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일본인과 중국인의 광고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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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 상점의 광고
하마다 상점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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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양행에 이은 두 번째 광고는 1886년 6월 28일자에 실린 일본 상인의 광고였다. 이날 신문에는 두 개의 광고가 게재되었는데, 하나는 염색약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옷감과 곡물을 판매하는 가게 광고였다. 염색약 제조법 광고는 “감색비색 기타각색 염액제조 급 염양법 전수 광고(紺色緋色其他各色染液製造及染揚法傳授廣告)”라는 긴 제목으로106) 『한성주보』 1886년 6월 28일자.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야마자키 가츠지로(山崎勝次郞)라는 사람이 염색법을 깊이 연구하여 이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데 이를 배우면 생계를 삼을 수도 있으며, 보라색·꽃색 등 여러 가지 색 제조법을 배우려면 지화(紙貨) 2원을 보내야 하고, 붉은 비단색·매화색·복숭아색 등의 여러 색을 배울 사람은 1원 50전을 보내면 자세한 제조법을 기록해서 보내 준다는 내용이다. 만일 염색법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보낸 금액을 도로 환불하겠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같은 호에 실린 또 다른 광고는 하마다 상점(濱田商店)의 광고로 인천에 본점을 두고 부산과 원산에는 지점이 있었는데 양목(洋木)·양사(洋絲)·양단(洋緞) 등의 섬유류, 성적분(成赤粉, 혼인날 신부가 얼굴에 바르는 분), 쌀·조 등의 곡물류를 도매 또는 산매한다는 내용을 실었다.107) 『한성주보』 1886년 6월 28일자. 그리고 이 광고는 “이 상점이 조선의 세 항구, 즉 인천항·부산항·원산항에 개점한 이래 점차로 흥왕(興旺)하는 것은 조선의 부인네들이 자 주 돌아보아 주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이 광고에서는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광고의 문안이 국한문 혼용이며 문장이 평이할 뿐 아니라 내용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광고’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처음으로 광고를 실은 세창 양행과 제23호부터 광고를 게재한 동수관(同壽舘)이 ‘광고’라는 용어 대신 ‘고백’으로 쓴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광고’라는 용어가 정착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상인들의 광고는 제22호에 한 번만 실리고 말았는지 아니면 그 앞에도 몇 번 실렸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한성주보』 제19호, 제20호, 제21호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두 광고에 이어 『한성주보』에 실린 광고는 동수관이라는 약국의 광고였다.108) 『한성주보』 1886년 7월 5일자. 이 광고는 당시 콜레라가 만연하여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낸 광고이다. 광고주는 북해산인(北海散人)인데, 조선인이거나 아니면 중국 출신의 의원(醫員)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광고주가 조선인이었다면 우리나라 사람이 낸 최초의 광고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 광고는 비록 한문으로 되어 있지만 광고의 목적인 이익 창출이 아니라 콜레라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고 구제하려는 뜻을 알리고자 하였다. 우선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몸을 청결하게 하고, 거처를 깨끗이 하며, 날 것과 찬 음식을 먹지 말고, 과로하지 말도록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혹 이미 병에 걸렸다면 약을 먹도록 권유하면서 약의 상세한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콜레라의 창궐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는데, 이 동수관 광고 직후 『한성주보』를 제작하는 박문국에서도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이 적지 않아 40일 동안 신문 제작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표 ‘『한성주보』 게재 광고’는 당시 실린 광고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한편 중국인의 첫 광고는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 게재되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우리나라에서 편집되고 인쇄된 첫 영어 잡지로, 선교사들의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알아야 했던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당시 정세 등을 주로 다루었다. 1892년 1월부터 발행된 이 잡지는 1893년과 1894년에는 휴간하였다가 1895년 1월에 속간하였다. 이때는 『독립신문』이 창간되기 한 해 전이었고 일본인들이 격일간으로 『한성신보(漢城新報)』를 창간할 무렵이었다. 이 잡지의 기사는 모두 영문이었으나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 Shanghai, China) 광고만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로 되어 있다.

<표> 『한성주보』 게재 광고
호수 게재 일자 게재면 광고 제목 비고
4 1886. 2. 22 15, 16면 德商 世昌洋行 告白 순한문
6 1886. 3. 8 16면 위와 같음 순한문
17 1886. 5. 24 16, 17면 위와 같음 순한문
17면 希化商船來往各口(세창 양행) 순한문
18 1886. 5. 31 16, 17면 위와 같음 순한문
22 1886. 6. 28 14, 15면 紺色緋色 其他各色 染液製造 及 染揚法 傳授 廣告 국한문
15면 日商 廣告 국한문
16, 17면 德商 世昌洋行 告白 순한문
23 1886. 7. 5 15면 同壽館 告白 순한문
16, 17면 德商 世昌洋行 告白 순한문
24 1886. 8. 16 16면 同壽館 告白 순한문
미상 1886. 3∼5   德商 世昌洋行 告白 순한문

중서서원은 미국 남감리교(南監理敎)가 상하이에서 경영하던 학교인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윤치호(尹致昊)·양주삼(梁柱三) 등이 유학하였다. 윤치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후 돌아와 교사로 활동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중서서원의 광고에는 ‘부비(浮費)’라 하여 한문과 영어를 종일 배우는 경우와 영어만 배우는 경우의 등록금을 비롯해서 찻값, 방세, 식대 에다 하인 삯까지 상세히 나열되어 있어 중서서원의 운영 형태를 짐작케 한다. 이 영문 잡지에는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을 상대로 몇 가지 상품 광고가 실려 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독립신문』 창간호에 광고를 게재하였으며, 『독립신문』 창간 초기 주요한 광고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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