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1장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광고
  • 5. 1960년대의 언론과 광고
  • 경제적 방식을 통한 신문 통제와 신문 산업의 자본 축적
이용성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 군사 정부는 반공주의와 경제 개발 우선을 내세우며 강력한 언론 통제를 시도하였다. 박정희 군사 정부는 반공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비판적 언론에 대한 통제를 제도화하였다. 동시에 또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한 경제 발전 계획의 추진 과정에서 언론을 도구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군사 정부는 부패 언론인 척결을 명분으로 하는 언론인 정화나 1961년 5월 23일에 국가 재건 최고회의 포고 제11호로 발표한 ‘신문 통신사 시설 기준’에 따라 언론사 정리, 언론사의 기관원 상주 등 원시적인 언론 통제 방식을 구사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 정부는 이승만 정권의 전근대적 언론 통제 방식에서 벗어나 신문사에 경제적 특혜를 제공하여 기업적 성장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고, 이를 바탕으로 언론을 순치시키거나 포섭하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52) 신문기업의 정론적 기능의 약화, 상업 언론의 속성 강화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러한 정책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표한 언론 정책 중 신문사 기업 육성을 위한 지원과 편의 도모, 신문기업 육성을 위한 세금 등 정부지원 방안 모색 등이 제시되어 있었다(강상현, 「1960년대 한국 언론의 특성과 그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60년대 사회 변화』, 백산서당, 1999, pp.155∼156). 단기적으로는 언론을 국가의 경제적 특혜에 의존하게 하여 체제 내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언론이 기업적 성장에 집착하도 록 하여 상업 언론의 길을 걷게 하여 언론이 상업주의화 혹은 탈정치화하도록 유도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전 정권과 달리 언론사 정비와 시설 기준의 적용을 통해서 신문사의 독과점적 구조를 구축하고 부가적인 경제적 특혜를 제공하여 신문의 대기업화가 가능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53) 박정희 정권은 일정 수준의 인쇄 능력을 갖춘 윤전기 소유를 완비해야 신문 발행이 가능하도록 하여 신문시장의 진입 장벽을 구축하였다. 적극적인 언론사 정리로 중앙 일간지는 49개가, 지방 일간지는 27개가 사라졌고, 통신사는 305개가 정리되었다. 이는 위헌적인 소급 입법에 의한 조치였고 살아남은 신문사 사주들은 1962년 10월 신문발행인협회(1966년 한국신문협회로 개칭)를 구성하여 구독료, 광고료, 지면 수 등에 대한 카르텔(단합체계)를 형성하였다(김민환, 앞의 책, pp.471∼472). 이제 명실상부한 신문의 독과점 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신문 수입 용지 관세율을 30%에서 4.5%로 낮추고 국내 생산 용지도 염가로 제공되도록 특혜를 주었다. 또한 고속 윤전기 도입, 사옥 신축 등 신문사의 시설 확장에 필요한 비용을 차관이나 융자의 형태로 제공해 주었다. 더 나아가 신문사가 다른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저리의 장기 대출을 금융권에서 알선해 주기도 하였다.54) 1962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언론의 윤리와 책임 강조, 언론인의 품위와 자질 향상, 신문 체제의 향상, 언론 정화, 언론기업의 육성 등을 위해 자금융자 편의 제공, 신문용지 원목 수입 관세 인하, 언론기업의 세금에 대한 정부 지원 강구, 조간과 석간의 단간제 적극 권장 등의 세부 지침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신문에 대한 지원과 특혜는 언론을 직접 회유하고 포섭하는 방법인 동시에 여기에 길들여진 언론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정권의 통제 속에서도 비판적 논조를 통해 야당 성향이 주류를 이루었던 독자 시장의 공략을 목표로 하고 있던 신문사들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이제 신문 시장을 양분하는 독자 시장과 광고 시장이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문사들이 1950년대까지 독자 시장에 의존하던 경영 전략을 광고 시장으로 선회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신문의 탈정치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디어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지원과 함께 신문 산업의 성장 근거인 광고 시장과 구독자(독자) 시장의 확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추진된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과로 제조업 등이 발전하면서 내수 시장이 형성되었고 광고 시장의 규모도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수요를 넘어서 과잉 생산한 소비재를 보유한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 창출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광고 시장은 더욱 커졌다. 1970년에 일간지의 발행 부수가 주당 36면에서 48면으로 증면된 것은 광고 시장의 확대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1950년대 20∼30%에 불과하던 광고 수입 비중이 1960년대에 들어서 급속하게 늘어나서 1968년에는 41%에 이르렀고 1970년에는 거의 50%에 도달하였다. 1960대에는 신문과 주요 경쟁 관계인 전파 미디어의 보급 수준이 낮아서 성장하는 광고 시장을 신문이 우선 안정적으로 점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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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창간
『중앙일보』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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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등에서 등장하였던 대중 신문의 시대, 진정한 대중 매체의 시대가 한국 사회에서도 열렸다. 따라서 대중 사회, 대중 문화, 대중 매체의 징후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농촌 해체와 도시화는 사실상 대중 매체의 소비자 시장인 대도시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문 독자 시장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신문의 총발행 부수는 1961년 74만 부에서 1967년 150만 부로 확장되었다.55) 강준만, 앞의 책, p.436.

주목할 만한 사실은 상업신문을 표방한 일간지의 등장이다. 물론 1950년대에도 상업신문을 주창한 『한국일보』가 있었지만 내용이 1960년대의 상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965년에 상업주의를 표방한 『신아일보(新亞日報)』와 삼성 재벌을 배경으로 한 『중앙일보(中央日報)』가 등장하였다. 『중앙일보』의 등장은 1950년대의 『한국일보』에 이어서 미디어 복합 기업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중앙일보』는 1967년 당시 국내에 있는 초고속 윤전기 여덟 대 중 다섯 대를 보유할 정도로 자산 및 자본 규모가 압도적이었고 무가지(無價紙)가 발행 부수의 27%를 차지할 정도였다. 엄청난 무가지와 경품을 무기로 신문을 판촉하여 신문 시장의 질서를 마비시켰으며 독단적인 증면을 시도하기 도 하였다. 그 결과로 1963년에서 1967년 사이 신문 발행 부수는 약 2배가 늘어났으나 자본 규모는 7.7배가 증가하여 『중앙일보』의 공격적인 투자가 전체 신문 산업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56) 주동황 외, 앞의 책, p.98.

신문은 시설 투자로 확대된 인쇄 시설과 취재망, 판매망 등을 활용한 경영 다각화에 나섰다. 주요 신문이 잡지 발행에 주력하였다. 1964년 창간된 『주간 한국』을 비롯하여 『주간 중앙』, 『선데이 서울』, 『주간 조선』, 『주간 경향』이 창간되었다. 이들 주간 잡지는 『주간 한국』의 성공에 자극받아 창간되었는데, 당시 신문사 발행 주간 잡지의 발행 부수는 모 신문의 발행 부수를 훨씬 능가하였다. 특히 1968년에 창간된 『서울신문』의 『선데이 서울』은 선정적인 대중 주간 잡지로 황색 저널리즘을 드러내며 높은 인기를 누렸고, 판매 수입은 『서울신문』의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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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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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중 주간 잡지의 성공은 196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대중’이라 부를 수 있는 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대중 주간 잡지 독자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증면이 억제되어 새로운 광고 수입을 창출하기 어려웠던 당시 신문에게는 새로운 수입원이 되었는데, 이러한 신문의 상업주의적 동기와 국민에 대한 권력의 탈정치화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볼 수도 있다.57) 강준만, 앞의 책, pp.429∼430.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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