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5장 고미술 취미의 탄생
  • 3. 조선 후기 고동 서화 취미 열풍
홍선표

정조 연간의 문사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지금 저 고옥, 고동, 정이, 필산(筆山), 연석(硯石) 등은 세상이 모두 소장하여 완호로 삼는다.”고 하였듯이,398)남공철(南公轍), 『금릉집(金陵集)』 권11, 「증원유량재명서(贈元孺良在明序)」 참조. 조선 후기를 통해 고동 서화 수집 및 감상은 세간을 풍미하는 시대 풍조로서 열풍을 이루었다.399)조선 후·말기의 고동 서화 취미를 다룬 논고로는 이우성, 「실학파의 서화고동론」, 『한국의 역사상』, 창작과 비평사, 1982, 106∼115쪽을 비롯하여, 홍선표, 「조선 후기 서화 애호 풍조와 감평 활동」과 「19세기 여항 문인들의 회화 활동과 창작 성향」 ; 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 세족과 고동 서화 취미」,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출판, 1999, 277∼316쪽 ; 박효은, 「18세기 조선 문인들의 회화 수집 활동과 화단」, 『미술 사학 연구』 233·234, 한국 미술사 학회, 2002, 139∼186쪽 ; 장진성, 「조선 후기 고동 서화 수집 열기의 성격-김홍도의 「포의풍류도」와 「사인초상」에 대한 검토-」, 『미술사와 시각 문화』 3, 미술사와 시각 문화 학회, 2004, 154∼200쪽 ; 황정연, 앞의 글, 263∼510쪽 참조. 이러한 열풍은 선조 연간 이후 본격화되었고, 17세기 전반부터 일부 인사들 사이에서 애호벽을 이루기 시작하여 후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었다. 18세기 전반에는 한양의 북부에서 세거하던 집권층인 노론계의 경화 사족(京華士族)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김창협과 김창흡의 인척이거나 문하생으로, 혼인과 동문의 관계로 가깝게 지내던 소론계의 일부 인사와 함께 고동 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동호적인 활동에 적극 나섰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조유수(趙裕壽, 1663∼1741), 신정하(申靖夏, 1680∼1715), 조구명(趙龜命, 1693∼1737), 남유용(南有容, 1698∼1773), 김광수(金光遂, 1699∼1770), 이윤영(李胤永, 1714∼1759) 등이 있다.400)홍선표, 앞의 책, 238∼2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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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 초상
김창흡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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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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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연은 각기병에 걸릴 정도로 술을 좋아한 풍류 시인으로 병중에서도 서화 감상을 즐겼으며, 이웃에 살던 정선(鄭歚, 1676∼1759)의 감식안에 힘입어 좋은 그림을 가장 많이 수집한 대표적인 소장가였다.401)정내교(鄭來僑), 『완암집(浣巖集)』 권2, 「사천옹댁소집(槎川翁宅小集)」 ; 남유용(南有容), 『뇌연집(雷淵集)』 권13, 「제백씨어부도소사후(題伯氏漁父圖小詞後)」 ; 이하곤(李夏坤), 『두타초(頭陀草)』 책18, 「제이일원소장송원명적(題李一源所藏宋元名蹟)」 참조. 이병연의 처사촌 조카인 이하곤은 법서와 명화를 감상하고 품평하는 것을 ‘인생의 첫 번째 즐거움’으로 삼았던 뛰어난 감평가이며, ‘상이주정(商彛周鼎)’의 고동품과 함께 ‘천가만축(千架萬軸)’이라고 했을 정도로 글씨와 그림이 집 안에 차고 넘쳤던 최다 수장가의 한 사람이었다.402)이하곤, 『두타초』 책18, 「제일원란방초광첩(題一源爛芳焦光帖)」 ; 조구명(趙龜命), 『동계집(東溪集)』 권9, 「담헌애사(澹軒哀辭)」. 그는 자신의 서재에 있는 ‘오목필통(烏木筆筒)’과 ‘고동향로’ 등이 모두 ‘당물(唐物)’이라고 하였으며, 신정하는 이하곤의 소장품 규모에 대해 “ (그가) 상산(지금의 진천)을 떠나 (서울로) 돌아올 때 소와 말에 가득 실은 서화가 길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도둑들이 재화로 여기고 훔치려 들었기 때문에 여러 날을 잠도 자지 못하고 지키느라 하인들이 화를 냈다.”고 하였을 정도로 많았다.403)이하곤, 『두타초』 책11, 「재거(齋居)」 및 책14, 「제이일원소장정선원백망천저도후(題李一源所藏鄭歚元伯輞川渚圖後)」. 이하곤은 이러한 취미 생활을 남인계 문인 화가였던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감상우(鑑賞友)’, 즉 동호인으로 함께 즐김으로써,404)조구명, 『동계집』 권6, 「제유여범가장윤효언선보첩(題柳汝範家藏尹孝彦扇譜帖)」. 당색을 초월하여 비정치적으로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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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도(淸供圖)
청공도(淸供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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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하, 조유수, 조구명, 남유용도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다른 사람이 소장한 그림을 보면 반드시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수장가였으며, 서화 평을 많이 남긴 감평가이기도 하였다.405)이하곤, 『두타초』 책11, 「재거(齋居)」 ; 신정하(申靖夏), 『서암집(恕菴集)』 권11, 「가장하중소묵죽이장자기(家藏荷仲昭墨竹二障子記)」 ; 남유용, 『뇌연집』 권13, 「제백씨어부도소사후」 ; 조유수(趙裕壽), 『후계집(后溪集)』 권8, 「답이일원(答李一源)」 등 참조. 조구명은 당시 성행한 서화를 애호하는 취미 활동을 ‘직접 그리는 자(畵之者)’와 ‘모으는 자(蓄之者)’, ‘감상하는 자(賞之者)’로 나누어 언급하기도 하였다.406)조구명, 『동계집』 권6, 「제이안산병연소장화첩(題李安山秉淵所藏畵帖)」 참조. 김광수 또한 박지원이 ‘감상학의 개창자’로 지칭하였듯이, 뛰어난 서화 고동 감식가이며 최고의 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다.407)홍선표, ‘김광수(金光遂)’,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참조. 서화에 능하였고, 정선·심사정·이인상·강세황·이광사 등의 서화가와도 가깝게 교유한 김광수는 고서, 명화, 벼루, 고비(古碑), 고기류 등을 멀리 연경까지 가서 많이 사들여 자신의 서재인 내도재(來道齋)에 모아 두고 종일 완상하였고, 서화를 팔러 오는 사람의 물건이 자신의 안목에 맞으면 옷을 벗어 주거나 곳간을 기울여서 사들여도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았다고 한다.408)조희룡(趙熙龍), 『해외란묵(海外讕墨)』 ; 필자 미상, 『상고당유적(尙古堂遺蹟)』, 「상고당김씨전(尙古堂金氏傳)」 ; 이광사(李匡師), 『원교집(圓橋集)』 권8, 「내도재기(來道齋記)」. 그림을 잘 그렸던 이윤 영은 고동옥기 수집가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눈부실 정도로 아롱진 남전옥(南田玉)을 비롯한 단주연(端州硯)과 판서 이성중에게서 구입한 회령 운두산성의 황제총에서 나온 송대 고동화로와 장각가(長角斝) 등을 수정루(水晶樓)를 지어 보관하였는데, 고동 취미를 계승한 아들 이희천이 잘못되어 처형당하자 옛 기물을 지니고 있어 그런 재앙을 불렀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409)김종수(金種秀), 『몽오집(夢梧集)』 권4, 「수정루기(水晶樓記)」 ; 이규상(李奎象), 『일몽고(一夢稿)』,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이윤영(李胤永)’, ‘이성중(李成中)(민족 문학사 한문 분과 옮김, 『18세기 조선 인물지』, 창작과 비평사, 1997, 76쪽과 22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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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자화상
강세황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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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서인계 중심의 경화 사족이 주도하여 성행한 18세기 전반기의 고동 서화 수집 열기는, 이정섭(李廷燮, 1688∼1744)이 “요즈음 사람들은 고서화를 많이 모으는 것을 고상한 취향으로 삼아 누가 한 조각 비단 화폭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구입하여 농짝을 가득 채우고 대나무 상자가 넘치게 하여 보물처럼 자랑하며 수장한다.”고 지적한 것처럼 과열 현상을 빚기도 하였다.410)이정섭(李廷燮), 『저촌집(樗村集)』 권4, 「제이일원소장운간사경첩후(題李一源所藏雲間四景帖後)」. 이러한 열기는 안산을 비롯한 근기 지역의 남인과 소북계 문사들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허목을 계승한 이만부(李萬敷, 1664∼1732)를 위시하여 이관휴(李觀休, 1692(6)∼?),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이 있다.411)황정연, 앞의 글, 338∼335쪽과 박지현, 「연객 허필 서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44∼45쪽 참조. 그리고 이 무렵부터 연행 사절단(燕行使節團)의 기행록(紀行錄)에서 연경 유리창(琉璃廠) 점포의 고동 서화와 기완(器玩)에 대한 기록이 보이기 시작하여 정조와 순조 연간을 통해 크게 증가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고동서화 수집 및 감상 열풍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윤동섬(尹東暹, 1710∼1795), 홍량호(洪良浩, 1724∼1802),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유만주(兪晩柱, 1755∼1788),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심상규(沈象奎, 1766∼1838) 등 고동 서화 애호와 관련 있는 18세기 전반기 노론계 사대부 관료의 자제들에 의해 북학(北學) 풍조 등과 결부되면서 더욱 심화된다. 특히, 대수장가였던 남공철은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의 아들로, 자기 집 건물들을 ‘고동서화각’, ‘서화재’, ‘고동각’ 등으로 불렀을 뿐 아니라, 서화에 대한 제발문을 따로 묶어 두 권에 달하는 『서화발미(書畵跋尾)』를 펴냈을 정도로 깊이 천착하였다.412)김성진, 「조선 후기 문인들의 생활상과 소품체 산문-남공철의 예를 중심으로-」, 『초전 장관진 교수 정년 기념 국문학 논총』, 세종출판사, 1995, 379쪽 참조. 심상규는 평생의 기력을 쏟아 가성각(嘉聲閣)을 꾸미고 심혈을 기울여 고금의 서화와 기석취동(奇石翠董)을 수집하여 모두 여기에 수장해 두었다고 한다.413)이유원(李裕元),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성각(嘉聲閣)」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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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섬 초상
윤동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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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는 그동안 경화 사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오던 고동 서화 취미가 박지원과 가깝게 교유한 ‘백탑청연(白塔淸緣)’의 서얼 출신 문인들 사이로 파급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는 밤을 새워 가며 즐기는 등 애호벽이 심하였으며, 박지원이 당대 최고의 감식가로 손꼽았던 서상수(徐常修, 1735∼1793)는 소미점(小米点)을 사용한 발묵법에도 능하였지만, 좋은 고동류를 보면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들였던 수장가로도 명성이 높았다.414)홍선표, ‘서상수(徐常修)’,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1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참조. 이들은 정철조(鄭喆祚, 1730∼1781), 이한진(李漢鎭, 1732∼1815), 성대중(成大中, 1732∼1812),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등과 교 유하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애호벽에 빠져 있었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415)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12, 「아정유고(雅亭遺稿)」 및 권3, 「초정시고서(楚亭詩稿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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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도권(修禊圖卷) 부분
수계도권(修禊圖卷)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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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서얼 지식인들 사이로 확산된 애호벽은 역관(譯官), 의관(醫官) 등의 기술직 중인과 하급 관리인 경아전(京衙前)과 이서배(吏胥輩)에게까지 퍼지면서 절정을 이루었다.416)홍선표, 앞의 책, 244∼247쪽과 280쪽 참조. 비양반 출신의 이들 중서층은 시문에 능하여 여항 문인(閭巷文人)으로도 지칭되는데, 17세기경부터 실무 직위를 이용하여 재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유흥, 호사 풍조를 일으키면서 고동 서화 수집과 감상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하였다.417)강명관, 앞의 책, 159∼188쪽 참조. 윤두서의 진적을 사대부 집안보다 수표교에 사는 최씨 성을 가진 중인 계층에서 더 많이 비축하고 있었다고 하며, 18세기 후반 최대 서화 수장가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은 의관 출신이었고,418)황정연, 「석농 김광국의 생애와 서화 수장 활동」, 『미술 사학 연구』 235, 한국 미술사 학회, 2002, 61∼85쪽 참조.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물 쓰듯 쓰며 고금 서화를 구입한 김홍연(金弘淵)은 중서층이나 한량 등으로 구성된 왈자였다. 역관 출신의 거상 김한태(金漢泰, 1762∼?)는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정도로 큰 저택을 짓고 거기에 몽고, 중국, 일본으로부터 각종 고동 서화와 사치품을 구입하여 수장하였으며, 조희룡(趙熙龍)의 중인 전기집인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수록된 영조 때의 부자 김억(金檍)은 칼 수집 벽이 있어 이를 모아 구슬과 자개로 꾸며 놓고 매일 한 자루씩 바꾸어 찼는데, 한 해가 지나도록 다 찰 수 없었다고 한다.419)조희룡(趙熙龍), 『호산외기(壺山外記)』, 「김억전(金檍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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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도(冊架圖)
책가도(冊架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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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층을 포함한 중서층으로 확산된 고동 서화 수집과 감상의 열풍은 영조 연간을 통해 심화된 사치 풍조에 편승하여 소유 자체에 목적을 두는 호사가들을 배출하게 되면서, 속여서 파는 위조품 구입에 가산을 탕진하고도 깨닫지 못한 채 굶주림 속에서 이를 광적으로 애호하는 왜곡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420)조수삼(趙秀三), 『추재집(秋齋集)』 권7, 기이(奇異), 고동노자(古董老子) 참조. 이러한 호사적이고 물욕적인 경향은 ‘진송(晉宋)의 풍류사(風流事)’의 실천으로 여기며 보유적이고 수기적인 탈속호고(脫俗好古)의 고아한 취미를 향유하던 안목 높은 감상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신위(申緯, 1769∼1845)는 “이서(吏胥)들 사는 곳이 재상집 같아 도서와 완물이 방 안에 가득하니 어찌 취미로 풍속을 옮길 수 있으리, 모두가 유행 탓에 풍속을 버렸다.”고 하였으며, 유한준(兪漢寯, 1732∼1811)은 이러한 호사가들의 탐욕적인 애호 취향을 겉껍질과 같은 태도라고 비난한 바 있다.421)신위(申緯), 『경수당집(警修堂集)』 권20, 잡서(雜書) 「벽노방열고(碧蘆舫列藁)」 ; 유한준(兪漢寯), 『저암집(著庵集)』 권18, 「석농화원발(石農畵苑跋)」 참조. 박지원도 감상할 줄 모르고 수장만 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남의 말만 듣는 자들이라 하였으며, 이덕무는 ‘속배(俗輩)’라고 하였다.422)박지원(朴趾源), 『연암집(燕巖集)』 권3, 「필세설(筆洗說)」 ; 이덕무, 『청장관전서』 권49,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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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감상
서화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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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엽에는 고동 서화 수집과 감상열이 사치 풍조에 수반되어 여항의 이름 없는 소년에게까지 확산되었으며, 지방으로도 널리 파급되어 호남의 향리집에서는 한양의 경화 취미를 흉내 내어 서화를 방에 벌여 놓고 있을 만큼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423)마성린(馬聖麟), 『안화당사집(安和堂私集)』, 「박생소청횡축제(朴生所請橫軸題)」 ; 김진수(金進洙), 『연파시초(蓮坡詩劓)』 하(下), 「호남요송이자안(湖南謠送李子安)」 참조. 사치 풍조에 수반된 조선 후기 고동 서화 수집 열기의 사회적·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장진성, 앞의 글, 154∼200쪽 참조. 돈 있고 풍류를 아는 사람이면 먼저 주색을 배우고, 다음으로 고동 서화를 모으고 애완한다는 속설이 생겼을 정도로 호사 취미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424)홍선표, 앞의 책, 280쪽 참조. 이와 같이 고동 서화 수집 열기는 중서층으로 확산되면서 탐욕과 물욕의 대상인 사치품과 위세품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문방 청완의 감상 취미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19세기에 이르러 고물학으로 진전되면서 미술 사학의 기원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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