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5장 고미술 취미의 탄생
  • 2. 조선 초·중기 고동 서화 취미의 확산
  • 조선 중기,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홍선표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입은 엄청난 피해와 명나라의 붕괴라는 커다란 충격에도 불구하고, 명대 말기의 탈속 심미적인 문인 문화의 광범위한 확산 풍조와 폭발적인 유행의 열기가 파급되면서 새로운 문예 환경이 조성되었고, 아울러 고동 서화 취미의 확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342)만명기 문인 문화 풍조의 파급에 따른 선조조 이래 서화 애호 풍조의 형성과 확산에 대해서는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의 애호 풍조와 감평 활동」, 『미술사 논단』 5, 한국 미술 연구소, 1997과 앞의 책, 231∼254쪽 참조. 특히, 사장적(詞章的)인 보유관(補儒觀)을 지닌 사대부상의 부상과 고문 부흥론에 따른 박고 및 호고 의식의 심화, 그리고 전란과 당쟁의 혼란한 세속사에서 벗어나 탈속과 한적의 상태에서 자아를 닦고 기르며 즐기는 풍조의 대두로 문방청완의 고동 서화 취미가 한층 더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343)당시 문사들이 산림이나 원림에서 한적을 누리는 생활 양상에 대해서는 신흠(申欽), 『상촌집(象村集)』 권47, 「야언(野言)」 1 등에 자세하게 언술되어 있다.

조선 중기 선조 연간(1567∼1608)에는 명나라의 의고적(擬古的)인 문풍 수용을 선도한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고동기·고화·고묵적·고비 법첩·고금·고연·고요기·고칠기 등의 13부문이 수록된 조소의 『격고요론』과 같은 명나라의 대표적인 고동 서화 관련 서적을 참고하여 고증을 시도하였다.344)윤근수(尹根壽), 『월정집(月汀集)』 권5, 「안평연기(安平硯記)」. 또한, 연행(燕行)을 통해 수천 권의 서적을 구입하여 온 허균(許均, 1569∼1618)이 100종에 가까운 중국 역대 서적에서 은거와 한가하게 지낼 때의 취미 생활 등에 관한 기사를 모아 『한정록(閑情錄)』을 찬술하는 등, 한층 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수용이 이루어졌다. 특히, 『한정록』은 ‘문방청완’과 ‘연한청상’의 일환으로 발생하여 확산된 고동 서화의 수장과 감상 등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집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적으로, 이에 대한 애호 풍조와 취미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의의를 지닌다.345)홍선표, 앞의 책, 234쪽과 신영주, 「양란 이후 문예 취미의 분화와 그 전개 양상」, 『동방 한문학』 31, 동방 한문학회, 2007, 347∼353쪽 참조. 게다가 후대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사대부 생활 백과전서(百科全書)의 시원이라는 의미도 있다.346)한영규, 「조선 후기 청언소품의 특징」, 『고전 문학 연구』 21, 고전 문학 연구회, 2002 참조.

이 책에는 고동 서화 감평서의 효시인 조희곡의 『동천청록』 서문과 거의 같은 내용을 송대 임홍(林洪)의 『산가청사(山家淸事)』에서 옮겨 쓴 것이 있으며, 고매하고 뛰어난 문사들이 고동 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면서 한적을 즐기는 사례가 실려 있다. 또한, 고렴(高濂)의 『준생팔전(遵生八牋)』, 원굉도의 『병화사(甁花史)』,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서화금탕(書畵金湯)』 같은 명나라 말기의 고동 서화 관련서나 글의 내용 등이 일부 혹은 전부 실려 있다.347)허균(許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4책 소수(所收), 『한정록(閒情錄)』 권2∼14 참조. 조희곡의 『동천청록』 서문은 몇 글자가 바뀐 상태로 『산가청사』에 인용된 것이 『한정록』 권10, 「유사(幽事)」에 수록되어 있다. 『한정록』 권20에 수록된 서화 취미에 대한 금언을 적은 서화금탕에서는 기석과 고동기가 서로 가까이 있게 하는 것과, 상감가와 고증하는 것을 선취(善趣), 즉 좋은 취미로 꼽기도 하였다. 호고 의식이 남달랐던 허균은 이 집록을 통해 적성희구(適性戲具)인 고기 서화를 수장하고 감상하며 즐기는 것이 유완(幽玩), 아사(雅事)의 신묘하고 우아한 취미로서 근심을 잊고 속진을 떨어버리게 하여 그 경지가 정토(淨土)나 단구(丹丘) 같은 불국토나 신선 세계에 있는 듯하며, 신유희황(神遊羲皇), 즉 정신이 복희씨(伏羲氏)의 옛 세상에 노니는 것 같다고 하였다.

17세기 전반의 고동 서화 수집과 감상은 조위한(趙緯韓, 1558∼1649), 김 상용(金尙容, 1561∼1637), 권반(權盼, 1564∼?), 이정귀(李廷龜, 1564∼1635),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장유(張維, 1587∼1638),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박미(朴瀰, 1592∼1645), 박정(朴灯, 1596∼1632), 이명한(李明漢, 1595∼1645), 조속(趙涑, 1596∼1668) 등 서인계 문사 관료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348)홍선표, 앞의 책, 234∼235쪽 참조. 17세기 문사들의 회화 수집과 감상은 박효은, 「조선 후기 문인들의 회화 수집 활동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48∼110쪽과 황정연, 『조선시대 서화 수장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212∼234쪽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장유와 이명한은 고검(古劍)을 수장하고 있었는데, 칼의 금석음(金石音)을 상나라 노래 소리로 여기며 삼대의 유풍으로 향유하기도 하였다.349)장유(張維), 『계곡집(谿谷集)』 권26, 고검편(古劍編) 및 권29, 「화장생희직우후견시지임십삼운(和張生希稷雨後見示之任十三韻)」 ; 이명한(李明漢), 『백주집(白洲集)』 권10, 고검편(古劍編) 참조. 김상용은 명화와 고적을 좌우에 나열해 두고 보면서 서재 이름을 와유암이라 짓고 아취를 즐겼다고 한다.350)김상헌(金尙憲), 『청음집(淸陰集)』 권26, 「백씨의정부우의정선원선생신도비명(伯氏議政府右議政仙源先生神道碑銘)」. 이들은 대부분 명대의 고문 운동을 선구적으로 수행한 윤두수(尹斗壽, 1533∼1601)와 서화 감식에 뛰어났던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문인이었으며, 도학(道學)보다 사장 능력으로 입신한 문장가로, 비정치적인 풍류와 문예 모임 같은 취미 활동을 하는데 당색(黨色)을 초월하기도 하였다.351)이희중, 「조선 중기 서인계 ‘문장가’의 활동과 고문론의 전개」, 『한국사론』 35,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6, 88∼89쪽 ; 고영진,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침류대 학사(枕流臺學士)의 활동과 의의」, 『서울학 연구』 3,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1994, 137∼16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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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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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의 처사(處士)나 포의(布衣) 인사 중에서도 조위한과 교유한 성로(成輅, 1550∼1616)는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고질병으로 깊어졌는데 천금보다 더 귀한 보첩을 수장하고 있었으며, 김상헌의 친구인 윤경지(尹敬之)는 절묘한 명품이 포함된 고금의 명화를 다수 모은 바 있다.352)조위한(趙緯韓), 『현곡집(玄谷集)』 권9, 「기석전성중임로걸화(寄石田成重任輅乞畵)」 ; 김상헌, 『청음집』 권38, 「제윤세마경지소축고금명화후서(題尹洗馬敬之所蓄古今名畵後序)」. 고매한 선비로 일컬어진 진사 심종민(沈宗敏, 1554∼1618)은 옛 거문고를 모았는데, 임진왜란 때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명문이 있는 거문고를 잃어버렸다. 그의 아들이 오래된 기물을 구해 노수신의 명문을 다시 옮겨 적고 이영윤(李英胤, 1561∼1611)에게 부탁해 그림을 그려 넣어서, 부친의 뜻을 드러내 받들면서 ‘문방청완’의 하나로 삼기도 하였다.353)윤근수, 『월정집』 권4, 「제심지현고금 종민(題沈知縣古琴宗敏)」. 그리고 강릉 등지에서 고결하게 은 거하며 평생 관청에 가 본적이 없는 허균의 인척인 심장원(沈長源)은 낚시를 벗 삼으며 꽃과 대나무를 심어 놓고 그 사이를 거닐면서 매일 시를 짓고 고서화를 많이 수집하였는데, 누가 특이한 글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기만 하면 반드시 가서 구하거나 손수 베껴 적어 지루한 줄 몰랐다고 한다.354)허균, 『성소부부고』 권17, 「진사심형묘표(進士沈兄墓表)」.

또한, 김상헌은 서화 애호벽이 특히 지나쳤다는 평을 들었다. 최명길(崔鳴吉, 1586∼1547)은 김상헌의 그림 애호벽이 늙어서 더 심해졌다고 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김수증이나 김수항 같은) 김상헌의 손자들에게서 할아버지는 그림을 좋아하는 ‘벽’이 대단하셨고, 품격을 깊이 아셔서 모아 둔 것이 많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355)최명길(崔鳴吉), 『지천집(遲川集)』 권5, 「용전운정청음(用前韻呈淸陰)」 ; 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2, 「답이택지 병진십이월회일(答李擇之丙辰十二月晦日)」. 아버지 김극효(金克孝, 1542∼1618)의 서화 수장과 문방청완의 가풍을 계승한 김상헌은 맹목적으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집착하였던 고개지와 미불의 ‘치(癡)’와 ‘전(顚)’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어려서부터 그림 감상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 집에 명화가 있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곧장 달려가서 보기도 하고 빌려가기도 하였고, 부족함을 한탄하였을 정도로 취향이 지나쳤음을 토로한 바 있다.356)신흠, 『상촌집』 권25, 「동지돈녕부사김공묘지명(同知敦寧府事金公墓誌銘)」 ; 김상헌, 『청음집』 권38, 「제윤세마경지소축고금명화후서」.

그는 사람의 성정에는 좋아하는 바가 있어 벼슬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는 것을 비롯하여 가지각색이지만, 애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고상하고 속됨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예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속한 문사가 아님을 강조하였다.357)김상헌, 『청음집』 권38, 「제윤세마경지소축고금명화후서」. 서인계 문사였던 이득윤(李得胤)도 서예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어 수집하였는데 이러한 취미는 고인 정사(高人正士)들이 합치되었던 것으로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이득윤(李得胤), 『서계집(西溪集)』 권8, 「서청송서첩후(書聽松書帖後)」 참조). 그리고 옛날부터 시인들이 대부분 이러한 아취를 즐겼듯이, 사계절 중 한가한 날이면 향을 피우고 조용하게 서재에 앉아 책상을 치우고 그림을 펴서 보면 신묘함과 융합되고 그 뜻과 만나게 되는 세상 밖의 흥취를 느끼게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을 양성하고 답답한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해주는 ‘예원의 맑은 보배’라고 하여, 수신의 측면에서 효용성을 높이 평가하였다.358)김상헌, 『청음집』 권39, 「제윤세마경지음중팔선도(題尹洗馬敬之飮中八仙圖)」. 김상헌은 또한 경기도 양주에 있는 퇴거처인 ‘석실(石室)’에 ‘군옥소(群玉所)’를 마련하고, 비가 개이거나 해질 무렵이면 방을 깨끗이 치운 다음, 수장한 수십 매의 정교한 옥도장과 함께 박산향로(博山香爐)로 보이는 옛 기물을 좌우에 진열하고 어루만지는 등 진정한 ‘예원(藝苑)의 청완’이며 ‘문방의 비보(秘寶)’로 삼기도 하였다.359)김상헌, 『청음집』 권38, 「군옥소기(群玉所記)」.

애호벽을 지녔던 인물로는 조속도 손꼽혔다. 그는 학식이 넓고 우아하며 옛것을 좋아한 ‘박아기고(博雅嗜古)’의 문사이자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로서, 1630년대를 전후하여 최치원(崔致遠)과 김생을 비롯한 우리나라 명필 87명의 금석문을 상당량 모아 모두 4권의 『금석청완첩(金石淸玩帖)』을 선구적으로 만들어 놓고 완상하느라 종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360)허목(許穆), 『기언별집(記言別集)』 권10, 「제조진선속금석첩(題趙進善涑金石帖)」 ; 이선(李選), 『지호집(芝湖集)』 권6, 「창강유고발(滄江遺稿跋)」 참조. 그리고 일찍부터 습자벽(習字癖)이 있어 『기묘제현첩(己卯諸賢帖)』을 비롯해 명현들의 문장과 필적 등을 임서(臨書)하는 등 좋아하는 것이 독실하고 깊었다고 한다.361)송시열, 『송자대전』 권146, 「창강조장임기묘제현첩발(滄江趙丈臨己卯諸賢帖跋)」 참조.

이와 같이 애완물에 집착하고 몰두하는 ‘벽’에 대해 고화 감식안을 지니고 있던 최립(崔岦, 1539∼1612)은 맑은 마음을 지닌 현자만이 마음에 누를 끼침이 없이 즐길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사람들이 깊이 좋아하는 바가 있으니 이를 ‘벽’이라 한다고 하면서 군자가 지닐 만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없을 수도 없는 것으로, 책을 좋아한다거나 문장을 읊조리며 즐기는 것과 서화를 힘써 구해 많이 모으는 것 등은 고상한 취향이기에 ‘벽’이 되더라도 조금만 할 수 없다고 하였다.362)최립(崔岦), 『간이집(簡已集)』 권2, 「쌍취헌기(雙翠軒記)」 ; 이경석(李景奭), 『백헌집(白軒集)』 권32, 「창강조희온속금석청완후(題滄江趙希溫涑金石淸玩後)」. 정구(鄭逑, 1543∼1620)는 자신이 평소 잘 모르면서 애호하고 완상하였다고 하면서, 이는 맛을 모르는 맛인 무미지미(無味之味)이며 고질병이 아닌 고질병인 불벽지벽(不癖之癖)이라 하였고, 안목을 지닌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보면 그 유현한 정취와 신묘함을 알게 되어 마음이 상합(相合)된다고 토로한 바 있다.363)정구(鄭逑), 『한강집(寒岡集)』 권10, 「화연기(畵硯記)」. 하수일(河受一, 1553∼1612)도 주석으로 장식된 자주색 연갑에 들어 있는 소중한 옛 벼루를 책상머리에 두고 매일 보면서 서재에서의 유현한 탈속의 반려로 마음을 닦고 양생한다고 하였듯이,364)하수일(河受一), 『송정집(松亭集)』 권2, 「세가장고연(洗家藏古硯)」 참조. 문사들이 여가 생활에서 즐기는 문방청완의 취미가 일상적으로 습속화되고, 우의나 수기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기존의 구안자보다 좀 더 감식안을 갖춘 상감가 혹은 감상가로 호칭되는 감평가들이 등장한 것도 고동 서화의 수장과 애완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화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화본(畵本)의 감별에서 최고로 알려진 이항복을 비롯해, 그림 품평이 매우 정확하였다는 김상헌, 병중에서도 박정이 소장한 명종과 선조 때의 명화첩을 빌려 탐닉하고 상당히 전문적인 작가평을 남긴 신익성, 아버지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서화 수집과 감상 취미를 계승하면서 작가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평가를 통해 화평 방법의 새로운 진전을 보인 박미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365)박미(朴瀰), 『분서집(汾西集)』 권11, 「병자란후집구장병장기(丙子亂後集舊藏屛帳記)」 ; 송시열, 『송자대전』 권47, 「조맹부문희별자도발(趙孟頫文姬別子圖跋)」 ; 신익성(申翊聖), 『낙전당집(樂全堂集)』 권8, 「서박금주소장서화첩후(書朴錦洲所藏書畵帖後)」. 신익성은 1631년(인조 9) 금강산의 사찰들을 편람하면서 경관과 함께 절에 있는 ‘고기 법화’들을 감상하였는데, 마하연에서 먼지 속에 표장(表裝)도 안 된 채 방치되어 있는 지공 화상(指空和尙)의 초상으로 전하는 조사상을 발견하고 한눈에 뛰어난 솜씨임을 알아보았으며, 유물이 인멸되는 것을 걱정하여 서울로 가지고 와서 수리한 다음 돌려보낸 적도 있다.366)신익성, 『낙전당집』 권8, 「서지공화상축(書指空畵像軸)」. 또한, 그는 옛것을 지나치게 즐기는 ‘벽’이 있는 종친인 완남군 이후원(李厚源, 1598∼1660)과 한가한 때면 서로 방문하여 고금 서화를 평하곤 하였다.367)신익성, 『낙전당집』 권8, 「서경자실록세초첩후(書庚子實錄洗草帖後)」. 이후원은 탑본 도구를 들고 다니면서 비갈을 만나면 탑본을 하여 보물처럼 수장하였으며 이를 모아 4질에 달하는 『금석록』을 만들고 박미에게 발문을 청탁한 바 있다(박미, 『분서집』 권16, 「제이사심금석록후(題李士深金石錄後)」 참조). 이들은 16세기 전반의 고동 서화 취미와 애호 풍조를 주도한 서인계 문사 관료로 우리나라 최초의 감상가군(鑑賞家群)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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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물에 관해서도 감식과 고증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고 이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감상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김상헌은 박덕우(朴德雨)가 소장하고 있는 옛날 기와를 갈아 만든 벼루인 고와연(古瓦硯)에 대해, 감상가는 이를 동작대(銅雀臺)의 오래된 기와로 만든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368)김상헌, 『청음집』 권11, 「영박시랑덕우소축고와연 감상가혹칭동작구물(詠朴侍郞德雨所蓄古瓦硯鑑賞家或稱銅雀舊物)」. 여기서 감상가 는 김상헌 자신일 수도 있는데, 『연보(硯譜)』 등을 공부하여 위나라의 조조가 축조한 동작대의 기와로 동작연(銅雀硯)을 제작하였다는 유래를 알고 있고 이를 감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하는 금석고문이 드문 것을 한탄한 바 있는 윤근수는 안평 대군의 덕수 별장 옛터에서 밭을 갈다가 농부가 발견한 옛날 벼루를 보고, 색깔과 크기, 모양 등을 세밀하게 감정한 후, 『격고요론』의 연보(硯譜)를 상고하여 광동 조경부(廣東肇慶府)에서 나온 단계연임을 고증하였으며, 중국에서 사왔거나 일본을 통해 구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369)윤근수, 『월정집』 권5, 「안평연기」. 박미에 의하면 윤근수는 신흠과 함께 금석 고문이 보기 드물다고 매일 한탄하였다고 한다(박미, 『분서집』 권16, 「제이사심금석록후」). 윤근수의 제자인 이정귀도 옛 박물을 애호하였던 영의정 기자헌(奇子獻, 1562∼1624)과 함께 평양의 궁터에서 출토된 구리 거울을 보고, 명문과 서체에 대한 정밀한 고증을 통해 고구려 동명왕 때의 고경으로 판정하였고, 같은 문하 출신으로 기이한 옛것을 좋아한 조경(趙絅, 1586∼1669)은 촌부가 진흙 길에서 발견하여 관악산 불성사에 판 고동기의 모양과 은입사 무늬 등의 현상을 자세하게 고찰하고 옛 기물로서의 의미와 전세의 의의에 대하여 글을 남긴 바 있다.370)이정귀(李廷龜), 『월사집(月沙集)』 권33, 「기성고경설(箕城古鏡說)」 ; 조경(趙絅), 『용주집(龍洲集)』 권12, 「관악사고동로발(冠岳寺古銅罏跋)」 참조. 이들의 유물에 대해 치밀한 관찰과 고증에의 관심은 미술 사학의 시원으로 생각되는 고물학의 태동이란 측면에서 새로운 주목이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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