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1장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광고
  • 1. 매스 미디어 등장 당시 광고의 역할
이용성

중세 봉건 사회는 시민 혁명, 종교 개혁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붕괴되었고 이어서 근대 사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근대 사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형성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보통 선거 제도가 성립되면서 대중이 정치적 주권을 행사하게 되는 대중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동시에 영국을 필두로 유럽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본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근대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성격이 나타나는 데는 자유주의 등 근대적 사상의 형성과 전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근대적 사상의 형성과 전파는 구텐베르크(Johannes Cutenberg, 1397∼1468)의 금속 활자 인쇄술의 발명, 근대적 신문과 잡지의 등장이라는 근대적 미디어 제도와 기술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1)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종교개혁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고 과학혁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단일한 언어의 민족문학과 근대적 신문의 인쇄와 배포를 통해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인 민족을 창출하여 근대적 민족주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요시마 순야, 안미라 옮김, 『미디어문화론』,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6, pp.65∼67).

중세 봉건 권력과 시민 계급이 격돌하던 근대 이행기에는 신문과 잡지 등 근대적 인쇄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신문과 잡지는 주된 내용이 뉴스냐 논설이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던 과도기적(미분화된) 외형을 갖고 있었다. 비록 형식과 내용이 성숙되지 않았지만 신문과 잡지는 시민 계급과 대중을 반봉건 투쟁을 위해 동원하는 정치 언론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고 있었다.

정론지(正論紙)와 정치 잡지들은 광고 수입 같은 현대적인 수익 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주로 연관된 정치 조직이나 정치인 등의 지원에 의존하여 운영되었다. 그때 정론지가 수익 구조 창출에 주력하지 않고 일정한 정치 이념이나 정치 여론의 형성과 전파를 발행 목적으로 삼은 것은 당대의 미디어 환경을 감안한다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신문과 잡지를 판매할 수 있는 독자 시장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신문과 잡지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은 다음 문제이고 기본적으로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인구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2) 이는 출판 미디어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시대 출판은 주로 라틴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필사나 목판 인쇄와 같은 열악한 생산기술 수준과 맞물려 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여 출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종교개혁과 문예부흥 등을 계기로 각 민족어가 부활하자 출판 언어가 라틴어에서 각 민족어로 바꾸어 출판시장이 급격히 팽창하였다. 그리하여 대중적 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정론지는 신문 미디어와 독자의 이념적 일치도가 높았기 때문에 정치 이념에 따라 독자가 자연스럽게 고정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내용이나 가격 등을 통해 신문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과열될 단계가 아니었다.

결국 근대 이행기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근대적 미디어를 동원하여 치열한 이념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신문은 아직 상업화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으므로 수익 구조 창출은 불가능하였고, 실제로 대중 언론, 상업 언론의 시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광고 시장의 형성은 아직 자본주의 경제의 수준이 유아기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사회 혁명기를 거쳐 근대 사회가 안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자 근대적 미디어가 진정한 매스 미디어의 시대로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민족 독립, 자유 민주주의, 대의제 정치 제도의 성립 등 주요한 사회적·민족적 과제가 어느 정도 완결되어 가자, 근대적 미디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시장을 개척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정론지(정치 신문)의 주된 재원인 정당이나 정치적 후원자의 운영 자금 지원이 끊기게 되었고, 정치적·사회적 내용도 더 이상 독자의 관심을 끌어 모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문은 이제 정론지의 성격을 탈피하고 독자 시장과 광고 시장에 관심을 가져야 했다. 드디어 신문 미디어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에 좌지우지될 운명을 맞이한다.

이데올로기적 동기가 아니라 이윤 추구 동기가 미디어를 지배하게 되었고, 미디어의 독립성이란 주로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인 독립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문을 정치 세력 등 외부의 후원으로부터 재정적으로 자립시켜서, 논조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고의 의존도를 높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광고는 미디어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미디어를 도리어 자본(시장)에 의존시키고 종속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3) 정연우, 「광고 산업과 방송의 성격 변화」, 『광고연구』 10,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문화연구소, 1991, p.152. 미디어 콘텐츠의 생산 비용을 광고를 통해 충당하고 이윤을 창출하는 방식이 구축된 것은 정론지의 성격을 벗어나야 하는 신문 미디어와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으로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스템 속에서 소비를 창출해야 하는 자본(산업)의 입장이 서로 일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4) 채백 편역, 『세계언론사』, 한나래, 1996, p.145. 이를 통해 본격적인 매스 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대중 신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중 신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교통 통신의 발달, 제지업의 발달, 인쇄술의 발달, 문자 해독 인구를 증가시킨 보통 교육의 확대, 도시화와 산업화 등이 바탕이 되었다.

대중 신문은 신문의 내용과 신문의 수입 구조를 변화시켰다. 그래서 대중 신문은 선정적인 내용과 형식을 통해 진정 대중 언론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의 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833년 미국의 『뉴욕 선(The New York Sun)』이 신문 값을 거의 6분의 1로 인하하여 산업 노동자들도 구입할 수 있게 한 일이다.5) 채백 편역, 앞의 책, p.148. 소수 엘리트를 위한 정론지 시대에는 신문 값이 비쌌기 때문에 독자의 확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신문 값 인하는 산업 혁명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던 노동 계급(대중)을 신문 독자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즉, 대중 신문은 신문 값을 저렴하게 하는 염가 신문(penny press)을 지향하여 대규모 독자를 확보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적자 부분을 광고 수입을 통해 메우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독자의 대규모 확보는 신문의 광고 수입을 결정하는 요건이었기 때문에 대중 신문이 생존하는 데 결정적인 요 소가 되었다.

결국, 신문을 대중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가격 인하는 바로 광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광고가 신문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구독료 수입에 의존하는 비율을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광고는 염가 신문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문 미디어가 특정한 정파나 정치인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게 하여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할 수 있게 하였다.6) 미첼 스티브슨, 이광재·이인희 옮김, 『뉴스의 역사』, 황금가지, 1999, p.342. 상대적으로 신문과 자본(광고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저널리즘(journalism)의 독립성이 침해될 우려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 대중 신문이 그 내용을 통해서도 대중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였다. 이때 객관주의 언론이 등장하였다. 대중 신문은 객관성과 중립성을 표방하여 정파성과 거리를 두는 불편부당성(不偏不黨性)을 내세우고, 사실과 의견의 분리, 현실과 거리 두기 등을 저널리즘의 핵심적 원칙으로 중시하게 된 것이다. 이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게 되면 대중 신문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독자를 확보하기 어렵게 만들고, 이는 광고 유치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감안한 편집 전략의 수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 신문은 그 내용에서 다양하고 참신한 기획은 선보였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선정주의(煽情主義)이다. 대중 신문은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성, 금전, 엽기 등의 흥미 기사를 등장시켜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지면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 선정적 기사와 사회적·개혁적 캠페인이 결합한 뉴저널리즘이 등장하기도 하였다.7) 미첼 스티브슨, 이광재·이인희 옮김, 앞의 책, pp.355∼357.

이와 같이 매스 미디어 등장 과정에서 광고는 정치 언론의 영역에 머물던 미디어를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동시에 광고는 미디어의 자본 의존도를 높이거나 미디어의 의견 다양성을 침해하기도 하였다. 결국 미디어는 광고주와 자본의 영향력에 굴복하여 저널리즘의 비판적 기능을 포기하기도 한다. 또 진보적인 언론이 광고 등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언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게 생존을 위협받기도 한다. 광고주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으면 미디어 시장에서 생존하지 못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8) J. 쿠란, 「자본주의와 언론 통제」, 강상호·이원락 편역, 『현대 자본주의와 매스 미디어』, 미래사, 1986, pp.129∼145.

광고주가 광고할 미디어를 선정할 때 유의하는 것은 미디어별 수용자와 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광고주의 이러한 요구에 미디어가 부응하기 위해서는 수용자의 규모를 극대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미디어는 일반적인 취향과 이해에 들어맞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러다 보니 미디어의 내용은 친숙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어 온 가치를 주로 다루게 되고 새로운 가치는 배제하기 마련이다. 진보적인 미디어는 이러한 기존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안 언론적 성격을 갖거나 사회적 소수나 약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사회 변혁을 지향하기 때문에 광고주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신문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면 신문 제작비가 상승하게 되고 광고 수입을 확대하기 어려운 진보적 언론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9) 한동섭, 『한겨레신문과 미디어 정치경제학』,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0, pp.18∼21. 결국 광고는 뉴스 미디어를 탈정치화시키고 정치 사회 관련 뉴스 보도에서 진보적 색채를 탈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구미에서의 매스 미디어 등장과 광고의 역할에 대해여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 언론의 역사 속에서 광고의 역할을 알아볼 차례이다. 근대 조선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언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광고의 역할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볼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