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2. 식민지 근대화와 광고
  • 근대 광고의 시작(1881∼1910)
조성운

근대가 우리나라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를 지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여 1910년 조선을 강점할 때까지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근대는 일제의 침략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근대가 제도를 통해 시작되는지, 혹은 제도로서 완성되는지를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제도라는 것이 주체의 필요에 의해 창조될 수도 있고 타자에 의해 강제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제라는 타자에 의해 제도가 강요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 제도는 문명과 야만, 발전과 쇠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강제하면서 조선과 조선인의 열등감을 확대 재생산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근대 제도로서의 광고를 바라볼 때 매우 유용하다. 그것은 광고 속에서 나타난 근대가 서구의 것, 선진적인 것, 과학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이러한 근대는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일본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광고 속에서 나타나는 근대의 이미지는 문명과 야만, 발전과 쇠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좀 더 명확한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이 근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세기 말엽부터라 생각되지만 그것을 식민지 대중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일제 강점기가 아닐까 싶다. 이는 일제의 조선 지배가 조선인들에게 비록 왜곡된 형태이지만 근대의 모습과 생활을 강요한 출발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19세기 말에 소개되기 시작한 서구의 근대 문물에 대한 조선인의 반응,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에 강제한 근대와 근대성 등을 광고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광고는 19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漢城周報)』 제4호에 실린 독일계 회사 세창 양행의 광고였다. 하지만 이 세창 양행의 광고보다 앞서 1881년 12월 10일 발행된 『조선신보(朝鮮新報)』의 천금단(千金丹)과 정진대취차소(正眞大取次所)의 광고가 있었다. 엄밀히 광고의 시기만 놓고 보면 이것들이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최초의 광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광고가 최초의 광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조선신보』가 부산의 개항장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이 조직한 상법 회의소(商法會議所)에서 발행한 신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일본인이 일본어로 발행하였다 하더라도 『조선신보』 역시 조선 내에서 발행된 신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금단 광고를 국내 최초의 상업 광고로 인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창 양행은 앞의 광고를 게재한 이후 7월 25일자 『한성주보』 제23호까지 약 6개월 동안 모두 일곱 번 광고를 게재하였으며, 이어 1886년 6월 31일자에 일본 오사카의 야마자키 가츠지로(山崎勝次郞)라는 일본 상인의 광고와 하마다 상점(濱田商店)의 광고가 실렸다. 특히 하마다 상점의 광고는 이 상점이 인천·부산·원산의 세 항구에 개점한 이래 점차 흥왕하는 것은 조선의 부인네들이 자주 돌아보아 주기 때문이라며 상점의 발전은 조선 부 인의 덕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 상인들이 상품의 판매 대상을 설정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광고에서 ‘고백(告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고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고백’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광고를 뜻하는 최초의 용어가 ‘광고’가 아니라 ‘고백’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광고’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광고주는 일본 상인이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광고라는 용어가 일본의 영향을 받아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성주보』 말고도 당시 조선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獨立新聞)』, 『매일신문(每日新聞)』,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등에도 광고가 게재되었다. 특히 최초의 일간지였던 『매일신문』에는 약국이라 생각되는 위생관에서 광고한 보화단이라는 학질약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에서 위생관은 학질약 이외에도 다양한 약을 많이 구비하고 있으니 애용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구한말 발행된 각 신문에 광고가 게재된 것은 서적, 양담배 히어로(Hero), 자전거, 축음기(유성기), 외국인을 위한 임대 주택, 옷감·양복 등의 수입 의류 등이 있었다.

광고주로는 세창양행 외에도 주지 회사(Tsuji & Co.) 가메야 회사(K. kameya), 정동의 고살기(A Goshalki) 상회, 제물포의 J.Gaillard Jeune 상회, 구마모토 회사, 『그리스도신문』, 한정은행, 칼리츠키 회사(F. Kalitzky &Co.), 개리 양행(開利洋行), 로한은행(露韓銀行) 등의 외국계 회사와 화평당 약방(和平堂藥房), 제생당 약방(濟生堂藥房), 대한은행(大韓銀行) 등의 국내 회사가 있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구한말의 광고는 주로 외국인 회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 『독립신문』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총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10∼14% 정도였으며, 광고되는 상품은 주로 약품과 책이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1900년 이후의 『황성신문』에서는 광고가 총지면의 45∼50%를 차지 하기도 하였다.227) 신인섭·서범석, 『한국광고사』, 나남출판, 2005, p.31.

이렇게 광고가 지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라면 광고가 신문사의 경영에 대단히 중요한 재정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 영문판의 1896년 10월 3일자의 사설에는 1897년 1월 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광고하기 원하는 분에게 지면이 부족해서 이 중요한 사항을 위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렇게 재정을 보충하지 않고서는 신문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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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영문판 광고
『독립신문』 영문판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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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생당에서 발행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의약 전문지 『중외의약신보(中外醫藥申報)』의 창간을 알리는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는 “본보에 광고코저 하시는 첨위(僉位)는 본사 영업부 내 광고부 주임과 면의(面議)하시압”이라 하여 영업부에 광고부까지 따로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당시 신문이 광고의 경제적 효용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각 신문에서는 광고를 유치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독립신문』에서는 “물론 광고 매체로서 독립신문은 급속히 성장하는 한국 무역의 일부를 차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고228) 『독립신문』 영문판 1887년 1월 5일자. 하거나 “광고가 제반 사업의 흥왕하는 데 대단히 관계가 있으니 사방 첨군자(僉君子)는 아무 사업을 하든지 먼저 본 신문사에 와서 광고를 내시오.”라고229) 『독립신문』 1899년 6월 2일자. 하면서 광고의 효용성을 널리 알림으로써 좀 더 많은 광고를 유치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광고의 중요성이 대두하게 된 것은 신문사 경영에 재정적으 로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신문』의 경우를 보면 1898년 1월 현재 세입 예산은 국문판 신문지대 2,444원, 영문판 신문지대 1,100원, 광고료 600원, 전보 수입 600원, 『그리스도신문』 인쇄 청부대 700원, 명함 기타 인쇄 수입 200원으로 모두 5,655원이었다. 이 중 광고료 600원은 전체 수입의 약 11%로 당시 신문사 경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표 ‘『독립신문』·『매일신문』·『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는 광고 단가를 정리한 것이다.

<표> 『독립신문』·『매일신문』·『대한매일신보』의 광고료
신문
구분
『독립신문』
(1899. 6. 1.)
『매일신문』
(1898. 4. 9.)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1905. 8. 11.)
28행(1단) 14행(1/2단) 7행(1/4)
1년 광고료 40원 20원 16원 1개월 1행당 80전
5행 이상 70전(1행당)
10행 이상 60전(1행당)
1일 1인치 50전
1개월 매일 1인치 5원
1년 매일 1인치 50원
6개월 광고료 24원 12원 10원
1개월 광고료 5원 3원 2원
1주일(6일) 광고료 1원 50전 1원 75전
1회 광고료 50전 30전 20전

이 시기에 게재된 광고에는 국문 외에 영문 광고도 있었다. 이것은 조선에 거주하던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광고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일간지에 영문 광고가 거의 게재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당시에 영문 광고가 게재되었다는 것은 광고의 주된 대상으로서 서양인의 의미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광고하는 상품 역시 훈제 연어, 소시지 등 서양인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문 광고는 영문 신문이 발간되었기에 가능하였다. 당시 영문 신문을 발행한 목적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선의 현실을 서양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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