), 서옥(書屋)이라고도 불렀다. 평장사 등을 지낸 김인경(金仁鏡, ?∼ 1235)이 증정 받은 전나무 그림 병풍을 서헌(書軒)에 두고 기쁨에 잠 못 이룬 채 한없이 감상한 마음을 시로 읊은 것이라든지, 문방에서는 천하의 명품인 등나무 종이에 쓴 글씨를 천금보다 귀하게 여긴다고 한 이규보의 언술 등은 좋은 예라 하겠다.321)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16, 「차운김승제인경사규선사승귀일상인소화노회병풍 2수(次韻金承制仁鏡謝規禪師僧歸一上人所畵老檜屛風二首)」 및 권 15, 「복화(復和)」.

이 시기를 통해 성현들이 사용하였던 옛 기물을 보배롭고 신성한 물건으로 예찬하는 가치관이 싹트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이규보는 이러한 가치를 발견한 안목에 대해 성스럽다고까지 평하였으며, 북송의 미불이 분류한 ‘상감가’처럼 손에 맡겨 어루만지며 마음으로 본다고 하였다.322)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8, 「제통사고적(題通師古笛)」. 금석문 수집과 연구의 효시를 이룬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을 읽은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북송대 사대부의 박고(博古), 고고(考古), 방고(倣古) 등의 호고 의식 형성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던 구양수와 같은 관점에서 고문(古文) 부흥과도 관련 있는 석고가(石鼓歌)를 지었다.323)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閑集)』 권하, 이일(二一) 참조. 이인로는 이 글에서 “공자가 신던 나막신도 전하여 만세의 진귀한 것이 된다.”고 하여, 고동기를 비롯한 옛 기물에 대한 북송대의 삼대 유풍 추존 풍조를 반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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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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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에는 남송대에 확립되었던 ‘고기 서화’의 취미에 대한 내용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문신 홍자번(1237∼1306)의 아들인 봉익 대부 홍순(洪順)과 상서 이순(李淳)이 내기 바둑을 두며 걸었던 물건들이 ‘골동 서화’라고 하였으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세전지물(世傳之物)’이기도 한 옛 거문고를 비롯한 ‘서화골동배(書畵骨董輩)’를 이순이 바둑에 져서 빼앗긴 후 다시 되찾은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324)이제현(李齊賢), 『역옹패설(櫟翁稗說)』 전집(前集). 이 시기의 문방청완가이며 수장가로는 문신으로 명망이 높던 이거인(李居仁, ?∼1402)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즐기고 숭상하는 것이 세속 사람과 달라 집을 다스리는 데는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으나, 서화와 금기(琴碁)를 모아 쌓았고, 매화·난초·대나무와 사슴·학을 길렀으며, 한 가지 물건이라도 갖추지 못한 것이 있으면 불만스럽게 여기어 반드시 구해 놓은 뒤에야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325)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권22, 「서난파선생시권후(書蘭坡先生詩卷後)」. 치악산에 은거하였던 원천석(元天錫, 1330∼ ?)은 고정(古鼎)을 비롯하여 옛 거울, 칼, 거문고 등을 수장하고 있었던 듯, 문을 닫고 이들 옛 기물을 보며 때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는 마음을 담아 읊기도 하였다.326)원천석(元天錫), 『운곡행록(耘谷行錄)』 권5, 「두문람고 우물흥회 차불우시자지소위야(杜門覽古寓物興懷此不遇時者之所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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