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1. 근대 소비 문화의 형성 배경
  • 식민지 근대 도시의 성장
조성운

도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인구이다. 도시 환경의 주체인 인구의 증감은 도시의 성장과 쇠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구가 증가하면 증가한 만큼 필요한 생활 및 생산 활동의 공간이 추가될 것이다. 연령·성별·교육·소득 수준 등 인구의 질적 양상에 따라 공간 수요가 변화된다. 도시 인구의 증가는 자연적 증가보다 사회적 증가가 더 많고 인구 증가 규모에 따라 도시 공간이 수평적·평면적으로 확산된다.211) 장영실, 「수원시 공간 구조 변천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1990, pp.10∼11. 일제 강점을 전후한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한국 근대 도시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근대 도시의 형성은 일본인의 이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212) 권태환, 「일제시대의 도시화」, 『일제 식민지 통치와 사회구조의 변화』 한국의 사회와 문화 제11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pp.254∼255. 이러한 점에서도 일제 강점기 근대 도시는 식민지 도시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일본인의 조선 진출과 이와 연관된 새로운 도시의 형성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부산을 비롯하여 원산과 인천을 차례로 개항하였고, 이들 지역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각종 치외 법권(治外法權)이 인정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 전까지 목포, 군 산, 신의주, 성진, 진남포 등이 잇따라 개항하였다. 개항하기 전까지 이들 지역은 대부분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인 거류지가 생기면서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되어 점차 도시화되었다. 특히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대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철거였다.213)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는 조선 대도시의 성곽을 대부분 철거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개 교통의 불편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도시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경제적 욕심이 큰 몫으로 작용하였다. 성문 주변이나 기존 도로변에 진출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은 성벽 철거를 통해 도시의 요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수원 화성은 비교적 동서남북 사대문의 크기가 커서 차량이 통행할 수 있기 때문에 철거되지 않았다. 경성을 비롯하여 대구, 평양, 전주, 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의 성벽이 사라졌다. 이로써 기존 도시의 틀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214) 김동욱, 『한국 건축의 역사』, 기문당, 2003, p.300. 그러나 수원의 화성(華城)은 온전히 보존되어 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도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확대보기
수원 성곽
수원 성곽
팝업창 닫기

일제 강점기 식민 도시에 대한 행정적 개념은 1913년 부제(府制)의 실시로 본격화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일반적 도시의 관념에 가까운 기존의 부제가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성·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평양·진남포·신의주·원산·청진 등 12곳이 부(府)가 되었다. 이 가운데 전통적인 도시는 경성·대구·평양의 세 곳에 불과하였다. 나머지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전진 기지로서 1876년 이후 일본의 요구로 개항한 곳이었다. 특히 조선의 전통 도시인 개성·전주·진주·해주·함흥·수원 등은 부 승격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서 일제가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한 저의는 조선을 식민지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에 따른 도시의 성장은 식민지 근대 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이렇게 새로이 성장하는 도시에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몰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확대보기
팔달문 앞 거리
팔달문 앞 거리
팝업창 닫기

하지만 조선의 전통 도시도 일본인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점차 식민지 도시화하였다. 이러한 도시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수원과 마산을 들 수 있다. 경기도의 수부(首府)였던 수원은 성곽 도시로 화성이 축조된 이후 신읍치(新邑治)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성안을 구획하는 도로는 전통적인 도시 구획 방법에 따라 십자형으로 계획되었다. 십자형 도로는 수원읍의 핵심적 교통로로, 하나는 북문인 장안문에서 남문인 팔달문을 가로질러 천안으로 이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문인 화서문 부근에서 동문인 창룡문을 거쳐 광주에 이르는 것이었다. 읍치는 십자로가 교차하는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었다.215) 김재국, 「수원 근대 건축의 발달에 관한 연구」, 홍익대 석사학위논문, 1998, p.8 ; 장영실, 앞의 글, pp.19∼20. 그리고 시가의 형성과 산업의 유치를 위해 대로변에 상가를 조성하여 경성과 각지의 부호를 유치하여 장시(場市)를 개설하고 전국의 20여 거상이 모여 상업에 종사토록 하였다.216) 손정목, 『조선시대의 도시사회 연구』, 일지사, 1977, pp.435∼445. 이들은 주로 종로 네거리와 장안문을 잇는 대로변에 상가를 형성하였고, 이를 토대로 도 시 성장의 핵인 중심 상업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로써 수원은 행정·상업 도시로서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일제에게 강점당한 이후 일본 자본이 침략적인 진출을 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식민지의 수도인 서울은 일본의 자본 진출이 가장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따라서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의 경제 침략 실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구한말 이래 서울 지역에서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조건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먼저 볼 것은 서울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1907년 4,884명에217) 『통감부 통계연보』 제1차∼제3차, 1907·1909·1910, p.22. 불과하던 일본인 인구가 1909년에는 3만 2870명, 1910년에는 3만 8397명, 1911년에는 4만 322명으로 빠르게 늘어났다.218)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그런데 서울에 거주하는 민족별 인구수를 직업별로 나누어 보면 상업 인구가 주축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1911년의 한국인 인구의 직업 구성은 농업 인구 3만 2312명, 공업 인구 2만 1490명, 공무 자유업(公務自由業) 인구 1만 2702명인데 대하여 상업 인구가 47.15%인 5만 9329명으로 나타났다. 일본인 인구의 직업 구성은 농업 인구 818명, 공업 인구 7,316명, 공무 자유업 인구가 1만 3016명인데 비하여 상업 인구가 1만 2673명이었다. 다만 공무 자유업 인구가 상업 인구보다 많은 것은 일본인이 관공리(官公吏)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대다수가 중국인이던 외국인의 직업 구성을 보면 농업 인구 183명, 공업 인구 672명인데 비하여 상업 인구가 1,327명이었다. 공무 자유업 인구 272명은 중국인이 아니라 서양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서울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동시에 이들은 주로 공무와 상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 공무 종사자의 협조와 도움을 받아 일본인의 상업 활동이 크게 신장할 수 있는 토대였다. 그리하여 서울의 혼마치(本町)와 같은 일본인 중심의 새로운 상권이 급격히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적 교통수단인 철도망의 개설 및 확충에 따라서 인원 및 화 물(貨物)의 수송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자본주의와 함께 발명된 대표적 교통수단인 철도는 대규모의 상품 유통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국내 시장 형성의 수단으로서 산업 발달을 뒷받침한 가장 중요한 사회 간접 자본이었다.

확대보기
진고개 전경
진고개 전경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혼마치 거리
혼마치 거리
팝업창 닫기

그런데 이 시기 조선의 철도는 일제의 대륙 침략 도구로 부설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철도는 조선 및 중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일제가 펼친 경제적·군사적 포석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철도의 기본 성격 중의 하나인 승객과 화물의 수송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철도 부설 이후 남대문역의 수송 인원수와 수송 화물량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수송 인원수는 1910년에 24만 8140명이던 것이 1911년에는 26만 9957명으로 늘어났으며, 수송 화물량은 1910년에 12만 4583톤이던 것이 1911년에는 15만 971톤으로 증가하였다. 이것은 남대문역이 서울 지역의 승객과 화물을 수송하는 관문 역할을 한 사실을 통계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시대의 주 화물 운송로였던 남한강과 북한강을 이용한 수로도 이 시기 서울 지역의 주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서울 서강면(西江面)의 현석리(玄石里)·신정리(新井里)·하중리(賀中里)·하수일리(下水溢里), 용산면(龍山面)의 마포(麻浦)·도화동외계(桃花洞外契)·형제정계(兄弟井契)·탄항계(灘項契)·토정계(土亭契), 한지면(漢芝面)의 한강리(漢江里)·서빙고계(西氷庫契), 두모면(豆毛面)의 두모포(豆毛浦) 등 북한강과 남한강 수계를 따라 목선(木船)을 이용한 화물 수송도 여전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강을 이용해 운반된 화물은 주로 생활필수품이었는데, 이 밖에도 마포에는 인천과 한강 하류 지방에서 오는 범선이 드나들고 있었다.

확대보기
남대문역
남대문역
팝업창 닫기

이러한 한강을 통한 화물 수송은 철도망이 개설된 이후에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미곡(米穀)의 반입 사례를 중심으로 비교하면 1911년에 서대문역·남대문역·용산역에 도착한 미곡량은 20만 2682석(石)이었던 반면 서강면·용산면·한지면·두모면 등의 계선장(繫船場)에 반입된 미곡량은 30만 3044석이었다.219) 朝鮮總督府, 『京城商工業調査』, 1913, p.127. 철도망 개설 이전에 한강 계선장으로 반입된 미곡량의 통계를 확인하지 못해 직접 비교할 수 없지만 이로 보아 철도망 개설 이후에도 한강을 통한 화물의 수송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일본 상인의 상권이 형성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일본 상인은 새로 부설된 철도를 중심으로 화물 수송을 하였고 조선인은 한강 수계를 통한 전래의 화물 수송 방법을 유지하였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종로와 혼마치로 대별되는 조선인 상권과 일본인 상권의 분리 현상이 운송 수단의 분리에서 기인한 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추론도 가능하게 한다.

한편 일본인의 상업 활동이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로는 통감부와 총독부가 조선의 생활 풍습에 대한 해체 작업을 전개한 영향도 들 수 있다. 본래 생활 풍습은 그 민족이 처한 자연적 조건과 환경 및 역사적 변천에 따라 변모하는 것이다. 조선은 1392년 개국 이래 성리학적인 지배 체제가 확고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신분제에 입각한 생활 방식이 규정되고 적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래 신분제의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고 개항 이후 서구적 생활양식이 도입되자 조선 사회의 신분 관계는 수직적 관계에서 점차 수평적 관계로 바뀌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인이 대량 이입(移入)되는 1910년 이후부터는 기존의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개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서구나 일본의 생활양식이 혼합되어 나름대로 특이한 양태(樣態)가 1945년까지 지속하게 되었다.

서구 여러 나라와 수교하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생활상은 양복의 착용, 외래 음식의 도입, 양식(洋式) 혹은 일본식 주택의 건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조선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서구와 일본의 생활양식이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생활양식은 조선인에게는 ‘근대적’이거나 ‘문명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양복, 양화(洋靴), 양식, 카페 등 서구의 생활양식이 상품으로서 광고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서양 문물이 식민지 조선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