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5장 고미술 취미의 탄생
  • 2. 조선 초·중기 고동 서화 취미의 확산
  • 조선 초기
홍선표

고려 후기에 발생된 고동 서화 취미는 조선 초기 태조로부터 명종 연간(1534∼1567)에 이르기까지 호고 및 박고 의식과 문방청완 및 한적 취향이 사대부들 사이로 점차 확산되면서 습속화(習俗化)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성석린(成石璘, 1338∼1423)과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을 비롯한 사대부들은 고동기를 향로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를 이룬 듯하며, 뇌물로도 주고받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327)성석린(成石璘), 『독곡집(獨谷集)』 권하, 「차박쌍계운(次朴雙溪韻)」 ; 서거정(徐居正), 『사가집(四佳集)』 권30, 「우제(遇題)」및 권50, 「야영(夜詠)」. 집현전 출신으로 안평 대군의 막료였던 이현로(李賢老, ?∼ 1453)는 ‘고동 향로’를 뇌물로 받고 인사 청탁을 들어준 죄로 유배된 바 있다(『세종실록』 권124, 세종 31년 4월 경술(1일), 계해(14일), 5월 갑자(15일) 참조). 안평 대군(安平大君) 못지않게 많은 글씨와 그림을 모았던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의 아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문인 서화가였던 그의 형 강희안(姜希顔, 1417∼1464)에게 자신의 문방을 탈속의 은거처로 꾸밀 신묘한 그림을 청탁하였는데,328)강희맹(姜希孟), 『사숙재집(私淑齋集)』 권4, 「작소장자가 구인재묘필(作小障子歌救仁齋妙筆)」. 이를 통해서도 당시에 서화를 문방의 청완물로 여기는 인식이 심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성현(成俔, 1439∼1504) 등의 사대부들은 연적(硯滴), 연갑(硯匣) 등의 명품 문구류를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구입하여 ‘청창정궤(晴窓靜几)’ 문방의 보배로 완상하였는가 하면, 벼루의 경우 단계연(端溪硯), 용미연(龍尾硯), 봉주연(鳳咮硯) 같은 천금을 주고도 손에 넣기 어려운 천하의 신 묘한 물품을 구하여 다투어 자랑거리로 삼았다.329)성현(成俔),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백우연적명(白牛硯滴銘)」 및 권10, 「과자석산하(過紫石山下)」. 또한, 우리나라 선천에서 나는 붉은색 돌로 만든 ‘자석연(紫石硯)’도 중국의 명품 못지않은 ‘동방의 귀물’로 여겼고, 서울에 있는 많은 집의 문방에서 보배 구슬처럼 간직하며 애호한다고 하였다.330)김종직(金宗直), 『점필재집(菟畢齋集)』 권1, 「사악신자의주래이선천석연장증겸선 겸선여탈득지시 이사겸선(士讍新自義州來以宣川石硯將贈兼善兼善予奪得之詩以射兼善)」 ; 성현, 『허백당집』 권12, 「백우연적명」 및 권10, 「과자석산하」 ; 박상(朴祥), 『눌재집(訥齋集)』 권3, 「선천자석연가(宣川紫石硯歌)」 참조. 신라시대 김생(金生, 711∼?)의 필적도 안평 대군이 모아 ‘고첩(古帖)’에 수록하였는데, 중종 연간에는 김생이 쓴 백월루운탑비문(白月樓雲塔碑文)의 탑본(榻本)이 널리 퍼져 상류층 호사가들이 앞을 다투어 완상하기도 하였다.331)김생(金生)의 금석문이 애호 풍조를 이룬 사실은 봉화군의 폐사에 방치되어 있던 백월루운탑비(白月樓雲塔碑)를 보존하기 위해 영천군 자민루(字民樓) 아래로 이전 한 군수 이항(李沆)이 1509년에 써서 새긴 소지(小誌)에 적혀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남구만(南九萬)이 직접 탐방하여 쓴 영남잡록(嶺南雜錄)(『약천집(藥泉集)』 권29)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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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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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손자인 부림군 이식(李湜, 1458∼1488)은 위아래가 다 떨어진 원나라 순제 때의 시문 묵적(墨迹)을 ‘고물’로 여겨 보배처럼 간직하고 문사들의 시를 덧붙여 문방의 청완물로 삼는 등, 평생 동안 호고 취향이 고질병처럼 되어 ‘벽(癖)’을 이루었다고 한다.332)이승소(李承召), 『삼탄집(三灘集)』 권9, 「부림군득대원제학사만인갱시 수미구탈 유장황성축 이위고물이진장지 차구시사림간 이자문방지완(富林君得大元諸學士萬人坑詩首尾俱脫猶粧潢成軸以爲古物而珍藏之且求詩士林間以資文房之玩)」.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1489년(성종 20)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에 갔을 때, 하왕(河旺)이란 사람이 소장한 고화 14폭을 옷을 벗어 주고 구입해 오기도 하였다.333)김일손(金馹孫), 『탁영집(濯纓集)』 권1, 「서화병(書畵屛)」 참조. 중종의 부마 였던 한경우(韓景祐)는 서화를 수집해 모으는 것을 매우 즐겼고, 뛰어난 품종의 화초 심기를 좋아하여 부인인 정신 옹주가 재화를 아끼지 않고 사 주었으며, 세조 때의 총신 한명회(韓明澮)의 손자인 한경기(韓景琦, 1472∼1529)와 성균관 사성 등을 지낸 문경동(文敬仝, 1457∼1521)도 ‘명창정궤’ 문방의 청완물과 화초를 즐겼다고 전한다.334)정사용(鄭士龍), 『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정신옹주묘비명(靜愼翁主墓碑銘)」 ; 홍유손(洪裕孫), 『소총유고(篠叢遺稿)』 권하, 「동고팔영(東皐八詠)」 ; 이황(李滉), 『퇴계집(退溪集)』 권46, 「통훈대부행성균관사성문공묘갈명(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文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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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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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동 서화 취미가 조선 초기에 사대부 사회에서 습속을 이루었던 것은 연집(宴集)이나 아회(雅會)를 즐겼던 계층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은 고관직의 ‘진신(縉紳)’ 중에서도 부유하고 세력 있는 ‘호부자(豪富者)’와 풍류적인 ‘청한자(淸閒者)’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335)성현, 『허백당집』 권8, 「여회가연집시서(如晦家宴集詩序)」 참조. 이들의 향유는 완물에 지나치게 탐닉하여 몰두함으로써 본분을 등한시하여 뜻을 잃고 해치게 될까봐 경계하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관점에서 경륜지가(經綸之暇), 즉 여가나 퇴거 시의 한가한 때에 주로 즐겼다.336)조선 초기 사대부들의 ‘완물상지(玩物喪志)’에 대해서는 홍선표, 「조선 초기의 회화관」, 『제3회 국제 학술 회의 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599쪽과 앞의 책, 194∼198쪽 참조. 즐기는 것도 구양수와 소식을 비롯한 송대 사대부들처럼 유자와 문사적 취향이 결합된 문방청완의 호고적이고 박아적인, 다시 말해 보유적(補儒的)이고 수기적(修己的)인 차원에서 자오(自娛)하는 것이었다. 성현이 채녀도(綵女圖)를 걸어 놓고 감상하는 것에 대해 ‘문방지완(文房之翫)’으로 맞지 않다는 주변의 비판을 받자, 성색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불행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술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 사례라 하겠다.337)성현, 『허백당집』 권9, 「제여인도후(題麗人圖後)」 참조. 이의무(李宜茂, 1449∼1507)와 임억령(林億齡, ?∼1568)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고동경(古銅鏡)과 고정(古鼎) 등의 옛 기물을 수기의 차원에서 뜻을 기탁하여 그 가치를 읊은 바 있다.338)이의무(李宜茂), 『연헌잡고(蓮軒雜稿)』 권2, 「백련경(百鍊鏡)」 ; 임억령(林億齡), 『석천집(石川集)』 권2, 「고기가(古器歌)」 참조. 그리고 정사룡(鄭 士龍, 1491∼1570)이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 기석 등의 육군자(六君子)와 문방사우를 합하여 십완(十玩)을 애호한 것에 대해 김안로(金安老, 1481∼1537)는 우물지락(寓物之樂)이라며 뜻을 취하여 즐긴 것이라 하였다.339)김안로(金安老), 『희락당문고(希樂堂文稿)』 권2, 「십완당(十玩堂)」.

중종 연간(1488∼1544)에 이르러서는 성현의 아들이자 김굉필의 제자로, 서화와 음률에 능하였던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이 궁궐에 수장되어 있거나 왕실에서 가지고 있던 서화를 감별하는 등 감식안을 지닌 구안자(具眼者)로 활동하였는가 하면, 성세창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던 김안로는 고화(古畵)를 모으는 사람들을 위해 참고 자료로 고개지(顧愷之) 이래 역대 명화가 90명의 특장 분야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기술하기도 하였다.340)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성종조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중종실록』 권92, 중종 35년 10월 경오(12일) 및 갑술(16일) ; 김안로, 『희락당문고』 권8,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고래화자(古來畵者)’ ‘고금명화성씨(古今名畵姓氏)’ 참조. 특히, 김안로는 지금 전하는 고화 가운데 진품과 가짜인 안작(贋作), 모본 등이 섞여 있어 구안자와 가려내야 한다고 하는 등341)김안로, 『희락당문고』 권8, 「용천담적기」. 수집과 감상에 있어서 진위를 판별하는 안목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개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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