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1장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광고
  • 4. 1950년대의 언론과 광고
  • 신문 시장의 미성숙과 영세한 신문 산업
이용성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마저 정치 공간에서 사라지자 보수 우익 진영 내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김성수 등 한민당계(韓民黨系)와 이승만의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가 갈라선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보수 우익 세력의 분열은 1950년대 지배 이데올로기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 우익 진영의 갈등은 신문 영역에도 그대로 나타나 이른바 여당지와 야당지(野黨紙)가 등장하였다. 광고 시장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당시 여건 아래에서 신문이 운영 자금을 마련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정부나 특정 정파의 지원에 의존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1950년대의 신문은 정부나 정파(정당)와의 관계에 따라 논조가 결정되었다.

여당지는 주로 이승만 정권의 지원을 등에 업고 특혜적 원조 자금이나 은행 융자로 자본을 축적한 대기업이나 자유당 인사가 발행하였다. 야당지는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이 있었는데, 한민당계는 『동아일보』와 인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서울 천주교 유지 재단에서 발행하던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 논조를 선명하게 견지하였다. 두 야당지는 민주당 내 구파(舊派)와 신파(新派)를 각각 대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1950년대 신문은 정치 언론의 성격을 분명히 띠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정기와 마찬가지로 문자 해독 인구가 뒷받침하는 독자 시장이나 광고 시장의 열악함은 신문 시장의 확장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신문은 구독료 수입에 재원을 거의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었으며, 발행 부수가 가장 많았던 『동아일보』도 광고 수입은 20% 미만이었다. 신문 용지나 윤전기 등의 여건도 미군정기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은 신문 산업을 저발전 상태에 머물게 하였다.

확대보기
『한국일보』 창간호
『한국일보』 창간호
팝업창 닫기

실제 1950년대 신문 기업의 자본 규모나 재무 구조는 아주 영세한 수준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1954년부터 신문이 정상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하였지만 자본 규모나 매출액 규모가 영세하였고 적자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1955년을 기준으로 신문 판매 수입(지대 수입)만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신문은 서너 개에 불과하였으며, 자본 규모도 대부분 신설 제조업체의 평균 자본금에 이르지 못할 정도로 영세하였다.45) 주동황, 위의 글, 1993, pp.56∼59. 그러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매출액과 영업 수익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처럼 열악한 신문 시장에 처음으로 상업주의 신문을 표방한 『한국일보(韓國日報)』가 1954년 6월에 창간되었다. 『한국일보』는 상업주의 신문 경영 전략을 추진하였다. 『한국일보』는 광고 유치와 독자 확장을 위한 적극적인 마케팅과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고, 이는 당시 신문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일보』의 장기영(張基榮)은 텔레비전 방송사인 대한 방송을 경영하는 등 우리나라 최초로 신문 방송 겸영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한국일보』의 상업주의적 편집 정책과 신문 방송 겸 영 추진은 정치 언론으로서의 신문을 산업으로 재인식하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46) 김민환, 앞의 책, pp.403∼404. 이러한 상업주의 흐름은 신문의 증면 경쟁과 구독료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상업주의 흐름도 당시 신문 산업의 영세한 자본 규모나 신문의 광고 수입 구조가 대개 20∼30%에 불과한 광고 시장의 열악함이라는 제반 여건을 넘어설 수는 없다. 따라서 경쟁 가능한 시장은 부수를 확장할 수 있는 독자 시장뿐이었다. 1950년대에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야당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 해당하는 독자 시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여촌야도(與村野都)라 해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지식인 등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야당지의 주요 독자였다. 따라서 광고 수입의 비중이 크지 않은 현실에서 독자 확보가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신문의 정론성은 독자를 유인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정치적 선정주의’, ‘정치적 상업주의’와 함께 『한국일보』 등이 시도해 신문계에 영향을 미친 연예 오락, 스포츠 기사의 증가는 치열한 신문 시장에서 활로를 개척하여 독자를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었지,47) 주동황 외, 앞의 책, p.72. 광고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