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대한매일신보』와 국채 보상 광고
성주현

신문은 정보 전달 매체로서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기업(私企業)처럼 이윤 추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신문사가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한다면 이 또한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신문사는 기본적으로 구독 수입으로 경영을 해야 하지만 이는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에 신문사는 구독 수입 외에 광고 수입을 통해 경영의 합리화를 추 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를 알아보자. 당시 신문사의 광고료 계산 단위는 ‘1단 1행’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영국인 배설(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식인 인치(inch)를 사용하였다. 1904년 7월 창간 당시 광고료에 대해서는 영문판에 “1일 1인치 또는 1인치 이하 50전(錢), 1개월간 매일 1인치 5원(圓), 1년간 매일 1인치 50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복간한 1905년 8월에는 “1일 1인치 25전(錢, 新貨), 2주일 2원(圓) 50전, 1개월 5원”으로 조정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었던 시기는 일본을 비롯한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운(國運)이 점차 기울고 있었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 유입으로 경제적 식민지화가 가속될 수밖에 없었다. 유입된 상품들은 신문사의 광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개화기에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일본은 먼저 경제적 지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1905년 1월부터 일본 화폐가 무제한으로 국내에 유통됨에 따라 우리나라 경제는 점차 일본에 종속되어 갔다. 1907년에는 일본에서 빌린 돈 1,300만 원마저 갚을 능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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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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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 취지서를 가장 먼저 게재한 『대한매일신보』는 기사뿐만 아니라 기고, 논설 등을 통해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였고, 국채 보상 의연금을 광고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 의연금 광고는 초기에는 3면 잡보에 이어 실렸으나 점차 의연자(義捐者)가 많아짐에 따라 4면으로 확대하였으며, 광고를 게재하지 못할 때에는 부록으로 의연금 명단을 밝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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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보상 의연금 광고
국채 보상 의연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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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연금 관리에 허점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7월 13일부터 ‘국채 보상 의연금 하신 제씨(諸氏)에게 경고(敬告)함’이라는 광고를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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