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1장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광고
  • 2. 근대 조선에서 일제 강점기까지의 언론과 광고
  • 근대 신문의 등장과 광고의 역할
이용성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신문은 서구의 근대적 신문처럼 자생적으로 등장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근대적 신문(언론)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지식인 사회에 존재하였지만 실질적으로 근대적 신문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제도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 신문의 등장과 관련해서 19세기 조선 사회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10) 채백, 『신문』, 대원사, 2003, pp.14∼17. 먼저, 자본주의 맹아(萌牙)가 상업 분야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상업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였다. 이는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 요구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업 계층이 주도한 커뮤니케이션 요구의 증대는 중세 봉건 사회의 폐쇄성을 흔들어 놓았다. 이미 중국을 통해 유입되고 있던 서구의 학문과 문물은 지식인의 인식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었는데, 이는 새로운 사상 학문 기술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 전파를 위해 새로운 미디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 사회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센 물결에 휩쓸릴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위기감과 불안감은 정보 욕구를 증가시켰다. 문화적으로 조선 후기 출판 산업의 발전에 힘입은 한글 소설의 광범위한 전파는 한글 문화를 대중화시켰다. 특히 나라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의 근대화 추진이 절실하다는 개화파의 노선은 근대적 신문 도입의 정치적 동기이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882년 제3차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朴泳孝) 등이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로(福澤諭吉)에게 조선의 문명개화(文明開化)를 위해서는 신문 발행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얻고, 이를 개화파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한국 근대 신문 발행의 직접적인 계기였다.11) 채백, 앞의 책, 2003, p.18. 박영효는 1883년 한성부 판윤으로 일하면서 유길준(兪吉濬)을 중심으로 한성부 산하에 신문국(新聞局)을 두고 근대적 신문의 발행을 추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때 구상한 신문의 성격은 관보(官報)로 광고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 뒤 김윤식(金允植) 등이 중심이 되어 통리아문(統理衙門) 산하의 외국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同文學) 내 박문국(博文局)에서 1883년 10월 31일(양력)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창간하였다.

『한성순보』는 최초의 근대 신문이지만 관보의 성격을 띠고 있어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라는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한성순보』는 개화파의 근대화 이념을 중심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조선 개국 연호(朝鮮開國年號)와 지구도(地球圖) 등을 통하여 당시 조선의 세계관이었던 중화적 세계관을 극복하려 하였으나 1884년 10월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민중들이 박문국을 불태워 더 이상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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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보』
『한성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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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는 1886년 1월에 김윤식의 지원으로 『한성주보(漢城周報)』로 이름을 바꿔 복간되었다. 『한성주보』는 발행 간격을 순간(旬刊)에서 주간(週刊)으로 바꾸고 신문 언어로 국한문 혼용과 한글을 사용하는 등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 나 재원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한성주보』는 재정 적자의 누적으로 1888년 7월에 폐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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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보』의 본국공고
『한성주보』의 본국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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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아직 관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발행 주체가 정부 기관이고 편집진이 정부 공무원이며 관보에 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단순히 주요 관원의 임면 사항 등을 게재하는 일반적인 관보 내용을 넘어서 외보(외신)를 포함하여 논설 등을 게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준관보라고 할 수 있다.12) 이용성, 「민족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근대 신문의 역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1, 1999, pp.104∼105. 또한 준관보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그 주도 세력인 개화파가 개화사상이라는 혁신 이념을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구미(歐美) 사회의 정론지와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성순보』는 광고를 게재하지 않았지만 『한성주보』는 첫 호부터 ‘본국공고(本局公告)’를 통해 광고를 권한 바 있다. 그 내용은 농상공업자가 광고를 하고자 하면 박문국원에게 요청하고 그 내용을 상세히 기재하여 독자에게 알리겠다는 것이었다.13) 김민환, 『한국언론사』, 사회비평사, 1996, pp.174∼175. 『한성주보』가 정부 기관이 발행한 관보인데도 불구하고 광고를 게재한 사실은 그 성격이 독특함을 보여 준다. 물론 얼마 안 되는 광고가 『한성주보』의 논조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없다. 『한성주보』는 이렇게 발행 간격을 순간에서 주간으로 변경하고 국한문 혼용을 시도하는 등 민간 신문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86년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 침략을 지원할 수 있는 친일 미디어를 조선 내에 창간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일본계 신문을 견제할 근대적 신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한 후, 박정양(朴定陽) 내각은 중추원 고문 서재필(徐載弼)을 지원하여 같은 해 4월 7일에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 문』은 제국주의 열강을 감시 비판하여 조선의 국권 회복에 기여하였고, 사실상 독립 협회의 기관지로서 민중 계몽,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확산, 민권 향상에 큰 역할을 한 정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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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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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서재필이 미국의 대중 신문 시대를 경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반영하여 『독립신문』은 뉴스의 객관성과 불편부당성, 언론의 사회 비판적 기능을 강조하였으며, 한글을 신문 언어로 사용하는 등 서구의 대중 신문 또는 뉴저널리즘의 경향을 보여 주었다.14) 김영희, 「『독립신문』 발행 주체의 언론사상」, 『언론과 사회』 14. 성곡언론문화재단 언론과 사회사, 1996, pp.42∼48. 『독립신문』은 비록 조선 정부의 취재 편의 제공, 관립 학교나 관청의 구독 지원, 왕가의 재정 지원 등 정부의 다양한 도움을 받고 사옥과 창간 비용까지 지원받았지만 서재필 개인 소유의 민간 신문 기업의 성격을 띠었다.

『독립신문』은 지면을 통해 어떤 신문도 광고로 수입을 보충하지 않으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영문판(英文版)과 국문판(國文版)을 분리한 것은 광고 지면을 확대하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 밝히기까지 하였다.15) 채백, 「개화기의 신문 경영」, 김남석 외 편, 『한국 언론산업의 역사와 구조』, 연암사, 2000, p.20. 『독립신문』의 1897년 광고 수입을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체 수입 중 10.6%를 차지하고 있다.16) 채백, 위의 글, 2000, p.21. 민간 기업인 『독립신문』은 경영 다각화에 적극적이어서 출판 인쇄, 통신 중계 영업, 명함 인쇄, 문방구 판매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민간 신문이 일반적으로 구독료를 제대로 징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독립신문』의 광고 수입은 신문 경영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1898년에 들어서 주로 독립 협회 인사들이 중심이 된 민간 신문이 창간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협소한 독자 시장과 광고 시장을 갖고 있던 신문들이 일정한 상호 경쟁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을 의미하였다. 이는 여러 민간 신문이 창간된 1898년부터 『독립신문』 국문판의 광고 건수가 감소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17) 채백, 위의 글, 2000,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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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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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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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을 비롯한 민간 신문들은 미국의 대중 신문과 마찬가지로 염가 신문을 표방하려 하였다. 『독립신문』은 1896년 10월 27일자 논설에서 신문은 한 부당 가격이 동전 한 푼이지만 신문 한 부당 원가는 동전 한 푼 육 리라고 밝힌 바 있으며, 『제국신문(帝國新聞)』도 창간호 논설에서 신문이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값을 특별히 싸게 책정하였다고 밝혔다. 특히 『독립신문』은 1898년 7월 격일간(隔日刊)에서 일간으로 전환하면서 월 구독료를 인상하지 않아 독자(부수) 확장과 더불어 신문 가격을 올리지 않은 채 광고 수입을 창출하는 경영 전략을 구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18) 채백, 위의 글, 2000, pp.19∼20.

민간 신문들은 여전히 정부의 보조에 크게 의존하였고, 광고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독료마저 제대로 걷히지 않아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져 있었다. 당시 민간 신문의 구독료 미수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각 신문마다 구독료 납부를 촉구하는 내용을 논설이나 사고(社告)의 형식으로 자주 게재하였다. 한편, 『제국신문』은 고종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사옥 및 인쇄 시설을 하사받았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도 마찬가지로 사옥과 보조금을 하사받았다. 또한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은 각계의 지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19) 채백, 위의 글, 2000, pp.27∼29. 민간 신문들은 광고 수입이나 구독료 징수가 한계에 부딪치자 보급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염가 신문을 지향하며 인하하였 던 구독료를 다시 인상하기도 하였다.

1904년 노일 전쟁 이후 일제는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과 ‘출판법’ 등을 동원하여 조선의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은 일제의 사전 검열을 거부하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제재하여 을사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주장하였다가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신문의 저항 논조가 무디어지는 상황에서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 한국명 배설(裴說))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등장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고, 1910년 이후에 양기탁(梁起鐸), 신채호(申采浩) 등 논객(論客)의 다수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투쟁에 헌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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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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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는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1909년 자료에 따르면 발행 부수가 1만 3256부에 이르러 다른 민간 신문의 세 배가 넘었다.20) 안종묵, 「대한매일신문의 광고에 관한 연구」, 한국언론사연구회 엮음, 『대한매일신보 연구』,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4, p.295. 근대 조선 기간 중 최대 발행 부수를 기록하던 『대한매일신보』는 광고의 효과도 가장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는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글판에도 일제 담배 광고 등이 게재되어 논조와 광고가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민족주의적 성격이 뚜렷한 『대한매일신보』였지만 광고 지면은 그러한 논조(論調)와는 별개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논조와 광고와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한계를 드러낸 것이지만 신문 경영의 안정성 확보에는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21) 안종묵, 위의 글, pp.335∼337.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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