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1. 근대 소비 문화의 형성 배경
  • 박람회의 개최
조성운

일제가 국가 독점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소비층으로서 대중을 자발적으로 동원함과 동시에 국가의 기반 산업을 확장하고 ‘근대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던 것이 박람회(博覽會)이다. 실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박람회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일제는 기차, 버스 등의 교통망을 확충하여야 하였고, 여관업과 음식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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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진신 내지 시찰단(朝鮮縉紳內地視察團) 모집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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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선의 중상류층 인사들을 이른바 ‘내지 시찰(內地視察)’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을 돌아보도록 하였으며,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획득한 이후에는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의 식민지 지배 기구와 경기도, 경상북도 등의 각 도, 각 군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일본 시찰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일본 시찰단의 파견 목적은 일본 근대 문물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고대부터 일본과 조선의 문화가 같은 뿌리임을 강조하여 조선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들 일본 시찰단이 둘러본 주요 시찰 대상은 몇 해에 한 번씩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박람회였다. 바로 이 박람회는 일본 시찰단의 파견 목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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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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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박람회, 공진회(共進會), 전람회, 품평회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박람회를 개최하여 대중에게 일본 문물의 우수성과 조선 문물의 열등성을 강조하는 한편, 대중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새로운 소비층으로 획득하고자 하였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박람회(博覽會)다! 박람회다! 이때를 놓치면 낭패다! 30만 서울은 100만 200만이 된가.

여관업(旅館業)이다. 음식점(飮食店)이다. 평양에서는 기생들이 총동원(總動員)으로 서울에 원정(遠征) 온단다. 술장사! 밥장사! 계집장사! 협심패! 날랑패! 부랑자! 거관 등등등. 이렇게 아직도 석 달이나 남은 박람회의 포스 터를 둘로싸고서 야단법석이다. …… 이렇게 시골, 서울 할 것 없이 박람회만 열리면 무슨 큰 수나 날 것 같이 뒤범벅이 되어 펄쩍 떠든다. 집 팔아 논 팔아 딸 팔아! 박람회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한 달 동안에 거부가 되어 흥청거리고 살아볼 꿈을 꾸는 가엾은 사람! 몰려오는 제2차 공진회 보따리의 눈물에 젖은 쇠푼을 노리고 있는 무리들! 요란한 서울의 그 두 달이 지나간 뒤에 차탄(嗟歎) 비명(悲鳴)이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지만 안으리라는 것을 그 누가 보증하랴. 박람회 박람회! 서울의 ‘일미녀이순’과 일만 가지의 착종(錯綜)되며 움직이는 물체에서 울려 나는 교향악(交響樂)은 이 땅의 잔몽(殘夢)일 것이다.224) 『조선일보』 1929년 6월 8일자.

앞의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일제는 박람회를 통해 새로운 소비층을 창출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기사에서 보이듯이 일제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옛날 15년 전 공진회 때에는 개회 첫날 어마어마하게 입장자가 많았는데 이번 박람회는 왠 세음인지 입장자의 수효가 적어서 표 파는 사람이 하품할 여가가 있는 모양!225) 『조선일보』 1929년 9월 15일자.

즉 조선의 민중들에게 집·논·딸을 팔게 해서 소비를 창출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는 ‘표 파는 사람이 하품’할 정도로 성공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협찬회 지정 여관업자는…… 협찬회로 달려가 방성통곡’하였던 것이다.226) 『조선일보』 1929년 9월 22일자.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열린 박람회를 정리해 보면 표 ‘식민지 조선에서 개최된 박람회’와 같다.

일제 강점기 중 박람회가 가장 많이 개최된 시기는 1920년대였다. 이는 일본이 군사적·정치적인 수단만으로 식민지를 지배하던 것에서 벗어 나 제국주의 본연의 모습이라 할 자본을 통한 식민지 지배가 가능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 국내 잉여 자본의 투자 대상으로서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식민지에 대한 자본 투자는 식민지 본국 자본의 이익을 창출해야 했으므로 식민지 민중을 새로운 소비층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박람회를 통한 소비의 창출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표> 식민지 조선에서 개최된 박람회
연 도 박       람      회
1913 경북 물산 공진회(대구), 서선 물산 공진회(진남포), 평남·황해·평북 연합 물산 공진회
1914 전북 물산 공진회, 함남 물산 공진회, 경남 물산 공진회
1915 시정 5주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경복궁), 부인 박람회, 가정 박람회
1917 조선 양조품 품평회
1922 조선 수이출곡물 공진회, 기차 박람회(인천)
1923 조선 부업품 공진회(경복궁), 부산 수산 공진회(부산), 전국 특산품 진열회(대구)
1924 함흥 물산 공진회(함흥), 북선 연락 지방 물산 공진회(청진)
1925 조선 가금(家禽) 공진회, 진주 공진회
1926 조선 박람회, 과자 사탕 품평회, 경성부 생산품 전람회, 전남 물산 공진회, 조선 면업 공진회(목포), 영동 6군 연합 물산 품평회, 함북 4군 물산 품평회(성진), 가내 공업 전람회(대구), 대일본 산림 대회
1927 조선 산업 박람회
1928 전남 북부 9군 연합 물산 품평회
1929 시정 20주년 기념 조선 박람회
1932 신흥 만몽 박람회(서울), 경남북 연합 임업 진흥 공진회(김천)
1935 조선 산업 박람회, 수산 진흥 공진회(포항)
1936 납량 박람회(부산)
1940 시정 30주년 기념 조선 대박람회, 기원 2600년 봉찬 전람회(서울)
1943 흥아 대박람회(대구)
✽요시미 순야, 이태문 옮김, 『박람회 근대의 시선』, 논형, 2004, 319∼321쪽에서 발췌.

이렇게 대중을 새로운 소비층으로 대상화하는 데에 광고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광고에 나타난 문화적 코드, 가치 등 광고 상품과 소비 문화는 오늘날의 그것만큼이나 다채롭다. 근대 사회의 신문 광고 내용은 부유층과 지식인으로부터 일반 대중에게로 하향 전파되어 가는 소비 문화를 반영한다. 즉 근대의 일상적 차원에서 겪는 경험에 주목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시선에 입각해 근대성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졌던 신문 광고를 통한 소비 창출은 이러한 측면에서 일제의 경제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국가 독점 자본주의로의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소비층을 창출해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고유한 것을 광고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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