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2. 일제 강점기 광고와 식민주의
  • 아지노모도의 다양한 이미지 전략
성주현

음식을 먹을 때 맛을 돋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재료를 조미료(調味料)라고 한다. 그 중에 소금은 인류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오랫동안 생존을 위한 조미료의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금 못지않게 귀중하게 여겼다. 실제로 로마 시대에는 병사들에게 소금으로 급료를 지불하였다. 그래서 급료를 뜻하는 영어 샐러리(salary)의 어원은 소금(salt)으로 로마 병사들이 급료(salarium)를 소금으로 받은 것에서 연유하였다. 이 밖에도 식초 등 다양한 자연 조미료가 있는데, 인공 조미료가 탄생하면서부터 조미료는 큰 변화를 겪는다. 일본의 식품 공학자들은 다시마를 우려낸 물에서 감칠맛을 내는 성분이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 MSG)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1908년 ‘아지노모도(味の素)’라는 이름으로 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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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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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키쿠네(池田菊苗) 박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각종 국물을 연구하던 중 일본 음식의 기본이 되는 다시마에 함유된 글루탐산나트륨에 그 비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이케다 박사는 글루탐산나트륨을 인위적으로 추출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글루탐산은 아미노산의 일종인데, 나트륨 한 개와 만난 글루탐산나트륨은 다시마나 육류, 토마토 등에 자연 상태로 존재한다. 이것을 여러 복잡다단한 연구 끝에 이케다 박사가 발견하고 추출해 낸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글루탐산나트륨이 들어가면 묘하게 풍미(風味)가 좋아지는데 우리말로는 감칠맛이라고 할 수 있고, 일본말로는 ‘우마미(旨味, うまみ)’라고 하였다. 우마미는 글루탐산나트륨을 발견한 이후 당당히 쓴맛·단맛·신맛·짠맛·매운맛과 함께 6대 맛에 끼어들고 있다. 글루탐산나트륨의 공업 생산이 가능해지자 일본에서는 아지노모도사가 1년 뒤인 1908년에 같은 이름의 글루탐산나트륨 100%의 조미료를 팔기 시작하였다.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이케다 박사와 아지노모도사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고, 아지노모도는 조선으로 건너와 음식을 만드는 데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조미료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지노모도는 우리나라에 진출한 이후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광고를 한 제품의 하나였다. 그러면 아지노모도가 어떠한 광고를 통해 조미료의 대명사로 인식되었을까?

당시 광고는 대부분 동일한 카피나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반복 사용하여 제품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아지노모도 광고는 늘 새로운 카피를 활용함으로써 신선함과 누구나가 음식을 만들 때 반드시 아지노모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아지노모도는 흰 색 가루로 처음 등장하였을 때는 맛을 내는 양념으로의 역할에 반신반의하였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아지노모도사는 “소맥(小麥)을 원료(原料)로 하여 교묘(巧妙)한 기계력(機械力)과 미묘(微妙)한 화학력(化學力)으로써 정제(精製)한 미려(美麗)한 순백(純白)의 분말(粉末)이니 용이(容易)히 냉수(冷水) 또는 탕(湯)에 용해(溶解)하며 미미(美味)이고 자양(滋養)에 부(富)하며 경편(輕便)하고 중보무비(重寶無比)!!”라는 카피로 소비자를 유혹하였다.131) 『매일신보』 1915년 9월 15일자. 이어 아지노모도사는 광고를 통해 조미료라는 이미지 외에도 국산, 자양, 문명 그리고 경제적이라는 용어를 통해 소비자를 공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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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의 초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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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의 초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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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아지노모도 광고의 주요 전략이 상품에 대한 설명이었다면 1920년대에는 맛의 활용이었다. 즉 다양한 음식 재료와 아지노모도의 결합으로 새로운 맛을 창출하는 카피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광고의 기법도 점차 세련되어 만평(漫評)을 활용하여 소비자에게 이미지 전달을 각인시켰다. 광고 카피도 “요리(料理)에 비법(秘法)이 없다”, “미(味)의 가치(價値)”, “효력제일(效力第一)”, “마음대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조미(調味)”, “바다에 산에 여행(旅行)에 가지고 가십시오”, “안전제일의 요리법”, “아주 쉬운 이치” 등 간단명료하면서도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섰다. 그리고 광고량도 『동아일보』의 경우 1925년 3월에 여섯 건, 1928년 8월에 다섯 건으로 매월 평균 대여섯 개의 적지 않은 수량의 광고를 게재하였다.

1933년 4월과 5월 중 『매일신보』에는 아지노모도 광고가 20여 개나 실렸다. 그렇지만 이들 광고는 매번 다른 카피를 쓰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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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의 1920년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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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의 1920년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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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코 제일! 고급 요리에도 반찬에도 국에도 지짐이에도 초장에도 모든 음식에 아지노모도를 치십시요(『매일신보』 1933년 4월 4일자).-밥상 보고 있는 젊은 주부

자랑하는 솜씨를 가다듬어 참말 맛있게 한 맛(『매일신보』 1933년 4월 6일자).-생선 다듬는 주부

한참 자랄 때 한참 먹는다, 맛이 있게 먹고 잘 자란다(『매일신보』 1933년 4월 8일자).-밥 먹는 어린이

히히, 음식 맛있게 하려고 유명한 어멈도 역시 아지노모도(『매일신보』 1933년 4월 12일자).-음식 하는 여자

오호호 호, 아하하 하, 매일 웃고 지내자 아지노모도로 음식을 맛있게 하자(『매일신보』 1933년 4월 17일자).-젊은 부부

이러하신 분은 일시도 잊지 못할 것, 며느리 되시는 분, 음식 맡아 하시는 분, 특히 음식 영업하시는 분은 음식을 손쉽고 맛있게 하기 위하여 아지노모도를 치십시오(『매일신보』 1933년 4월 23일자).-치마 입은 젊은 여자

맛없다는 것은 옛말, 지금 세상에는 이것 한 병이면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구료(『매일신보』 1933년 4월 25일자).-갓 쓴 촌로

나는 자연미(自然味)의 소(素)를 지지(支持)하여 부동(不動)한다(『매일신보』 1933년 4월 29일자).-남자 요리사

비밀 발각, 남달리 맛있게 하는 음식 솜씨는 이것이 아니요, 하하하, 현대적이요 이상적이지요 호호 호호 하하 하하 아지노모도(『매일신보』 1933년 5월 9일자).-중년 부부

자신(自信)과 자랑으로써 이것을 사용의 일도(『매일신보』 1922년 5월 9일자).-남자 요리사

산보, 잎 피고 꽃 핀 봄, 하룻날의 향락, 잔디에 앉아서 아지노모도로 맛있게 한 음식을 유쾌히 먹습니다(『매일신보』 1933년 5월 11일자).-소풍가는 가족

음식맛 일등, 오늘도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같은 음식도 이렇게 틀리는 데야 아지노모도 아니 칠 수 있나(『매일신보』 1933년 5월 15일자).-중년 부부

음식은 간단히 맛있게 값싸게, 이렇게 하자면 결국 아지노모도 치는 것이다(『매일신보』 1933년 5월 19일자).-뚱뚱한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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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의 이미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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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모도의 이미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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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등장인물도 어린아이에서부터 젊은 부부, 중년 부부, 주부, 소풍가는 가족, 남자 요리사, 담뱃대를 문 촌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같은 시기에 발행된 『동아일보』에도 거의 같은 분량의 아지노모도 광고가 실렸다. 그렇다고 매번 동일한 광고를 게재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같은 광고라도 게재할 때마다 다양하게 한 것은 연속극과 마찬가지로 소비자에게 다음에 게재될 광고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였다. 그 결과 아지노모도는 소비자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고 조미료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적어도 1960년대에 미원(味元)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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