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4. 광고주의 변화
  • 최초의 광고주, 세창 양행
이병관

우리나라에서 광고는 언제, 누가 시작하였을까? 문헌에 등장하는 광고는 고려시대 및 근대 조선시대에 상점들이 가게 이름을 적은 간판을 상점 앞에 걸어 놓은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개성의 상점들은 광덕(廣德), 통상(通商), 자양(資養), 존신(存信) 등의 상호를 썼다고 한다.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상거래가 시작된 시대부터 방(榜)을 통하여 물품을 소개하거나 시장에서 물품을 사라고 외쳤던 행위도 광고의 한 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면149)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광고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광고는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 제4호의 17쪽에서 18쪽에 걸쳐 게재된 ‘德商世昌洋行告白(덕상 세창 양행 고백)’으로 시작되는 24행 광고이다. 따라서 이 광고는 한국 근대 광고의 효시이며, 독일 무역 상사 세창 양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주라고 하겠다.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세창 양행(Edward Meyer & Co.)은 동양 진출을 위하여 홍콩(香港)에 본사를 두고 중국 상하이(上海)·텐진(天津)과 일본 고베(神戶)에 지점을 두었고, 우리나라에는 1884년 6월 6일에 칼 월터(Carl Walter)와 사이츠(Sites)가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886년 1월에는 조선 정부가 연리 1할 12년 상환의 조건으로 은 10만 냥을 차관하였고, 1887년 3월에는 양화(洋貨) 3만 4150원 상당의 각종 전선 기재(電線機材)를 외상으로 수입하기도 하였으며, 1900년 1월에는 권총 300정과 탄환 4만 발을 5,520원에 구입하였다. 또한 세창 양행은 『한성주보』의 발행을 준비할 때 중국에서 서적과 신문 등을 수입해 준 일도 있었다. 아울러 1879년에는 독일 공사관을 통해서 조선 정부로부터 당현(堂峴) 금광의 채굴권을 취득하였다.150) 김봉철, 「구한말 ‘세창양행’ 광고의 경제·문화사적 의미」, 『광고학연구』 13-5, 2002, pp.117∼135.

1886년 1월 25일에 창간된 『한성주보』는 그 이전에 나온 『한성순보(漢城旬報)』와는 달리 창간호부터 광고를 게재하였다. 『한성주보』 창간호를 보면 “농업, 상업, 공업과 기타 모든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광고를 하고자 하면 와서 신문사 국원과 상의하면 신문에 상세히 기재해서 본보를 구독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151) 『한성주보』 1886년 1월 25일자, 19면. 내용을 싣고 있다.

『한성주보』에 최초로 세창 양행의 광고가 실린 것은 제4호이다. 『한성주보』에 광고가 게재된 것 중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24호까지이며 24호 이후에는 광고가 게재되어 있지 않다. 『한성주보』가 창간호부터 광고 유치를 적극적으로 알리고도 무슨 이유로 24호 이후에는 광고를 게재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152) 김봉철, 앞의 글, pp.117∼135. 『한성주보』 24호까지 중에서 세창 양행 광고는 모두 일곱 차례 게재되었다. 초기에는 ‘덕상 세창 양행 고백’으로 시작되는 물품 교역 광고였다. 이 광고가 처음 실린 4호는 15∼16쪽에 걸쳐 24행으로, 6호는 16쪽에 20행으로 실려 있다.

세창 양행이 지속적으로 광고를 게재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부터이다. 애당초 소규모 물품 교역 사업으로 출발한 세창 양행은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하면서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1890년 이후에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세창 양행의 물건이 많이 소개되었고 따라서 광고할 품목도 많아지게 된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자 창간호부터 광고를 게재하였지만 초기에는 세창 양행 광고가 실리지 않았다. 『독립신문』에 세창 양행 광고가 게재되기 시작한 것은 창간 6개월 정도가 지난 1896년 12월 말경부터인데, 『독립신문』 1896년 12월 29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려 있다.

○현익환

이화륜션이 졍월 초륙일에 졔물포셔 나 군산 목포 등디에 갈티이니 과 짐 붓치리 졔물포 마예-회로 와서 무르시오 여긔서 각석 거슬 모도 샹관오.153) 『독립신문』 1896년 12월 29일자.

여기서 ‘마예-회’란 세창 양행의 영문 명칭인 Meyer & Co.를 의미한다. 이튿날인 12월 30일자에도 같은 내용의 광고가 실렸는데 여기서는 마예-회를 ‘世昌洋行’으로 바꾸었다. 또한 세창 양행은 현익환 광고와 함께 창룡환 광고를 번갈아 게재하고 있다. 『독립신문』 1897년 3월 16일자에 실린 창룡환 광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世昌洋行 졔물포

화륜선 챵룡환이 이달 이십삼일에 진남포와 평양으로 졔물포에셔 떠날 터이니 션들과 짐들을 쇽히 졔물포 世昌洋行으로 가셔 맛치시요.154) 『독립신문』 1897년 3월 16일자.

세창 양행이 당시 서민들에게 유수한 무역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준 것은 금계랍(金鷄蠟) 때문이었다. 키니네(kinine)라고도 하는 금계랍은 말라리아 치료약이었으나 당시 부인들 사이에서는 아기의 젖을 떼는 데 신통한 약으로 통하였다. 1896년 11월 7일자 『독립신문』에 처음으로 게재된 세창 양행의 금계랍 광고는 우리나라 약품 광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155)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금계랍 광고는 『독립신문』에 가장 빈번하게 게재되었는데, 1897년 1월 12일자 부터 폐간호인 1899년 12월 4일까지 계속 게재되어 『독립신문』 한글판 총 776호 가운데 543회나 실었다.156)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이 당시 금계랍 광고의 내용을 보면 “셰계에 데일 죠흔 금계랍을 이회에셔 만히 파니 누구던지 금계랍 쟝 고 스푼이 이회샤에 와셔 사거드면 도금으로 싸게 주리다.”라고157) 『독립신문』 1899년 7월 3일자.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세창 양행에서 금계랍 광고를 대대적으로 펼친 것은 당시 국내에서 금계랍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미국인 상회에서 광고하던 미국산 금계랍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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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랍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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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외국 상인과의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자 세창 양행은 1897년 4월경부터 광고에 태극 마크를 사용해 한국인 소비자에게 친밀감을 주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97년 4월 3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하륜선 현익환의 광고를 보면 태극기와 세창 양행기(M 자가 새겨짐)가 서로 교차된 일러스트레이션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99년 4월경까지 쓰이다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99년 8월 20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보면, 태극기를 상표로 사용함에 따라 한국 정부와 세창 양행 사이에 마찰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158) 김봉철, 앞의 글, pp.117∼135.

德領事(덕영사)가 外部(외부)에 照會(조회)하기를 德世昌洋行(덕세창양행)에서 大韓國旗(대한국기)로 商票(상표)를 著定(착정)다 니 認諒(인량)라 지라. 外部(외부)에서 農部(농부)에 轉照(전조)기를 本國(본국) 國旗(국기)로 外國人(외국인)의 商票(상표) 作(작)이 或拘碍處(혹구애처)가 無(무)지 示明(시명)라 얏다더라.159) 『황성신문』 1899년 8월 20일자.

이 기사를 보면 독일 영사가 대한 국기를 상표로 사용하기 위한 인가 요청을 조선 정부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같은 해 9월 9일에 외무대신 박제순(朴濟純)은 정식으로 독일 영사에게 세창 양행에서 대한 국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음을 통보하기도 한다.160) 김봉철, 앞의 글, pp.117∼135.

『독립신문』 1897년 2월 18일자에는 석유 광고가 실렸다. 광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世昌洋行 졔물포

이 회샤에서 슈맛트라 셕유를 만히 가지고 도가로 셕유쟝 들의게 팔터이니 누구든지 셕유 쟝 랴면 인쳔 항구 셰챵양으로 셕유를 구야 밧아다 팔면 큰리가 잇스리라.161) 『독립신문』 1897년 2월 18일자.

특히 이 광고에는 『독립신문』에 실린 세창 양행의 광고 중 처음으로 왕관 모양의 일러스트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 일러스트이다. 이후 세창 양행의 광고에는 토끼, 거북이, 학 등을 이용한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trade mark)인 E. Meyor & Co.가 수송 스케줄을 알리면서 사용한 국기 그림과 레밍턴 자전거를 수입하여 판매한다는 자전거 그림 등이 자주 등장하였다. 결국 세창 양행 광고는 초기 우리나라 광고의 비주얼 시대를 개척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162) 김봉철, 앞의 글, pp.11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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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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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창 양행은 1898년 8월에 창간해 1910년 8월에 폐간한 『제국신문』에 단 한 차례도 광고를 게재하지 않았다. 세창 양행이 『제국신문』에는 광고를 게재하지 않은 구체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 만, 『제국신문』의 주 독자층이 구매 능력이 없는 하층민과 부녀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163) 김봉철, 위의 글, pp.117∼135.

세창 양행은 1914년 일본의 대독(對獨) 선전 포고로 서울의 독일 총영사관과 함께 폐쇄되었다.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후 다시 문을 연 세창 양행은 1920년대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잠깐 광고를 게재하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31일부터 8월 8일 사이에,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1일부터 8월 13일 사이에 똑같은 내용의 ‘세창표 바늘’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 신문에서 세창 양행 광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164) 김봉철, 위의 글, pp.11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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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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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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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세창 양행은 일개 외국의 무역상이 아니라 당시 동양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독일의 첨병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독일은 세창 양행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 및 문화를 지배하고자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세창 양행의 광고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세창 양행 광고는 단순한 마케팅 차원뿐만 아니라 구한말 경제 및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165) 김봉철, 위의 글, pp.11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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