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5. 광고 대행사의 변화
이병관

광고 대행사(advertising agency)는 광고주를 대신하여 광고물을 기획·개발·제작하여 광고 매체에 싣는 크리에이티브 및 영업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기업 조직체를 말한다.201) 김원수, 『광고학개론』, 경문사, 1981. 또한 광고 대행사는 자신이 광고주를 대신하여 제작한 광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선정하기 위하여 소비자의 매체 접촉 습관, 소비자의 매체 선호도, 이용 가능 매체의 상대적 비용 등을 조사하여 광고 메시지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202) 원우현, 앞의 글, pp.3∼15. 광고주들이 광고 매체와 직접 거래를 하지 않고, 광고 대행사를 이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고 대행사는 항상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원과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객관적인 의견을 밝히거나 심지어 제품 개선, 신제품 개발, 포장, 가격과 경로 변경 등에 대하여 실행 가능성이 높은 조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광고 대행사는 광고의 기획에서부터 집행 및 평가에 이르기까지 관여하지 않는 영역이 없다고 할 정도로 기능이나 역할이 광범위하다.

한편 광고 매체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점이 있다. 우선 광고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아울러 막대한 광고료의 지불 책임을 짐으로써 매체사 의 위험 부담을 덜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광고 대행사는 매체 영업 활동을 위한 독자적인 마케팅 활동으로 새로운 광고 예산을 창출하여 매체 판매를 촉진시킨다. 따라서 광고 대행사는 광고주와 광고 매체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광고 산업의 성장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광고 산업에서 차지하는 광고 대행사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근대 광고가 시작된 1886년 이후로 70여 년 동안 이렇다 할 광고 대행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 대행사는 통신과 광고 대행을 겸영하던 일본의 전보 통신사(電報通信社)라고 볼 수 있다.203)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전보 통신사는 1906년 4월 3일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근처에 서울 지사를 설립하고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광고 대행업에 관한 내용은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10년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 광고사(漢城廣告舍)가 나타나는데, 이 회사는 신문과 잡지 광고를 주로 취급하였다. 한성 광고사 역시 관련 자료가 거의 없지만, 이 회사를 우리나라 광고 대행업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921년에도 한국인이 운영한 백영사(白榮社)가 있었다. 1921년 10월부터 12월까지 광고 대리업 백영사라는 자사 광고를 『동아일보』에 다섯 차례 게재하였지만, 1922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에 폐업 광고를 내고 있어 이 회사에 대한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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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광고사의 광고지
한성 광고사의 광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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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1957년 8월 15일 『한 국일보』의 매체 전속 대행사인 한국 광고사가 처음으로 광고 대행을 시작하였으며, 1958년 2월에는 광고 회사 AD KOREA가 창설되었다. 그 후로 1962년에 합동 광고사, 1963년 내외 PR 센터가 설립되었다.204) 김민환·김광수, 앞의 글. 하지만 당시는 광고비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 광고 대행사에 대한 필요성이나 전문성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였던 만큼 이들은 광고 대행사로서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 제일 기획, 연합 광고 등이 새롭게 생겨나면서부터 광고 대행사로서 독자적인 영역 구축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75년에는 1962년에 합동 광고사로 설립된 합동 통신사 내의 합동 광고 기획실이 만보사(萬報社)를 통합함으로써 3대 광고 대행사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광고 대행사가 다국적 상품이 국내에 판매되면서부터 설립된 점은 국내 기업이 광고 대행사의 역할이나 전문성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였는지를 입증하고 있다. 1968년과 1969년에는 다국적 기업인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국내에 상륙하여 선진국의 광고 기법을 동원해 국내 시장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다국적 기업의 뛰어난 마케팅과 광고 전략은 국내 광고계에 큰 자극을 주어 광고 대행업이 하나의 기업으로 등장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코카콜라는 『동아일보』와 OB 그룹의 공동 투자로 1969년 1월에 설립된 만보사의 창설에 영향을 미쳤으며, 펩시콜라는 임팩트라는 광고 대행사에서 시작하여 후에 연합 광고 창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205)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이들 3대 광고 대행사는 광고 산업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표 ‘3대 광고 대행사의 총광고비 중 취급률 변화’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체 광고비에서 취급하는 비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영세하였다. 다시 말해 광고 대행사는 여전히 전문성을 인정받아 독보적인 산업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다수의 광고 대행사가 등장하면서 겉으로는 발전한 것처럼 보였지만 광고 제작사의 영세성, 광고 대행사의 대기업 계열화 등으로 1970년대보다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 시기 광고 대행사는 대부분 대기업의 계열 기업으로서 사내 대행사(house agency)206) 광고주가 자사 혹은 기업 그룹의 광고를 전담·대행하도록 설립한 광고 대행사로, 그 회사나 기업 그룹의 광고부문이지만 완전 소유의 자회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역할 및 기능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의 주요 광고 대행사를 살펴보면, 제일 기획은 삼성 그룹, 연합 광고는 MBC 방송, 코래드는 해태 그룹, 금강은 현대 그룹, 대홍은 롯데 그룹, 동방은 태평양 계열의 사내 대행사였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외형상으로는 사회 발전에 따라 광고 대행사도 고유한 영역과 전문성을 확대해 나가는 듯이 보였지만, 당시의 광고 대행사들은 대기업의 계열사와 같은 형태로 성장함에 따라 전문성이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데에 취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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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광고 대행사의 총광고비 중 취급률 변화
3대 광고 대행사의 총광고비 중 취급률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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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언론 기본법과 함께 1980년 12월 31일에 공포된 한국 방송 광고 공사법에 따라 1981년 1월 20일 한국 방송 광고 공사가 발족하자 광고 대행사의 위상이나 역할은 더욱더 불분명해졌다. 한국 방송 광고 공사가 출범하면서 모든 방송 광고의 영업을 독점하게 됨에 따라 광고 대행사의 역 할이나 활동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시장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 방송 광고 공사령 제1조에는 “한국 방송 광고 공사는 무자본 특수 법인으로, 방송 광고업을 영위하는 광고 대행사를 통괄하고 규제하며 광고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주사업 내용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207) 한국방송광고공사령 제1조. 이를 바탕으로 한국 방송 광고 공사는 기존의 대행사 대행 수수료 15%를 대폭 삭감하여 6∼7%로 조정하고, 나머지 차액분인 8∼9%를 공사의 수입으로 하는가 하면, 후에 수수료를 20%로 인상하였을 때에도 초과 수수료 5%를 다시 공사의 이익금으로 취하였다. 이로 인해 광고 대행사가 광고 업무를 대행하였을 때 받을 수 있는 수수료가 5∼7%에 불과해 광고 대행사의 재정적 기반이나 수익 구조가 취약해졌다. 또한 전체 광고 거래 중에서 ‘광고주→방송 광고 공사→매체사(텔레비전, 라디오)’의 형태로 직거래하는 경우도 33%나 되어서 광고 대행사의 역할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67%는 ‘광고주→광고 대행사→방송 광고 공사→매체사’의 과정을 통해서 광고가 이루어짐에 따라 광고주로서는 광고 대행사를 쓸데없거나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만들었다.208) 배인준, 「방송광고공사」, 『신동아』 1986년 6월호.

한편 한국 방송 광고 공사는 전에 없던 광고 대행사 인정 기준을 제정하여 활동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기까지 하였다. 그 자격 기준은 첫째, 방송 매체사 또는 기업체의 어느 한 편에 종속되지 아니하는 자, 둘째, 광고 대행에 필요한 광고 제작 시설과 조직, 인원을 갖추고 광고 대행 취급고가 전체 매출액의 70% 이상인 자, 셋째, 과거 3년간 광고료의 납부를 해태하거나 납부하지 아니한 사실이 없는 자, 넷째, 자본금이 2억 원 이상으로 연간 총매출 100억 원 이상의 광고 대행 실적과 연간 50억 이상의 방송 광고 대행 실적이 있는 자, 다섯째, 30개 이상의 광고주를 갖고 있는 자로서 대행사가 자사 계열 기업의 광고 취급고가 대행사 전체 매출액의 70% 이하인 자, 여섯째, 국내 자본에 의한 국내 법인으로 설립된 자, 일곱째, 광고료 납부 기일 을 준수할 수 있는 자 등이었다.209)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1981년 3월 26일까지 마감된 계약 신청에 자격 요건을 완비한 광고 대행사는 오리콤, 제일 기획, 한국 연합 광고 등 세 개 회사뿐이었으며, 이 밖에 외환 거래 실적이라는 특수 요건을 인정받은 나라 기획을 포함하여 네 개 민간 광고 대행사만이 대행 계약사로 인정되었다. 물론 군소 대행사의 난립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고, 올바른 광고 질서와 국민 생활 및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에서 출발하였으나 한국 방송 광고 공사가 대행사의 재무 구조를 통제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광고 대행사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컬러텔레비전 방송 개시, 신문의 증면 등 매체 환경이 변화하고 생활수준 및 산업 발전으로 인해 광고량이 증가함에 따라 대기업에서 경쟁적으로 광고 대행사를 설립하여 1988년에는 방송 광고 대행사가 12개로 증가하였다. 또한 언론 자유화와 함께 한국 방송 광고 공사의 광고 대행사 인정 기준은 자유 경쟁의 제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1989년 1월 1일자로 광고 대행사 선정 기준을 대폭 완화하였다. 이에 따라 1989년에는 24개사가 추가로 방송 광고 대행 업체로 인정받게 되어 모두 36개사로 증가하여 이때부터 광고 대행사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1988년에 총매출액에서 상위를 기록한 9개의 광고 대행사가 모두 대기업 계열사였고, 이들이 전체 광고 시장의 51%를 차지함으로써 광고 산업을 독점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9개사의 1988년 총매출액은 6,555억 원으로 총광고비 1조 2,785억 원의 51%에 해당된다. 또한 총매출액 기준으로 상위 12위 미만의 광고 대행사는 직원이 모두 50명이 못 되는 규모여서 상위 대행사들과 경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210)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정보』 1월호∼6월호, 1989. 더욱이 이들 상위 9개 광고 대행사의 모기업들이 우리나라 전체 광고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일부 광고 대행사의 광고 산업 과점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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