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광고’라는 용어의 등장
성주현

우리나라에 ‘광고’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은 근대 신문의 창간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이어 1880년대에는 미국·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서구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수교하였다. 이들 국가와의 수교는 우리나라에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전환기를 가져왔다. 1880년대 초에는 일본 상인 외에도 독일계의 세창 양행(世昌洋行, Edward Meyer), 영국의 이화 양행(怡和洋行, Jardine Matheson)·광창 양행(廣昌洋行, Bennent & Co.)·함릉가 양행(咸陵加洋行, Homele Ringer & Co.), 미국의 타운선 양행(陀雲仙洋行, Townsend & Co.) 등이 인천항에 진출하였다.97) 조기준, 『한국 자본주의 성립사론』, 대왕사, 1977, pp.277∼279. 우리나라에 진출한 이 회사들이 영업을 시작함에 따라 외국 상품의 수입이 점차 증가하였고,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철도, 도로, 전기, 통신이 새롭게 보급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교육 기관인 학교가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근대 문물의 수용 및 보급은 언론계에도 파급되어 근대 신문 이 창간되었다. 우리나라 근대 신문의 효시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이다. 일반적으로 신문의 주요한 수입원은 광고였지만 『한성순보』는 정부 기관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된 관계로 광고가 실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광고의 필요성은 나름대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순보』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로 이어졌다. 이후 『독립신문(獨立新聞)』·『매일신문(每日新聞)』·『황성신문(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 민간 신문이 창간되면서 광고가 신문의 주요 지면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광고’라는 용어는 『한성순보』 제3호에 소개된 회사설(會社說)이라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기사는 ‘회사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第一款 議 刱設會社者 廣告主旨於世人 求其同志(처음으로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주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광고하여 동지를 얻는다).98) 「회사설(會社說)」, 『한성순보』 1883년 11월 20일자.

이 기사는 이어서 “회사를 조직할 때에는 자본의 총액과 이식의 과다를 통틀어 계획하여 신문에 발표해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 회사의 유익함을 알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직접 상품을 판매할 목적으로 하는 광고는 아니지만 회사의 설립을 널리 일반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있다. 이는 개항 이후 우리나라 사회가 초보적 수준의 자본주의를 이식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성순보』에 이어 발행된 『한성주보』는 광고를 직접 게재함으로써 광고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있다. 즉 『한성주보』는 1886년 1월 25일 첫 발행을 하면서 본국공고(本局公告)를 통해 광고 매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것을 밝히고 있다.

농(農)·공(工)·상(商)과 기타 모든 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업(業)을 광고(廣告)하고자 하면 오셔서 국원(局員)에게 자문하십시오. 그러면 상세히 기재하여 본보를 구독하는 내외의 사상(士商)에게 알리겠습니다.99) 『한성주보』 1886년 1월 25일자.

이 글에 직접 돈을 내고 신문에 상품이나 기타 농·상·공과 관련된 활동에 대해 광고하라는 내용은 없지만 신문이 유용한 광고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1886년 8월 16일자의 신보론(新報論)이라는 글에서는 일본의 관보(官報)를 소개하고 있지만, 광고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간섭을 적지 않게 받았던 조선의 처지에서 본다면 광고 역시 일본 광고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 광고가 등장한 것은 우리나라보다 그리 빠르지 않았다. 일본의 광고도 신문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에서 일본인이 발행한 첫 신문은 요코하마의 『요코하마매일신문(橫濱每日新聞)』 1871년 1월 28일자였다. 이 신문의 창간호에는 적지 않은 광고가 게재되었으며, 대부분의 ‘광고’보다는 ‘보고(報告)’·‘품고(稟告)’·‘고지(告知)’·‘고백(告白)’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이보다 앞선 1867년 외국인이 요코하마에서 창간한 일본어 신문인 『만국신문지(萬國新聞紙)』였으며, ‘광고’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872년 4월 14일에 발행한 『요코하마매일신문』에서였다.100) 신인섭, 『일본의 광고―그 과거와 현재』, 나남출판, 1993, pp.20∼21.

그렇지만 ‘광고’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전까지는 ‘고백’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이기도 하였다. 『한성주보』에 첫 광고를 게재한 세창 양행도 ‘광고’가 아닌 ‘고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세창 양행뿐만 아니라 당시 광고의 대부분에서 나타난다.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것을 털어 놓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고백은 ‘알림’이라는 뜻으로도 쓰던 한자어인데, ‘광고’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전 언어적 혼란에서 오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광고’라는 용어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면 ‘고백’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1870년대 중반까지 ‘광고’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각행고백(各行告白)’·‘각화행정(各貨行情)’·‘항선일기(航船日期)’·‘은행사면(銀行四面)’ 등의 표현을 광고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는 1873∼1874년에 한커우(漢口), 홍콩(香港),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발행되던 『순환일보(循環日報)』, 『강호소문신보(江湖昭文新報)』 등에서 이러한 용어가 광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창 양행은 이미 중국에 진출해 있었으므로 한문을 쓰는 중국의 관례에 따라 순한문 광고와 ‘고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101) 신인섭, 앞의 책,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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