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2. 일제 강점기 광고와 식민주의
  • 국산품 애용과 광고 규제
성주현

한말부터 큰 광고주였던 이응선의 화평당 약방과 이경봉의 제생당 약방은 일제하에서도 활발한 광고 활동을 벌였다. 오늘날까지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동화 약품(同和藥品)은 한말 『대한매일신보』에서부터 부채표를 로고로 내세운 광고를 하다가 1912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는 신년 축하 전면 광고를 실었으며, 이듬해 1월 1일자에도 부채표를 크게 부각시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동화 약방은 익장환, 활명수, 청심원과 같은 여러 종류의 의약품을 광고하였다. 1920년대부터는 천일 약방(天一藥房)의 종기 치료제 조고약(趙膏藥) 광고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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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 광고
활명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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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 병
활명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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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까지는 제생당 약방의 청심보명단이나 화평당 약방의 팔보단과 같은 우리나라 광고가 있었지만 1920년대와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나라 광고는 일본 광고의 세련된 디자인과 강력한 카피, 압도적인 물량 공세에 거의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오늘날의 신토불이(身土不二)에 해당하는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카피도 종종 발견된다. 일제 강점 직전이었던 1910년 7월에는 “품질이 동일하면 외국산을 배척하고 우리나라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국민의 본령(本領)이 아닌가. 그러나 외국 상품을 사용치 아니하지 못할 경우에는 가격이 동일하다면 동포 상점에서 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의가 아닌가.”라는 말로 국산품 애용과 국내 기업 육성을 주장한 내용의 광고가 『황성신문』에 실려 있다.

1923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 방직 주식회사의 삼성표와 삼각산표 광목은 “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씁시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작용과 기술로 된 광목”이라는 카피를 썼다. 이 무렵은 국산품 애용을 권장하는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났던 때였다. 192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 물산 장려를 위하여 안성맞침유기(安城鍮器)를 쓰시오.”라는 광고가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경성 방직은 1933년 4월 9일자 『동아일보』에도 국산품 애용을 담 고 있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태극성광목이라는 상품을 광고하면서 “우리의 옷감, 우리의 자랑”과 “틀림없는 품질은 외품(外品)을 단연 능가! 그리고 매행(賣行)의 대격증. 아 당당한 우리의 제품 …… 우리의 자랑거리며 가장 좋은 우리의 옷감”이라는 카피를 사용하여 조선의 긍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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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성광목 광고
태극성광목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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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산품 애용을 주장한 광고는 일제 강점기에 언제든 탄압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1928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중외일보』에 실렸던 동양 염직소(東洋染織所)의 광고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동양 염직소는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에 “우리 국산(國産) 동포의차(同胞衣次), 이천만 민중의 무비복음(無比福音)”이라는 카피로 국산품 애용을 담은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 후 『중외일보』 10월 24일자에 실린 동양 염직소의 광고 카피는 “우리 2천 3백만 동포는 우리의 앞길을 생각하시고 좌의 물품(동양저, 동양견, 해동목, 동양직)을 추장하옵소서.”라는 광고문을 실었다. 그러나 이틀 후인 26일자 신문의 ‘명저 상점과 명저 상품 : 흥일사의 해동저 동양목 우리의 옷감’이라는 기사 형식의 광고와 다음날인 27일자에는 “장구한 역사와 확실한 신용을 가진 본소의 제품은 전선 각지 포목상계와 각 가정에서 다대한 환영을 받았아오니 자작자급의 정신하에서 추장하며 애용하시기를 복 망하나이다.”라고 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줄 수 있는 ‘우리’ 또는 ‘동포’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있다. 즉 일제는 이 광고가 ‘우리 국산품’ 또는 ‘우리 동포의 옷’이라는 표현을 써서 일본을 외국으로 취급하고 조선을 독립 국가인양 인식하게 하였으므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부인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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