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3. 광고 매체의 변화
이병관

1883년에는 한국 근대 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가 창간되었으나, 광고 매체로 이용되지는 않았다. 1886년에 다시 나온 『한성주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광고가 실렸다. 비록 근대 광고가 『한성주보』를 통해서 시작되긴 하였지만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되지는 않았다. 광고를 정기적으로 게재하고, 수익을 올리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은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 이후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1896년 10월 3일자 영문면(英文面) 사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광고하기 원하는 분에게 지면이 부족해서 이 중요한 사항을 위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렇게 재정을 보충하지 않고서는 신문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144) 신인섭·서범석, 『한국광고사』, 나남출판, 1998.

하지만 『독립신문』의 기대와는 달리 전체 지면 중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0∼14%로 높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체 수입에서 광고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도 11% 정도에 불과하였다. 광고하는 상품이 주로 약품과 책이어서 광고 활동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독자들 중에는 광고와 기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공고가 아직 명확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897년 2월 4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자체 광고의 내용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경향의 여러 사람들은 자세히 보오. 신문에 물건 상관으로 광고하는 것은 어느 나라 신문이든지 공전을 받거니와, 그 외에도 신문에 낼 만한 말은 일 푼 오 리도 아니 받거늘 근일에 해주 백성이 동전 십 푼과 제주 백성이 동전 두 푼과 포천 백성이 두 푼을 편지 속에 넣어 자기 고을 일을 인연하여 신문에 내어 달라고 하였기로 신문사에서 내부 지방국으로 보내고, 그 고을로 내려 보내게 하였으니, 이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광고를 보고 다시 신문사로 편지할 때에 돈푼을 넣어서 보내지 않기를 바라노라. 너무 번거하여 이런 쓸데없는 일을 상관할 수가 없노라.145)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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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옥
『조선일보』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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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총독부가 1919년 3·1 운동으로 한일 병합(韓日倂合) 후 10년 동안 밀어붙인 무단 정치를 중단하고 문화 정치로 전환함에 따라 1920년 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는데, 당시에는 신문의 상업성이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두 신문사가 일제의 탄압과 억압으로부터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평화주의와 인본주의를 내세웠으며, 사시(社是)로 “①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으로 자임하노라, ②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는 세 가지를 밝혔다. 그 뒤에도 민족주의 진영에서 전개한 민족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물산 장려 운동·민립 대학 건립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당시 상황에 대해 김을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해방 전의 한국 신문은 그 옛날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는 말할 것도 없고, 1919년 3·1 독립 운동 이후에 탄생한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문이 이른바 상업 베이스의 신문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다는 숭고한 목적에서 발행된 것인 만큼, 신문의 경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또 무지하였다. 마차나 자전거의 두 바퀴 모양으로 신문사를 경영하자면 편집과 영업의 두 기관이 있어야 하고 영업에는 무엇보다도 광고가 필요한데, 우리나라 신문은 처음부터 광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신문의 경영자나 신문기자마저 이른바 ‘사회의 목탁’과 ‘무관의 제왕’을 자처하여, 좋은 논설과 좋은 기사를 쓰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신문 경영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가뜩이나 판매 부수와 광고가 적어서 경영이 곤란한 신문사가 더욱 더 해 나가기가 어려워질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146) 김을한, 『한국 신문사화』, 탐구당,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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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강좌 광고
광고 강좌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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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30년에 접어들면서 각 신문사는 조금씩 광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동아일보』는 1938년에 전국 상업학교 학생을 상대로 광고 콘테스트를 주최하였고, ‘매출을 증진하는 광고 쓰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조선일보』는 1932년에 14회에 걸쳐 ‘광고에 대한 일반 상식 해설’을 연재하였고, 1937년에는 ‘광고 강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신문사가 본격적으로 상업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일반인에게 광고가 무엇인지 알리고 관심을 유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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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수익 구성 변화
『동아일보』의 수익 구성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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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45년 광복 후 1969년에 이르는 25년 동안에는 정치·사회·경제의 변화 못지않게 대중 매체의 극심한 변동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광복, 6·25 전쟁, 휴전, 4·19 혁명, 민주당 집권, 5·16 군사 정변 등을 거치는 동안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정기 간행물은 광복 이후 숫자가 꾸준히 늘어나 정점을 이룬 민주당 집권 시기인 1961년 5월 1일에는 무려 1,567종이었다. 반면, 5·16 군사 정변 이후인 1961년 10월에는 343종으로 크게 줄 었다(표 ‘정기 간행물 등록 상황의 변화’ 참조). 이는 쿠데타 세력이 언론사를 얼마나 심하게 통제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통계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통제하기 편하도록 언론사의 수를 대폭 줄이고, 이를 무기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언론사를 통제하였던 것이다.

<표> 정기 간행물 등록 상황의 변화
간별
도별
일간 통신 주간 월간 기타
5·16
이전
5·16
이후
5·16
이전
5·16
이후
5·16
이전
5·16
이후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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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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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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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5·16
이전
5·16
이후
서울특별시 64 14 267 11 355 32 400 158 146 71 1,214 286
경기도 6 3 7 - 11 - 7 3 5 1 36 7
충청북도 2 1 1 - 6 - 4 2 1 - 14 3
충청남도 4 2 4 - 3 - 4 - 5 2 25 4
전라북도 9 3 6 - 8 - 6 3 2 - 31 6
전라남도 11 4 3 - 25 - 6 - 10 - 55 6
경상북도 6 4 6 - 23 1 14 5 10 4 59 14
경상남도 9 5 20 - 38 - 21 7 8 3 96 15
강원도 1 1 10 - 7 - 1 - 3 - 22 1
제주도 3 1 2 - 6 - 1 - 3 - 15 1
115 38 326 11 482 33 464 178 193 83 1,567 343
✽신인섭·서범석, 『한국 광고사』, 나남, 1998, 215쪽의 내용을 재구성.

구체적으로 주목해야할 점은 5·16 군사 정변 이전에 115개였던 일간 신문이 이후에는 38개만 남았고, 308개이던 통신사는 서울에만 11개가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통신사라는 것이 각 언론사에 뉴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쿠데타 세력이 효율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11개사만을 남겨 두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5·16 군사 정변 이전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각 언론사들을 서울 중심으로 재편한 사실에서도 쿠데타 세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언론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 가 얼마가 강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방송 매체로는 1956년 5월 12일에 KORCAD-TV(호출 부호, HLKZ)가 최초의 민간 상업 방송으로 출현하여 텔레비전 방송이 라디오 방송보다 앞서서 등장하였다. 텔레비전이 라디오보다 먼저 상업 방송을 시작한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방송 시작 순서를 따져보면 라디오가 약 1년 6개월가량 앞섰다. 1954년 12월 15일에 기독교 방송(CBS)이 창설됨으로써 민방 라디오가 시작되었지만 상업 방송은 아니었기 때문에 민간 상업 방송으로서는 텔레비전이 라디오보다 다소 앞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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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보급 현황
텔레비전 보급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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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KZ-TV 개국 당시 수입한 미국 RCA-TV의 대당 가격은 8½인치 19만 환, 14인치 34만 환, 17인치 39만 환, 21인치 41만 환, 24인치 47만 환 등이었는데, 쌀 한 가마니의 값이 18만 환이던 점을 감안하면 텔레비전 수상기의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텔레비전 보급 대수는 표 ‘텔레비전 보급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1961년 2만 대, 1963년 3만 4800대에 불과하였다. 텔레비전 보급 대수가 10만 대를 넘어선 것은 1968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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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상반기 광고 방송 운영 실적
1963년 상반기 광고 방송 운영 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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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2월에 HLKZ-TV가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텔레비전 광고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63년 1월 국영인 KBS-TV가 상업 방송을 개시한 뒤부터였다. 그러나 KBS-TV의 광고 판매 실적은 부진하였는데, 당시 사정은 표 ‘1963년 상반기 광고 방송 운영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광고 방송의 운영 실적이 저조한 까닭은 텔레비전 수상기의 값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수상기를 가지고 있는 가정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광고주 쪽에서 보면 텔레비전은 그다지 매력적인 광고 매체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KBS-TV가 개국한 1월에는 광고 대상 목표 시간인 주당 1,260분을 초과하여 1,270분(100.18%)을 달성하였지만, 2월과 3월에는 65.28%, 4월에는 55.85% 등으로 목표 시간을 크게 밑돈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개국 당시에는 광고주들이 텔레비전이라 는 새로운 광고 매체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지만,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률이 저조하였기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 같은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광고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고, 이로 인해 광고 효과 역시 기대 수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광고량을 대폭 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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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매체별 광고비 변화
4대 매체별 광고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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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부터 동아 방송, 동양 방송, 문화 방송 등 상업 방송의 시대가 본격화됨으로써 광고 산업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광고 관련 자료가 축적되기 시작한 1970년 이후에 4대 매체(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잡지)의 광고비 비중 변화를 살펴보면 광고 매체로서 텔레비전의 비중이 점차 커짐을 알 수 있다. 표 ‘4대 매체별 광고비 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텔레비전 수상기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광고비도 꾸준히 증가하였고, 텔레비전은 대체로 전체 광고 시장에서 약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로 성장하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1970년과 1971년까지만 해도 라디오는 전체 광고비에서 24%를 차지하는 반면, 텔레비전은 16%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광고 매체로서 라디오가 텔레비전보다 비중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1964년 12월에 개국한 TBC-TV, 1969년 8월에 개국한 MBC-TV와 함께 1963년에 개국한 KBS-TV 등이 있었지만, MBC-TV가 개국하는 즈음에 KBS-TV가 광고 방송을 폐지함으로써 방송국 수는 늘어났어도 광고를 집행할 수 있는 매체의 수는 그대로였다. 반면, 라디오는 MBC, TBC, CBS, DBS와 더불어 MBC-FM, TBC-FM 등이 생겨나서 광고를 할 수 있는 매체의 수가 오히려 증가하였다.

라디오는 1970년 당시 신문에 이은 두 번째 매체였지만, 그 이후에는 줄곧 텔레비전에 그 자리를 내주고 세 번째 매체로 밀려나 있었다. 게다가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1980년 이전까지 라디오는 약 15% 이상의 점유율을 보였지만, 컬러텔레비전 방송 이후에는 10% 미만 매체로 전락하였다. 급기야 1988년 이후에는 잡지의 점유율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고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감소하였다. 잡지는 매체 환경 변화나 광고 시장 변화에 관계없이 1970년 이후부터 줄곧 5% 내외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잡지는 특정 제품의 소수 수용자들을 대상(예컨대, 여성 화장품)으로 한 광고 매체로써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표 ‘4대 매체 광고비 성장 추이(1970∼1978년)’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1970년에만 해도 광고비를 기준으로 세 번째 광고 매체였던 텔레비전이 1975년에 처음으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텔레비전이 다른 매체를 제치고 첫 번째 광고 매체로 등장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까닭은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유류 파동(oil shock) 때문이었다. 당시에 유류 파동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 절약의 하나로 ‘주간 TV 방송 중단’이 단행됨에 따라 텔레비전 방영 시간이 40% 정도 단축되었지만, MBC와 TBC 두 민영 방송이 이를 빌미로 방송 광고 요금을 엄청나게 인상(전년 대비 226.1%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텔레비전 방송 광고 요금의 인상은 라디오(280.5%), 신문(168.7%) 등 다른 광고 매체의 광고비 인상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광고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광고 성장 추세 자체를 왜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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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매체의 광고비 성장 추이(1970∼1978년)
4대 매체의 광고비 성장 추이(1970∼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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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광고 인플레이션 현상은 1973년 유류 파동 당시 미국, 일본 등과 같은 선진국의 광고비 증가율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유류 파동 이전에 평균 12.26%였던 광고비 증가율이 1974년 6.7%, 1975년 4.9% 증가에 그치고, 일본은 1973년 22.6%의 광고비 증가율을 보이던 것이 1974년 8.6%, 1975년 5.8% 증가하였다. 반면, 우리나라는 1974년 55.8%, 1975년 51.2%의 광고비 증가율을 보여서 과거의 연평균을 훨씬 웃도는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당시에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광고 매체의 광고비 횡포가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텔레비전 방송 시간 단축과 엄청난 광고비 인상은 일부 대기업의 광고 집중을 촉발하였다. 1974년을 기점으로 텔레비전 광고비가 워낙 비싸졌기 때문에 웬만한 규모의 대기업이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간혹 소규모 기업이 텔레비전 광고를 계획한다고 하더라도 지속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텔레비전 광고는 지속적으로 수용자에게 전달될 때 광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소규모 기업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147) 신길수, 앞의 글, pp.409∼429. 다른 이유도 많이 있겠지만, 결국 비싼 텔레비전 광고비를 감당할 수 있었던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커지게 되고, 몇몇 대기업이 우리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왜곡된 시장 구조가 고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1981년 이후에도 광고 시장에서 텔레비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오히려 신문의 비중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컬러텔레비전 광고는 우리나라 광고 산업이 급성장하는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의 창의성을 무제한으로 구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광고주의 입장에서는 다른 매체보다 텔레비전이 매력적이라는 것이 광고업계 및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텔레비전의 광고 비중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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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제작 장면
광고 제작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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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 광고 공사
한국 방송 광고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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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매체의 광고비 성장 추이(1979∼1985년)
4대 매체의 광고비 성장 추이(1979∼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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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는 1980년 언론 통폐합148) 1980년 언론 통폐합 결과, 전국의 언론 기관은 일간 신문 28개사(중앙지 14개, 지방지 14개), 방송 29개사, 통신 7개사 등 모두 64개사가 흡수, 통폐합, 조정 과정을 거쳐서 일간 신문 21개사(중앙지 11개, 지방지 10개), 통신 1개사, 방송 2개사로 대폭 감소되었다. 일간 신문의 경우에 중앙지는 종합 일간지 6개사와 경제지 2개사, 특수지 3개사가 존재하게 되었고, 지방지는 1도 1사 원칙에 따라 종합 일간지 10개가 각 지역별로 발행되었다(주동황, 『한국 정부의 언론 정책이 신문산업의 변천에 미친 영향에 관한 일고찰―제1공화국에서 제5공화국까지』, 서울대 박사학위논몬, 1992, p.166). 조치 후 무자본 특수 법인으로 창설된 한국 방송 광고 공사(KOBACO)가 각 방송국의 광고 영업을 대행해 주는 일종의 매체 대행사의 역할을 수행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방송 공사가 방송 광고 시행 및 가격 책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텔레비전 광고비의 증가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고주의 입장에서 보면 텔레비전 광고는 대단히 매력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다른 매체에 비해서 광고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표 ‘4대 매체의 광고비 성장 추이(1979∼1985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는 다른 매체의 성장 비율과 비교해서 그다지 높지 않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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