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간판을 통해 본 광고의 의미
성주현

간판은 판매와 광고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로 상점 위에 매달거나 앞에 놓아두는 장치, 또는 회사나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두는 시설물을 뜻한다. 이것으로 상점 소유주의 신원이나 사업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 인과 그리스 인뿐만 아니라 로마 인도 광고를 하기 위해 간판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적당한 광고 문안을 표시하기 위해 벽에 하얀 도료를 칠한 게시판을 만들어 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글자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사꾼은 장사 내용을 알리기 위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상징적인 도안을 고안하였고 여기에서 상점 간판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시대의 간판은 많이 보존되어 있으며, 포도주 상회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선술집 앞에 놓아둔 것으로 유명한 담쟁이 가지 간판도 이 시대에 나왔다. 로마 시대 선술집 간판의 담쟁이 가지, 전당포 간판으로 쓰인 세 개의 금빛 공, 이발소의 빨간색·흰색 줄무늬(이것은 각각 피와 붕대를 나타내는데, 이발사들이 한때 의사 노릇을 했던 사실에서 유래함) 같은 간판은 일찍부터 특정한 업종을 말해 주는 간판으로 사용되었다. 간판과 장사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점 경영자는 문장(紋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경우에 문장을 그린 간판을 내걸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간판공이 고안한 가장 인상적인 그림 도안을 간판으로 삼았다.

간판을 표현하는 말인 ‘사인(sign)’은 아주 늦게야 영어에 도입되어 1225년까지는 몸짓이나 동작을 의미하였고, 13세기 말까지는 깃발 또는 방패에 그린 십자표시나 그 밖의 모든 도안을 뜻하였다. 1390년대에 이미 영국 상인은 자신의 상업을 표현하기 위해 고유한 간판을 달아야 했고, 100년 후 파리와 런던에서는 여행자의 편의를 위한 여인숙 간판을 제외하고는 간판을 상점 바깥 기둥에 흔들거리게 매달아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건물 정면에 바싹 붙여 달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런 규제로 상점이나 집을 표시하는 간판은 인기가 낮아 보급률이 떨어지고, 그 후로는 도로를 따라 건물에 차례로 번호를 붙이는 방법이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1512년에 일부 지역에서 건물에 번호를 매기는 방법을 썼지만, 18세기까지는 이러한 방법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말에는 이것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쓰였고, 오래지 않아 프랑스에서는 의무 규정이 되었다.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Gascogne)와 스페인의 바스크(Basque) 지방에는 집 문 위에 소유자의 이름(또는 건축 연대)을 적은 문패를 다는 전통이 근대까지 남아 있었다.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곧이어 인쇄된 전단·유인물·광고지·포스터 등이 벽과 담장, 심지어는 사람이 들고 다니는 게시판에 부착되어 상품과 서비스, 사형 집행 및 배가 드나드는 것 등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전단을 붙일 자리 싸움이 심해지고 수많은 벽에 “광고 전단을 붙이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나붙었다. 따라서 광고 전단을 붙일 자리가 절실히 필요한 기업가들은 게시판을 만들어 사유지에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사들였다.

19세기 말에 실용적인 발전기가 등장하면서 상점 간판과 게시판에 조명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1910년경 프랑스 과학자 조르주 클로드(Georges Claude)는 네온등(neon燈)을 비롯한 기체를 채운 조명 장치를 만드는 실험을 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아 구부릴 수 있는 유리관으로 간판을 만들게 되었다. 글자와 도안을 나타내기 위해 구부린 이 유리관 안에는 전류를 받으면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등으로 빛을 내는 기체가 들어 있었다.

조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정부 규제는 점점 심해져서, 한때 여인숙(旅人宿)을 제외한 모든 가게에 간판을 달지 못하게 했듯이, 20세기 중반까지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조명 장치를 단 간판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간판이 주거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간판 디자이너들은 거의 발전이 없던 전기 간판 제작에 활기를 불어넣는 다양한 기술을 도입하여 고속도로와 항공로 분야로 진출하였다. 시내 건물 옥상에 장치된 전자식 게시판에는 큰 표제나 광고 문안이 등장하였다. 전기를 이용한 간판이 주요 상업 지역을 누비게 되자 세계의 모든 도시는 밤이 되면 하늘을 배경으로 야경(夜景)이 크게 달라졌다.

한편 광고물은 아니지만 금표(禁標) 등의 비석(碑石), 벽보(壁報), 방문(榜文), 간판 등은 광고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영조 때 세운 강화읍 갑곶리의 금표 앞면에는 “짐승을 놓아 둔 자는 곤장 100대,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라고95) 심인섭·서범석, 『한국광고사』, 나남출판, 2005. 하여 일정한 행위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한계령에도 “산 도둑이 들끓어 해가 지면 이 고개를 넘지 마라.”는 뜻으로 고개의 길목인 양양군 서면 오가리의 길옆 바위에 금표라고 새겨 두었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斥和碑)도 일종의 광고물이라 할 수 있다. 척화비의 전면에는 “서양 오랑캐(洋夷)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和親)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이, 측면에는 “우리들이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1990. 글이 각각 새겨져 있다. 즉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쇄국 정책(鎖國政策)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것은 공공성의 광고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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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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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보 역시 ‘여러 사람에게 알리려고 종이에 써서 벽이나 게시판 등에 붙이는 글’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일종의 광고물로 인식할 수 있다. 벽보는 일반 민중이 많이 활용하던 홍보 수단의 하나였는데, 조선 후기에 동학교도(東學敎徒)들이 이를 활용한 바 있다. 평등사상과 반외세 사상,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개벽(開闢) 사상을 내포한 동학은 경주에서 시작되어 경상도·강원도·충청도를 거쳐 1890년대 말 전라도에 전파되었다. 탄압과 수탈, 그리고 소외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해 온 민중들은 앞을 다투어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었다. 1892년 11월에 삼례 집회(參禮集會)를 가졌고 1893년 2월의 광화문 앞 집회와 함께 있었던 왜(倭)와 양(洋)을 배척하는 ‘벽보 사건’, 그리고 수만 명이 참여한 1893년 3월의 보은 척왜양창의 운동(斥倭洋倡義運動)에서는 동학의 정당성을 알리는 벽보를 성문에 붙이는 등 벽보를 투쟁의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벽보와 동일한 성격을 지니는 광고물이 방문(榜文)이기도 하였다. 방문은 여러 사람에게 어떤 사항을 알리기 위하여 길거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로 ‘방(榜)’이라고도 한다. 이 방문은 일찍부터 관료나 군민(軍民)에 대한 전달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민간인도 방문의 형식을 이용하여 정치를 비방하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간간히 보이고 있는 대자보(大字報)도 이러한 형식을 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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