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5장 고미술 취미의 탄생
  • 2. 조선 초·중기 고동 서화 취미의 확산
  • 조선 중기, 17세기 후반
홍선표

17세기 전반에 서인계 문사 관료를 중심으로 고착된 고동 서화 취미는 17세기 후반을 통해 전란의 피해 복구와 회복을 위한 국가 재조(再造)의 노력에 힘입어 인구가 증가하고 은을 매개로 한 물화의 활발한 유통과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한적한 탈속의 상태에서 자아를 닦고 기르며 즐기는 풍조가 한층 심화되고, 이에 따른 기고벽(嗜古癖)의 대두와 함께 ‘낙하경상가(洛下卿相家)’나 ‘귀척호가(貴戚豪家)’, ‘부귀지가(富貴之家)’ 사이로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송시열 등이 주자의 서화 취향과 사대부 집안의 유작 보존 의식을 강조하고, 선세나 스승의 유물을 대대로 전승하며 경완(敬翫)하거나 이러한 취향을 구업(舊業)이라며 잇는 것을 사모하는 갱장(羹墻)의 효도와 우러러 따르는 경앙지자(景仰之資)로 찬양하는 등,371)송시열, 『송자대전』 권72, 「답이택지(答李擇之)」 및 권149, 「연갑발(硯匣跋)」과 「서김사명화첩후(書金士明畵帖後)」 ; 김수증(金壽增), 『곡운집(谷雲集)』 권6, 「서선세묵적첩후(書先世墨蹟帖後)」 ; 신익성, 『낙전당집』 권8, 「서경자실록세초첩후」 등 참조. 문사들 수장론의 일부를 이루면서 이 방면 취미 활동에 대한 명분을 뚜렷하게 해주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서인계 문사는 선대의 전통을 이어 고동 서화를 애호하였으며, 허목(許穆, 1595∼1682)을 비롯한 남인 인사와 선조의 서손(庶孫)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 등의 종친들도 이 시기의 고동 서화 수집과 감상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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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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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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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의 애호벽과 한적 풍류의 정신은 전서와 해서에 능하고 당인(唐寅)의 화첩 등을 수장하였던 조카 김광현(金光炫, 1585∼1647)과 손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 김수항(金壽恒, 1629∼1689), 그리고 김극효와 김상헌 등 3대의 묵적을 모은 서손(庶孫) 김수징(金壽徵)의 집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김상헌에게 직접 서예를 배우고 고화를 물려받기도 한 김수증은 전서체나 예서체로 쓴 비액서(碑額書)로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한거하면서 문장과 서화를 즐겨 사람들이 그 청고(淸高)함에 탄복하였으며, 연경에서 한나라 때의 『조전비첩(曹全碑帖)』을 구입하는 등 금석문 수장가로도 유명하였다.372)정재륜(鄭載崙),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 하 ; 황정연, 앞의 글, 226∼228쪽 참조. 그는 자신의 기고벽을 한대의 예서를 통해 충족시키려고도 하였다.373)김수증, 『곡운집』 권6, 「서한예첩후(書漢隷帖後)」 참조. 한편, 송시열은 김수증이 탁본하고 모각해서 만든 금석첩 180여 권이 구양수의 『집고록』 1,000권에는 못 미치지만 적지 않은 분량이라 하면서, 늦은 시대에 조선 땅에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구양수 못지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374)송시열, 『송자대전』 권149, 「금석총발(金石叢跋)」 참조. 그의 아들 김창숙(金昌肅, 1651∼1673)도 옛날 글과 서화를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였고 감상 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고문과 고서화를 좋아하여 거처하는 서재 이름을 ‘삼고(三古)’라고 지었다고 한다.375)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 권27, 「종제중보묘지명(從弟仲甫墓誌銘)」. 그리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옛것을 즐기는 ‘벽’이 있어 수집해 모으고 감식하는 데 배고픔과 목마름도 잊은 채 몰두하였다고 전한다.376)김수항(金壽恒), 『문곡집(文谷集)』 권23, 「제종자창숙문(祭從子昌肅文)」. 김수항은 전서에 대해 ‘벽’을 걱정할 만큼 좋아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과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등은 주로 한양과 근기(近畿) 지역을 중심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풍광을 노래하였으며, 각자의 별서(別墅)를 방문하여 시 모임을 갖고 고동 서화의 감평과 음악 및 바둑을 즐기는 일을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으로 삼았다.377)김수항, 『문곡집』 권26, 「제이생송재전장첩(題李生松齋篆章帖)」. 김창협과 김창흡의 애호 취향에 대해서는 신영주, 앞의 글, 364쪽 참조. 이들 형제는 김창흡의 증언대로 모두 그림과 관련된 회사(繪事)를 중시하였고, 대부분 시서화를 겸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취향은 대대로 살아 온 서울의 북촌을 중심으로 이들과 혈연 혹은 학연을 맺은 노론 주류의 경화 사족(京華士族)을 통해 조선 후기로 계승되었다.378)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습유(拾遺) 권2, 「영사제송죽양화(詠舍弟松竹兩畵)」. 그리고 이들과 ‘예원(藝園)’의 일원으로 종유하였던 홍세태(洪世泰, 1653∼1725)는 중인 출신으로 고검을 수장하고 있었으며, 그림을 매우 좋아하여 고금의 서화를 열람하는 등 후대 여항(閭巷) 문인이 고동 서화에 취미를 가지게 되는 선구가 되었다.379)홍세태(洪世泰), 『유하집(柳下集)』 권6, 고검편(古劍編) 참조. 홍세태는 1682년 통신사행의 서기로 일본에 갔을 때 히토미 가부산(人見鶴山)에게 가노 나오노우(狩野常信)의 설조도(雪釣圖)를 증정받고 “내가 화도(畵圖)를 너무 좋아하여 고금의 그림을 살펴보았다(余酷嗜畵圖閱古今畵矣).”라고 하였다(朝岡興禎, 『增訂古畵備考』, 弘文堂, 1905, 1659쪽 참조).

수장가이며 감평가였던 신익성의 조카 신정(申晸, 1628∼1687)은 평생 그림 ‘벽’이 있어 천금을 아끼지 않고 구하였으며 ‘쌍교룡(双蛟龍)’이란 고검도 수장하고 있었고, 1684년(숙종 10)에는 최석정(崔錫鼎, 1646∼1715) 등과 함께 며칠 동안 창수(唱酬)하며 옛날 함에서 칼을 꺼내 완상하기도 하였다.380)신정(申晸), 『분애유고(汾厓遺稿)』 권2, 「증조생세걸구화(贈曹生世傑求畵)」 ; 권2, 「고검인(古劍引)」 ; 임상원(任相元), 『염헌집(恬軒集)』 권11, 「갑자십일월사일 이대간감시사 신삼재인백정…… 최부학여화석정 창수 범사일(甲子十一月四日以大諫監試事申三宰寅伯晸……崔副學汝和錫鼎唱酬凡四日)」 참조. 17세기 전반기의 서화 애호 풍조의 확산에 참여한 바 있는 최명길의 손자이자 문징명의 화적을 수장하였던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의 조카인 최석정은 고문 부흥과도 관련이 있지만, 옛 기물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공자 사묘(祠廟)의 석고(石鼓)에 대한 유래 및 변천사를 구양수의 『집고록』을 참조해 고찰하는 등 학문적인 관심을 보였다.381)김동준, 「한국 기물명의 역사와 성격에 관한 소고」, 『진단학보』 97, 진단학회, 2004, 103∼104쪽 참조. 명종과 선조 때에 명품 서화를 많이 모았던 박정의 아들 박세당(朴世堂, 1629∼1703)도 구양수의 예천명(醴泉銘) 탑본과 부여에 있는 평제탑비명(平濟塔碑銘)을 비롯한 금석문 수집에 열성이었으며, 1668년(현종 9)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오면서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사이에서 구입한 작가 미상의 화첩에 ‘서계청완(西溪淸玩)’이란 제명을 붙이고 소중하게 수장하며 감상하였다.382)황정연, 앞의 글, 219쪽 참조 ; 박세당(朴世堂), 『서계집(西溪集)』 권8, 「서계청완발(西溪淸玩跋)」. 조속의 아들 조지운(趙之耘, 1637∼1691)은 대를 이어 서화에 능하였고, 특히 고서화 감평 능력이 뛰어나 한눈에 작가를 판별하고 진위를 가려내어 사람들이 경복하였다고 전한다.383)이덕수(李德壽), 『서당사재(西堂私載)』 권7, 「문의현령조공비갈명(文義縣令趙公碑碣銘)」. 박세당의 처조카이며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아들인 남학명(南鶴鳴, 1654∼1724)은 주변의 금석 각문(刻文)이 인멸되는 것을 걱정해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양수의 『집고록』의 뜻을 따라 지방의 벽이나 판에 새겨진 명사 22인의 필적을 모아 ‘고첩’을 만들었으며, 최석정이 이름을 지어 준 수락산 서쪽에 있는 회은재(晦隱齋)라는 수장처에 수집품을 쌓아 놓았는데, 만 축(萬軸)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384)이민서(李敏敍), 『서하집(西河集)』 권12, 「남군집고첩후서(南君集古帖後序)」 ; 남학명(南鶴鳴), 『회은집(晦隱集)』 권4, 「회은옹자서묘지(晦隱翁自序墓誌)」. 그리고 박세당의 제자인 이정신(李正臣, 1660∼1727)도 『집고록』을 효방(效倣)하여, 김생을 비롯한 우리나라 명사들의 묵적을 모아 2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해동필적(海東筆跡)』을 만들었다.385)이건명(李健命), 『한포재집(寒圃齋集)』 권9, 「이방언정신해동필적후(李邦彦正臣海東筆蹟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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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당평제비(定林寺址唐平濟碑)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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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계 문사들의 고동 서화 수집 및 감상의 심화와 확산에는 이들의 구 심점이었던 송시열의 역할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자가 그림을 매우 좋아하여 상자를 통째로 빌려다가 감상한 일화를 거론하며 김상헌의 애호벽을 두둔하였는가 하면,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수장하였던 연갑의 그림 문양을 손자가 보수하여 후손에게 전하려 한 노력을 효도의 일단으로 칭송하는 등, 문방청완의 취향을 권장하였다.386)송시열, 『송자대전』 권72, 「답이택지」 및 권149, 「연갑발」. 특히, 그는 유배지에서도 구득한 서화를 표장하고 수장할 궤짝을 마련하기 위해 제자에게 부탁하였을 정도로 애호하였으며, 당시 누구보다도 많은 서화 제발문(題跋文)을 남기는 등 호고와 재도(載道)의 관점에서 활발한 감평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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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
송시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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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에는 허목을 중심으로 남인 문사 사이에서도 고동 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특히, 허목은 경전의 원류를 상고 시대의 고문(古文)에서 추구하였으며, 글씨도 한자의 시원인 전서체를 선호하여 삼대의 유풍을 지닌 석경(石經)과 상나라·주나라의 고동기 등에 새겨진 금석문과 고문자에 관한 서적을 많이 수집하였다.387)허목, 『기언』 권6, 「고문시학자(古文示學子)」. 그는 이우가 1663년(현종 4) 연경에 다녀오면서 구해 온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탑본을 보고, 사물의 본래적 형상을 본떠 글자를 만든 삼대의 필적으로 규구(規矩)와 준승(準繩)을 체득한 우임금의 법도가 담겨 있는 성인의 문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388)허목, 『기언』 권6, 「형산신우비발(衡山神禹碑跋)」 참조. 올챙이 모양의 과두체(蝌蚪體)로 쓴 허목 특유의 ‘미수전(眉叟篆)’은 후학들이 “기이한 옛것으로 은나라 솥과 주나라 그릇의 명문과 같다.”고 하였듯이, 그의 삼대 재현 혹은 고도(古道) 발현의 상고 의식과 금석 취미가 결부되어 이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좌(李上佐)의 『수묵불화첩(水墨佛畵帖)』과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묵포도도(墨葡萄圖) 등을 수장한 허목은 적지 않은 양의 인장과 오 래된 거문고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가져온 옛 거울을 간직하고 있었으며,389)허목, 『기언』 권67, 「경명(鏡銘)」 참조. 그의 학예 취향은 이만부(李萬敷, 1664∼1732), 이익(李瀷, 1681∼1763) 등의 근기 남인을 통해 조선 후기로 이어졌다.390)황정연, 앞의 글, 341∼344쪽 참조. 남인이었던 윤휴(尹鑴, 1617∼1680)도 옛 거울을 수장하고 일상의 심회를 의탁하며 향유하였다.391)이양오(李養吾), 『번계집(磻溪集)』 권2, 「오우허청중 득만고장석각도장어미수댁 위보장 이이일편심황아감제일절(吾友許淸仲得萬古藏石刻圖章於眉叟宅爲寶藏而以一片心貺我感題一絶)」 ; 황번로(黃磻老), 『백하집(白下集)』 권5, 「허문정공고문인장발(許文正公古文印章跋)」 ; 윤휴(尹鑴), 『백호전서(白湖全書)』 권2, 「고경탄(古鏡歎)」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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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수필첩(許穆手筆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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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묵초(佛畵墨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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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묵초(佛畵墨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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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는 종친들 사이에서도 고동 서화 수집과 감상에 대한 열의가 높았으며, 17세기 후반에는 낭선군 이우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392)황정연, 앞의 글, 144∼212쪽에 상세하다. 금석 취미를 허목과 함께 향유하였던 이우 는 만년에 집 남쪽에 사락당(四樂堂)을, 그 동쪽에 서고를 짓고 주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학이 깃들게 하였으며, 거문고 등을 좌우에 두고 유유자적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적(古迹)을 즐겨 특이한 서화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였고, 구양수의 『집고록』처럼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엮어 아침저녁으로 완상하는 자료로 삼았다고 한다.393)신익상(申翼相), 『성재유고(醒齋遺稿)』 책6, 「낭선군시장(朗善君諡狀)」. 1668년(현종 9)에 완성한 이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는 삼국시대 이래 역대 서예가들의 필적 300점을 시대순으로 배열한 것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한 비석 등의 금석문을 탑본하여 모은 것이다.394)이완우, 「비첩(碑帖)으로 본 한국 서예사-낭선군 이우의 『대동금석서』-」, 『국학 연구』, 국학 연구원, 2002, 97∼113쪽 참조. 이우는 공민왕 이래 조선 초·중기 역대 화가들의 작품 60폭을 성첩한 『해동화첩(海東畵帖)』을 비롯해 상당량의 그림을 모았고 각종 인장과 거문고도 수장하고 있었는데, 특히 우리나라 묵적과 금석문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집록하여 후대의 금석문 취미와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395)박효은, 앞의 글, 92쪽과 황정연, 앞의 글, 181∼21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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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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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경릉 참봉을 지낸 조하언(曺夏彦, 1657∼1699)도 고금의 서화와 금석문을 수집하고 그 세대를 기록하여 두기를 좋아하여 쌓인 것이 권책을 이루었다고 하며, 소동파(蘇東坡, 소식)의 ‘우의’ 정신과 구양수의 ‘집고’ 취미를 따라, 호고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감상하고 품평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고 한다.396)최규서(崔奎瑞), 『간재집(艮齋集)』 권9, 「경릉참봉조공묘지명(敬陵參奉曺公墓誌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옛 기물을 좋아하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후손의 집터에서 나온 깨진 청화 자기를 명문에 의거해 고증하고 백분과 생칠로 보수하여 귀중하게 애완하였는가 하면, 평양의 부유한 진사 집안 출신의 조세걸(趙世傑, 1636∼1707년경)은 선대부터 중국의 명화를 모아 집의 여러 칸에 가득 찰 정도로 수장품이 많았으며 이를 매일 보고 익히며 화가로 성장하는 등, 신분과 지역을 넘어 확산되기도 하였다.397)김득신(金得臣), 『백곡집(栢谷集)』 책5, 「파화기기(破畵器記)」 ; 박세당, 『서계집』 권8, 「조장군화첩발(曺將軍畵帖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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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초상(士人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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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려 말기에 발생하여 조선 초·중기를 통해 확산된 고동 서화 취미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기와 보유(補儒)의 차원에서, 옛것을 수집하여 애호하고 즐기고 보존하는 문사들의 호고 및 기고와 경모 의식의 심화와 문방과 임원(林園)에서의 여가를 누리는 한적 풍류의 일상적인 습속화에 따라 당색과 신분, 지역을 초월하여 성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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