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4. 광고주의 변화
  • 일제 강점기의 광고주
이병관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의 소비 시장이 일본의 자본에 예속되어 있었고 광고 산업 역시 대부분 일본 광고주에 의해 유지되었다. 통감부가 설치되자 통감부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는 일본 광고주들이 독주를 하게 되는데, 1908년 말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계 상사는 143개사로 개인 상회에서부터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 조직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하였다.171) 김문성, 앞의 글.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제대로 규모를 갖춘 우리나라 광고주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회사 조직 형태를 갖춘 민족 기업이 출현한 것은 1880년대부터이지만, 일제가 무단 정치를 포기하고 회사령을 철폐하게 된 3·1 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민족 기업가의 회사 설립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의 규모는 영세하였으며, 그마저도 수가 매우 적어 갑오개혁 이전까지 서울·인천·부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설립된 근대적 상사와 회사는 40여 개사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당시에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광고를 대부분 일본의 대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본 광고주의 광고 시장 독점은 지면 점유율을 보아도 잘 나타난다. 1923년의 지면 점유율은 국내 광고가 64%, 일본 광고가 36%인 데 반하여 1925년에는 국내 40%, 일본 60%, 그리고 1931년에는 국내 36%, 일본 64%로 갈수록 일본 광고의 비율이 월등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일본 상품들이 일제 강점기 조선의 소비 시장을 독점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172) 김문성, 위의 글.

1910년에서 1920년대까지 국내의 주요 광고 업종은 역시 한약 계열의 의약품, 서적 출판물 등이 대부분이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화평당(和平堂), 조선 매약(朝鮮賣藥), 모범 매약(模範賣藥) 등이, 『동아일보(東亞日報)』에는 경성 방직(京城紡織), 동아 부인 상회(東亞婦人商會), 화평당, 화신(花信), 조선 매약, 천일제약(天一製藥), 경성 전기(京城電氣), 조선 생 명 주식회사(朝鮮生命株式會社) 등의 광고주가 광고를 게재하였다. 『동아일보』에서 제약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923년에 총광고 지면의 약 30% 정도를 차지하던 것이 1938년에는 50%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173)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잡지에는 주로 잡화상의 영업 광고, 인쇄·출판 광고, 의약·병원 광고의 순으로 많았는데, 이들이 잡지 광고 전체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당시 잡지 광고주의 순위를 살펴보면 종로 위생당 본포, 영국·스위스 합작 여인표 우유 회사, 종로 화평당 대약방 본포 등이었다. 광고주를 국적별로 살펴보면 한국인이 전체 광고량의 75%를 차지하고 영국인 14%, 일본인 8%, 미국인 3%의 순이었다.174) 김문성,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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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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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약 회사 가운데 유한 양행(柳韓洋行)의 광고는 주목할 만하다. 1926년 12월 종로 덕원 빌딩에 사옥을 두고 창립한 유한 양행은 1920∼1930년대 제약 회사이면서도, 독특한 기업정신을 담은 기업 광고를 하였다. 상품 판매만을 앞세워 과대 과장 광고가 난무하던 시기에 유한 양행은 상도덕과 기업 윤리를 강조하는 기업 광고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유한 양행의 광고는 약에 대한 인식과 약의 사용 방법을 공중에게 올바르게 알리고자하는 목적을 지닌 일종의 캠페인 광고였다. 1938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에 ‘만천하 독자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전면 광고는 기업 PR 광고로서 유한 양행의 기업 이념을 잘 나타낸다. 이러한 기업 광고는 당시로서는 획 기적인 기획이었다.175) 전면 기업 광고의 시작은 이보다 앞서서 구한말 대광고주였던 한양상회(漢陽商會)가 1910년 1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삼가하여 여러분의 행복 있는 신년을 하(賀)하옵”이라는 신년 인사를 겸한 기업 광고를 전면에 게재하였다. 유한 양행은 또한 1927년 창설 무렵에 이미 티저(teaser) 광고를176) 시리즈 형식의 광고로 소비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처음에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도록 메시지나 광고 표현을 제시하다가 차츰 광고 내용을 밝혀 가는 형식의 광고이다. 즉, 광고 내용을 한 번에 제시하지 않고 조금씩 몇 차례에 나누어 보여주는 기법이다. 가령 하나의 광고 캠페인을 들어 말하자면, 첫 번째는 회사명이나 브랜드명을 가르쳐 주지 않고 독자의 주의만을 끌고, 두 번째는 가격만을, 세 번째는 브랜드명을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몇 회에 걸쳐 완성하는 구조를 지닌 접근 방식이다. 코래드 광고전략연구소, 『광고대사전』, 나남출판, 1996, pp.818∼819. 내기도 하였다.

吾人(오인)이 누차 지상으로써 사회 제현에게 공약한 바와 같이 폐사가 일찍부터 우리 민중의 복리 증진을 위한 一公器(일공기)로서 미력이나마 孜孜不倦(자자불권)의 노력을 傾注(경주)하여 온 것은 제현RP서도 이미 인정하신 줄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는 기업 활동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부각되고 광고 제작 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광고주들도 자체적으로 광고를 전담하는 인력 및 부서를 두기 시작하였다. 특히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을 개량 판매하였던 한말 최대의 광고주 이경봉은 이 부분에서 가히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99년에 인천에서 제생당 약방을 창업하여 1907년에 서울로 본사를 옮긴 뒤, 1909년에는 이 약방 영업부에 광고부를 만들었으며 광고부 주임까지 두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약 전문지인 『중외의약신보(中外醫藥申報)』를 창간하기도 하였다.177) 『중외의약신보』는 이경붕의 제생당에서 발행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제생당과 쌍벽을 이루던 평화당의 이응선이 발행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대한매일신보』1909년 9월 7일자를 보면, 육군 군의였던 장기무(張基茂)가 주필이 되어 제생당 약방에서 발간한 것이 옳은 듯하다. 『중외의약신보』는 1909년 8월 25일에 창간호를 내었는데 9월 7일부터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한 광고에 “본보에 광고코져 하시는 첨위(僉位)는 본사 영업부 내 광고부 주임과 면의(面議) 하시압. 한성 남대문 측 제생당 내 발행수 중외의약신보사”라고 명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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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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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에 벌어진 조선 매약 주식회사와 화평당 약방의 광고 경쟁은 특기할 만하다. 조선 매약은 영신환을, 화평당은 자양환과 태양조경환 두 가지를 시리즈로 광고하였다. 두 회사는 1922년 4월 한 달에만 거의 20일 동안 광고 공방전을 펼쳤다. 또한 하루에 4면을 발행하던 당시 신문에서 사회면인 3면에 주로 광고를 게재한 것도 독자의 주목도를 고려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화장품 광고의 시장 규모 변화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동아일보』의 화장품 광고는 1923년 전체 광고량의 9.4%로 매약(30.2%)이나 잡화품(24.2%)에 훨씬 못 미쳤으나 1938년 약품(50.2%)에 이어 12.6%를 차지하게 된다. 광복 전까지 한국의 화장품 시장은 일본 제품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고도 대부분 일본 화장품 광고주가 집행하였다. 1920년대에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 일본 화장품 광고는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현재 일본 최대의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資生堂)와 세제·화장품 회사인 카오(花王)도 많은 광고를 집행하게 되었다.178) 신인섭, 『광고로 보는 한국 화장의 문화사』, 김영사, 2002. 아울러 화장품 품목도 향수, 샴푸, 코롱, 남성용 포마드, 연지, 립스틱 등으로 점차 다양해졌고 화장품 회사도 늘어났다. 당시 일본제 화장품의 광고량을 살펴보면, 1926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각각 집행된 광고량은 총 80행 미만이었던 것이 1935년에 들어서 200행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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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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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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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10년대 말부터 일제가 판을 치던 화장품 광고 시장에 국산 화장품 광고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22년 한국 최초의 화장품인 박가분(朴家粉)이었다. 박가분의 창시자는 지금의 두산 그룹을 창설한 박두병(朴斗秉)의 선친인 박승직(朴承稷)이었다. 1916년에 상표 등록을 하고 1918년에 특허 승인 후 1920년경부터 박가분을 선보였다. 1922년에 광고를 시작하여 1930년대 초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1930년대 말부터 일제 화장품의 대량 유입과 화장품에 들어간 납 성분의 유독성 문제로 인해 1937년에 자진 폐업하였다.179) 신인섭,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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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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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성공에 이어 1930년대 말에는 국내에도 몇몇 화장품 회사가 설립되었다. 문영수의 태양 이화학(太陽理化學) 피카몬드 향수, 김동엽의 동방 화학 에러나 화장품, 임성환의 동보 화학 동보 구리무(크림의 일본식 발음) 등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 회사들은 광고를 하지 않았다.180) 신인섭, 앞의 책. 이 시기에는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평양 화학 창설자 서성환(徐成煥)의 부친 서대근(徐大根)도 가내 공업으로 구리무 등을 제조해서 판매하였는데, 장사가 잘 되자 창성당(昌盛堂)이라는 이름을 썼고 영어 이름은 Tai Pyung Yang(태평양)을 사용하였다. 1940년대 초에는 개성 고려 백화점에 화장품부를 개설할 만큼 사업이 번창하였지만 광고를 내지는 않았다. 동동구리무라는 말은 광복 전에 손수레를 끌고 시골 동네를 돌아다니며 화장품 따위를 팔던 행상인이 작은 북을 치고 노래하며 선전을 하였는데, 그 북소리를 ‘동동’ 또는 ‘둥둥’이라 한 데서 나온 말이다.181) 신인섭,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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