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독일 상사 세창 양행의 첫 광고
성주현

이처럼 광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던 『한성주보』가 첫 광고를 게재한 것은 1886년 2월 22일 발행한 제4호였다. 그리고 이 광고의 주인공은 1880년대에 우리나라에 진출한 독일계 회사 세창 양행이었다. 광고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상사 세창 양행 고백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 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담비, 흰담비, 소, 말,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인발(人髮), 소, 말, 돼지의 갈기털, 꼬리, 뿔,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손님과 상점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은 그 수량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분은 저희 세창 양행에 와서 공평하게 교역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하여 알립니다.

사들이는 여러 가지 물품 : 쇠가죽, 말가죽, 개가죽, 호랑이가죽, 검은담 비가죽, 수달피가죽, 흰담비가죽, 말꼬리, 쇠꼬리, 말갈기털, 쇠뿔, 돼지갈기털, 인발, 종이, 오배자, 호랑이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옛 동전.

알릴 것은 이번 독일 상사 세창 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들여다보는 풍경(洋景, peep show), 뮤직박스(八音考), 호박(琥珀),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단추, 각색 서양 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과 선명한 안료,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맞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모든 손님과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소매상이든 도매상이든 시세에 따라 교역할 것입니다.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희 세창 양행의 상표를 확인하시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새로 들어온 여러 가지 물품 : 서양 천, 각색 염료, 서양 주머니, 녹색 염료, 표백한 서양 천, 갖가지 서양 단추, 표백한 주머니, 호박, 두꺼운 옥양목, 서양 허리띠, 서양 쪽빗, 시계, 면으로 된 고은 천, 램프, 서양 무명천, 들여다보는 풍경, 낙타천, 유리, 서양 실, 성냥, 서양 바늘, 뮤직박스.102) 『한성주보』 1886년 6월 28일자.

그런데 세창 양행의 이 광고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광고를 한 사례가 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1881년 12월 10일자 『조선신보(朝鮮新報)』의 천금단(千金丹) 약품 광고였다. 이 밖에도 상품 거래를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정진대취차소(正眞大取次所)의 광고도 수차례 게재되었다. 『조선신보』는 부산의 개항장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이 조직한 상법 회의소(商法會議所)가 1881년 11월 17일(음) 순간(旬刊)으로 창간한 우리나라의 첫 신문이었다. 하지만 이 신문의 발행 주체가 일본인인 데다가 일본어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은 광고사(廣告史)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즉 『한성주보』 제4호에 광고를 한 세창 양행의 광고가 첫 광고로 인정받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세창 양행의 광고는 비록 우리나라 신문에 실렸지만 외국 회사가 낸 최초의 광고이므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근대 광고의 기점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103) 김봉철, 「구한말 ‘세창양행’ 광고의 경제·문화사적 의미」, 『광고학연구』 13-5, 2002, p.118 주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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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양행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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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양행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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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양행은 이후 1886년 7월 2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 동안 모두 일곱 번의 광고를 게재하였다. 세창 양행은 첫 광고에 이어 “희화상선이 각 항구를 왕래한다(希化商船來往各口).”라는 광고를 추가로 게재하기도 하였다. 광고의 내용은 세창 양행이 희화상선을 고용하여 상하이와 인천 사이의 각 항구를 내왕한다는 것인데, 선편의 운임을 적당하게 받고 승선한 여객에게는 특별히 봉사하겠다는 것이다.104) 『한성주보』 1886년 5월 24일자. 세창 양행은 상하이와 인천 사이 의 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하고 인천과 상하이를 왕래할 상인이나 여객을 유치하기 위해 광고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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