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수난당하는 광고
성주현

광고는 그 시대의 생활상과 경제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영향도 예민하게 받았다. 『제국신문』은 1906년 초부터 한동안 1면을 광고로만 채운 적이 있었다. 신문 1면 전체를 광고로 채우는 편집 방식은 당시 서양 신문에서는 많았고, 우리나라도 『독립신문』 영문판과 『코리아 데이리 뉴스(Korea Daily News)』에서는 1면 머리에 광고를 넣은 경우가 있었으나 우리말 신문에서는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신문』이 1면 전체를 광고로 채웠던 것은 주한 일본 통감부의 검열 때문이었다.

『제국신문』 1906년 4월 25일자 논설에 의하면 1면 기사를 일본 당국의 검열을 받은 뒤 삭제당한 부분을 빼고 인쇄를 시작하려면 인력과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아예 1면을 모두 광고로 채워서 논설과 기사 등의 검열을 받는 동안에는 광고 면인 1면을 인쇄하고 검열을 받아 온 기사는 나중에 인쇄하였기 때문이다. 이 무렵은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뒤 『황성신문』이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필화 사건으로 정간(停刊)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언론에 대한 일본 당국의 검열이 혹심하였다. 그러나 신문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면 전체를 광고로만 메우는 것은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결국 1면에는 다시 논설과 기사를 싣게 되었다.

1907년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3월경부터는 각 신문이 국채 보상 의연금을 낸 사람의 명단을 광고란에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그 명단이 너무 많아서 광고란에 전부 게재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부록을 발행하여 명단을 실을 때도 있었다. 이것도 시대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일제의 강점을 앞두고 일제의 언론 탄압이 가중되자 광고도 수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갑자기 정간 처분을 당한 신문이 독자들에게 정간당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른 신문의 광고란을 이용하는 경우도 없 지 않았다. 『대한민보(大韓民報)』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 강점을 며칠 앞둔 1910년 8월 18일자 『대한민보』는 ‘치안 방해’라 하여 압수뿐만 아니라 정간되었다.124) 『황성신문』 1910년 8월 19일자. 이에 대한민보사는 『황성신문』 1910년 8월 19일자부터 21일자까지 3일 동안 정간 사실을 광고로 알렸다.

특고(特告)

어제 발행한 본보 제353호는 경무 총감부에서 치안의 방해로 인하여 발매 반포를 금지하며 그 발행 정지를 명하였으므로 애독 제군에게 공람치 못한 사유를 앙포함.

융희 4년 8월 19일

대한민보사

그런데 같은 언론사인 『대한매일신보』는 똑같은 사례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민보』보다 하루 전인 8월 17일자 신문이 ‘치안을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압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정간당하였다.125) 『황성신문』 1910년 8월 18일자.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어느 신문에도 광고를 내어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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