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근대 이전 우리나라의 광고
성주현

광고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이건 대개 간판(看板)에서 시작되었다. 간판은 대체로 시장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기록상 시장이 처음 열린 것은 삼한 시대이다. 즉 변한은 당시 철(鐵)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한인(韓人)·예인(濊人)·왜인(倭人)이 와서 사 가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는 기록상 나타나는 시장이지만 일상적으로 생활필수품을 서로 교환하는 시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좀 더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490년(소지왕 12)에는 경주에 도시적인 시전(市廛)인 경시(京市)를 설치하였고, 이후 509년(지증왕 10)에는 동시(東市)를 설치하였으며,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하여 각기 시전(市典)이라는 관리를 두어 시장을 감독하게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모두 부녀들이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성들을 중심으로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하였다면 적어도 고객에게 팔아야 할 물품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시장에서 간판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처럼 활발하게 거래된 시장에서 간판은 매우 유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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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전경(松都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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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간판에 관한 기록은 1123년(인종 1)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왕성에는 원래 시장이 없다. 다만 광화문에서 부(府) 및 관(館)에 이르는 길에 장랑(長廊)을 만들어 민가(民家)를 가렸을 따름이다. 마침 장랑 사이에는 방문(坊門)을 내걸었는데,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遜)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여 저잣거리에 간판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에는 간판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건의한 사례가 있다. 1394년(태조 3) 시장을 감리 감독하는 경시서(京市署)에서 각 시장에서는 시장의 이름을 판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아래에 아울러 그려서 각 처소에 걸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1429년(세종 11)에 통신사(通信使)로 일 본에서 1년 동안 지내다 귀국한 박서생(朴瑞生)은 일본의 시가(市街)를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일본 상가(商街)의 제도는 시장 상인들이 각기 처마 아래에다 널빤지로 층루(層樓)를 만들고 물건들을 그 위에 두니,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이를 보고 살 수 있었으며, 시중(市中)의 음식물들을 귀천(貴賤)의 구별 없이 모두 사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장은 건습(乾濕)할 것 없이 모든 어육(魚肉) 등의 식물(食物)들을 모두 진토(塵土) 위에 두고는 혹은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하오니, 비옵건대 운종가(雲從街) 좌우의 행랑(行廊)에서부터 동쪽 누문(樓門)에 이르기까지, 종루(鐘樓) 남쪽에서부터 광통교(廣通橋)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첨(補添)을 달아내고, 그 아래에 물건들을 진열해 놓을 층루를 만들어, 어느 칸(間)은 무슨 물건을 둔 곳이라고 죽 편액(扁額)을 달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소서.94) 『세종실록』 권46, 세종 11년 12월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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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포전기(苧布廛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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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근대 이전에 단편적으로나마 광고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광고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상품을 사고파는 현장에서 어떤 형태이든 상업적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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