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1장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광고
  • 6. 1970년대의 언론과 광고
  • 자유 언론 실천 운동과 광고 탄압
이용성

신문 기업들은 유신 체제의 억압적 현실에 침묵하였다. 그동안 견지하고 있던 비판적 언론으로서의 위상은 이제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비판적 논조뿐 아니라 사실 보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1973년 대학가 시위 관련 뉴스가 신문에 거의 보도되지 않는 등 신문의 정론적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사실 보도 기능조차 추락하자 언론의 변질에 대한 대학가 등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64) 이미 1969년부터 대학가에서는 신문기업의 주간 대중잡지의 선정성을 비판하고 권력의 시녀가 되어 가는 언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바 있었다(강준만, 앞의 책, pp.43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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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광고 탄압
『동아일보』 광고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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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에 분노를 느낀 언론인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974년 3월에는 동아일보사 노조가, 12월에는 한국일보사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에서는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금지, 불법 연행 거부 등을 요구하는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언론계에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이 확산되자 유신 체제는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하는 광고 탄압을 자행하였다. 드디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하여 광고를 통제하는 방식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65) 박정희 정권은 1974년 3월에 방송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텔레비전 방송 시간을 규제한다. 이를 통해 신문의 광고 물량을 확보하여 신문산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문종대, 「1970년대 신문산업의 자본축적과정」, 김왕석·임동욱 편, 『한국 언론의 정치경제학』, 아침, 1990, pp.207∼208). 이러한 광고주 압박을 통한 광고 통제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언론 통제 방식으로, 신문 기업의 주된 수입원을 차단하여 경영을 어렵게 만들어 비판적 논조를 순화시키겠다는 의도였다.66) 임동욱, 『동아일보』 격려 광고의 사회적 의미」, 성유보 외,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갈거야!』, 말, 2002, p.30. 유신 체제의 이와 같은 광고 탄압에 맞서 독자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격려 광고를 통해 『동아일보』의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을 성원하였다. 그러나 언론사 사주들이 광고 통제에 굴복하면서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은 1975년 3월에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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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격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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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동아일보』가 유신 체제의 광고 통제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1971년부터 광고 수입이 지대 수입(신문 판매 수입)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제의 1974년에는 광고 수입의 비중이 56%에 이르렀다. 광고 탄압이 시작된 1974년 12월부터 끝난 1975년 7월까지 동아일보사 전체(동아 방송과 잡지 등의 광고 수입 포함)의 광고 수입 결손은 10억 원으로 추산될 정도이다. 이는 유신 체제의 광고 탄압에 의해 광고 해약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동아일보사가 한 달 동안 얻는 총광고 수입이 2억 4000만 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커다란 손실이라 할 수 있다.67) 주동황, 『동아일보』 광고 탄압 해제와 경영진의 변질」, 성유보 외, 앞의 책, pp.66∼67. 과거 광고 수입의 비중이 높지 않던 정론지 시대에는 광고 통제가 이렇게 영향을 크게 미치지 않았겠지만 광고 시장이 활성화된 1970년대에는 실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가 광고 통제를 무력화하고 신문 판매 수입만으로 경영하려면 판매 부수가 100만 부를 넘어야 가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의 실제 발행 부수는 70만 부 정도였다.68) 손석춘, 『언론개혁의 무기』, 개마고원, 1998, pp.20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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