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2. 식민지 근대화와 광고
  • 광고의 기법과 상품(1910∼1945)
조성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에는 광고 상품의 종류, 광고주, 광고 기법 등이 이전 시기에 비해 다양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일제가 식민지 지배 방식을 소위 ‘문화 정치(文化政治)’로 전환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즉 조선 총독부는 3·1 운동의 결과 나타난 민심 이반을 무마하기 위해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가옥이 소실되거나 파괴된 사람들 혹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3·1 운동으로 문란해진 지배 질서를 다시 확립하기 위하여 1919년 8월 관제를 개혁하였다. 관제 개혁의 취지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앞세우며 문화 정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대우 철폐, 은사(恩赦),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위한 조치 등을 취하고자 하였다.230)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新施政』, 1920, pp.1∼6. 또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과 잡지의 창간을 허용하였다.

이 두 신문과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인 일문판 『경성일보』와 국문판 『매일신보』는 주요한 광고 수단이 되었다. 아직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방송이 시작되지 않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수천 부에서 수만 부를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는 절대적인 광고 수단이었다.

당시 광고에는 상품 광고와 오늘날의 공익 광고라 할 수 있는 조선 총독부 및 관변 단체의 정책과 사업을 홍보하는 광고도 있었다. 물론 광고는 상품 광고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선 총독부 및 관변 단체의 정책이나 사업을 홍보하는 광고 중 1910년대 두드러지는 것으로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주최한 일본 시찰단의 광고가 있다. 이 광고는 사고(社告)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일본 시찰단이 1910년대 조선 총독부가 식민지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계획하였던 핵심 사업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광고가 식민지 지배의 한 수단으로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시찰단에 대한 『매일신보』의 광고에는 조선 총독부의 의도가 드 러나 있다. 1914년 조선 진신 내지 시찰단(朝鮮縉紳內地視察團)에 대한 『매일신보』의 광고는 3월 4일부터 3월 13일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게재되었다. 광고의 내용은 모두 동일하며 다음과 같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今回(금회) 兩社(양사) 主催下(주최하)에서 朝鮮側(조선측)의 縉紳(진신) 一百名(일백명)을 選拔(선발)하여 縉紳內地視察團(진신내지시찰단)을 組織(조직)하여 母國(모국) 各地(각지)의 實況(실황)을 視察(시찰)코져 하는 所以(소이)가 盖玆(개자)에 在(재)하도다. 時(시)는 陽春(양춘) 三月(삼월)이 百花爛漫(백화난만)의 好時節(호시절)을 卜(복)하여 少額(소액)의 會費(회비)로써 家族的(가족적)으로 組織(조직)된 視察團(시찰단)이 行程(행정) 約三千里(약삼천리) 朝鮮一萬五千里(조선일만오천리)이오 旅行日字(여행일자) 二十有一日(이십유일일)로 大正博覽會(대정박람회)를 爲主(위주)하여 到處(도처) 大規模(대규모)의 農工場(농공장)을 見學(견학)하며 兼(겸)하여 進步(진보)한 內地(내지)의 文物制度(문물제도)를 視察(시찰)하며 又或(우혹) 山紫水明(산자수명)의 名所古蹟(명소고적)을 探勝(탐승)하는 등 趣味(취미)와 實益(실익)을 倂得(병득)할지니 그 效果(효과)는 如何(여하)히 多大(다대)할까. 左(좌)에 視察團(시찰단)의 內規(내규)를 揭(게)하여 諸士(제사)의 贊同(찬동)을 希望(희망)함.

또 1918년에는 3월 12일부터 4월 14일까지 규슈(九州) 시찰단에 대한 광고를 10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이 광고는 1914년의 것과는 달리 광고의 내용이 일자에 따라 달랐다. 3월 12일자에는 시찰단 조직의 배경과 목적, 일정, 교통편, 회비, 단원의 자격 등을 광고하였고, 3월 19일자에는 ‘시찰단을 환영하는 구주’라 하여 시찰단에 대한 규슈의 환영회 일정을 소개하였으며, 3월 20일·27일·29일자에는 ‘구주 시찰단 규정 계획’이라는 제목으로 광고하였다. 이에 따르면 규슈 시찰단은 “전선에 걸쳐 지식 계급의 일 선진신(日鮮縉紳)을 망라”하여 “일(日)로 월(月)로 증진발전(增進發展)하여 가는 활기횡일(活氣橫溢)의 신구주(新九州)를 시찰”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4월 6일·11일·14일자에는 시찰단의 일정표가 제시되었으며, 4월 13일자에는 시찰단에 참가하라고 독촉하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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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시찰단 광고
규슈 시찰단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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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선 총독부 및 관변 단체의 정책이나 사업을 홍보하는 광고는 1937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후 조선에서 시행하였던 강제 동원 정책의 시행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매일신보』에는 직업소개소라는 이름의 직원 모집 광고가 1941년 1월 31일부터 1945년 7월 31일까지 610회에 걸쳐 게재되었다.231) 고쇼 타다시, 「조선인 강제 연행과 광고 모집」, 『한일민족문제연구』 3, 2002, p.221. 광고 모집을 적극적으로 행한 주체 중 조선 내의 공장은 일본 질소 비료(日本窒素肥料) 관계 공장, 일철 청진 제철소(日鐵淸津製鐵所), 삼릉 광업 청진 정련소(三菱鑛業淸津精鍊所), 욱초자 청진 공장(旭硝子淸津工場), 조선 이연 금속 공장(朝鮮理硏金屬工場), 종연 공업 평양 화학 공장(鐘淵工業平壤化學工場), 일본 고주파 공업(日本高周波工業), 삼릉(三菱) 마그네슘, 조선 주우 경금속 원산 공장(朝鮮住友輕金屬元山工場), 조선 비행기 공업(朝鮮飛行機工業) 등이 있으며, 일본 본토의 기업으로는 주로 토목 사업, 탄광 광산, 일본 강관(日本鋼管) 등이었다. 이러한 광고 모집을 주도한 것은 경성 직업소개소였다. 전체 광고 모집의 절반 이상이 이 직업소개소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모집 광고는 관알선기(官斡旋期)인 1943년부터 1945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로 보아 모집 광고를 통한 노동자 동원은 조선 총독부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에 아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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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동원 광고
강제 동원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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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상품 광고에서는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를 엿볼 수 있다. 1944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비타민제인 와가모도라는 약 광고에는 “결전보육(決戰保育)” “일생의 건부(健否)는 유아기에 결정된다.”는 헤드 카피 아래 다음과 같은 서브 카피를 서술하였다.

營養不足(영양부족)을 恢復(회복)하고 決戰增産(결전증산)에 每每挺身(매매정신)

連續決戰(연속결전)에는 連續增産(연속증산)으로써 報答(보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타민 B가 부족하면 벗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저항력이 감퇴되어 助腸炎(조장담)과 肺結核(폐결핵)과 같은 결핵병과 폐렴 같은 呼吸器病(호흡기병)에도 걸리기 쉬우므로 빠지지 말고 와카모토를 사용하여 주시압!

결국 이 카피대로라면 어린이를 건강하게 기르는 목적은 바로 침략 전쟁을 수행할 새로운 세대를 키우는 데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사례는 유한 제약 공업 주식회사(柳韓製藥工業株式會社)의 이와돈이라는 약품 광고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광고는 여성이 건강해야 할 이유를 전력 증강에서 찾으면서 다음과 같이 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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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가모도 광고
와가모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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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포스터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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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力增强(전력증강)에 必然的(필연적) 條件(조건)은 연속 근무와 연속 체련이 요구되겠다. 가사에 직장에 튼튼한 몸으로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부인병 제 질환을 內因的(내인적)으로 치유할 것입니다.232) 『매일신보』 1944년 7월 5일자 4면 이와돈 광고.

그리고 이러한 광고는 영화 포스터나 극단의 공연 광고에서도 자주 보인다. 극단 예원좌(藝苑座)의 ‘어머니의 기원(祈願)’이라는 연극의 공연 광고에는 『매일신보』의 현상 공모작인 같은 제목의 노래 제3절 “어머니는 웁니다. 오늘은 군가(軍歌)로 화답하오니 내 품에 안기어 듣던 자장가 사나이 장부로 세상에 태어나서”라고 광고하였다. 연극을 비롯한 공연 예술은 대 중과 대면하면서 감성에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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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단 광고
인단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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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상품 광고를 일제의 침략 전쟁에 이용하는 것 외에도 아예 침략 전쟁을 광고하는 사례도 보인다. 예를 들어 인단(仁丹, 은단) 광고에서는 인단에 관한 카피는 전혀 없이 “총후(銃後)의 맹공(猛攻)”, “일억의 배치는 완전하다. 오직 매진진멸일로(邁進塵滅一路)! 대증산(大增産)에 정신(挺身)하자.”고233) 『매일신보』 1944년 3월 4일자 3면 인단 광고. 선전할 정도였다.

조선 총독부 및 관변 단체의 정책이나 사업을 홍보하는 『매일신보』의 광고는 먼저 조선과 조선인은 열등하며 일본은 선진 문물을 가진 우등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것은 ‘진보한 내지의 문물제도’ 혹은 ‘일(日)로 월(月)로 증진발전(增進發展)하여 가는 활기횡일(活氣橫溢)의 신구주(新九州)’라는 표현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려는 의도가 상품 광고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매일신보』의 인식은 단지 일개 신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정책 홍보성 광고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전 시기를 통해 상품 광고에도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광고 속에서도 근대는 곧 선진적인 것, 문명적인 것, 과학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 광고의 기법 중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광고의 표현 방법으로는 일러스트레이션, 기사형 광고, 시리즈로 된 캠페인, 우편 주문 광고, 섹스를 이용한 광고 등이 있었고, 기린·삿포로·인단·용각산·카오 비누·포드 자동차·모리나가·아지노모도 등의 브랜드 광고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광고는 근래 ‘식민지 근대(성)’라는 관점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예를 들어 패션의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춘향에게 끌린 것은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령이 춘향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광한루에서 그네를 뛸 때인데 멀리서 미모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도령이 마음을 빼앗긴 것은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벗어 던지고 구름같이 땋은 머리로 그네를 뛰는 춘향의 자태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도령은 춘향의 옷차림새에 매혹되었다. 만약 춘향이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벗어 던지지 않았고 구름 같은 머리를 하지 않았다면 이 도령은 춘향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처럼 옷차림새는 사람의 이미지를 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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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철도국 광고
조선 총독부 철도국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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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에서 이러한 옷차림의 이미지는 이른바 모던 걸과 모던 보이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개성이 근대적 개인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중심에 놓임으로써 근대적 패션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된 사실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 패션의 개념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구사한 근대의 한 전략이기도 하였다. 근대가 곧 서구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속성을 가졌으므로 근대적 패션 또한 서구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속성을 갖는 것이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 소개된 세 가지 사례를 보도록 하자.

단발랑(斷髮娘)들의 기풍을 보면 결코 단발은 사랑 뿐만을 위하여 하는 것이 많으며 구미 각국에 단발이 유행하고 양장에 쓴 단발이 어울리는 이 세대에 와서는 단발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요 생명을 자르느니만큼 쓰린 일이 되지는 못 한다. 무엇보다도 단발한 여자가 그 남자와 평생을 같이 하기커녕 일 년의 사랑을 지탱하지 못하는 역사를 거듭 볼 때에 단발로써 굳세인 사랑의 표증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234) 장발산인(長髮散人), 「단발여보(斷髮女譜)」, 『별건곤』 9, 1927년 9월, pp.77∼79.

유행이라면 미리 악을 쓰는 요새 신여성들이 유선형(流線型)이라면 장옷이나 만또를 엇대 다시 두르지 않는지 모르겠다. …… 이제는 코 떨어지고 귀 떨어진 사람들도 장가나 시집가기 좋은 때가 온 것이요, 도야지가, 시체 가정을 출입하게 될 것도, 그 도야지란 놈이 그야말로 유선형인 까닭이다.235) 석영생, 「표준 달라진 미남미녀씨 유행-유선형 시대」, 『조선일보』 1935년 2월 5일자.

요즈음 서울의 거리에 신여성의 내왕이 부쩍 늘었다. 그중에도 이따금 양(洋)비단의 혼란한 색채와 무늬로 시중의 주목을 이끌면서 압도적 ‘에로’를 방산하고 지나가는 정체 모를 여인들 하고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영광이여! 정체를 모르는데 고아한 맛이 있거든 아무튼지 신앙은 무지에서 생긴다.236) 로아, 「새로운 경향의 여인 점경」, 『별건곤』 34, 1930년 11월,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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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걸 제3기
모던 걸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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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유선형이란 신여성의 행동 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 유선형은 총알이나 대포의 생김새에서 따온 말로 식민지 지배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즉 총알이나 대포처럼 빠른 속도를 가진 물건이 유선형이므로 당시 유행에 따라 급격하게 변신하고 변덕을 부리던 신여성의 외양을 비판하는 용어로 썼던 것이다. 이처럼 신여성은 자신의 외양을 유행에 따라 재빨리 바뀌었다. 이러한 유행에 대해 당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행이란 참말 이상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금욕케 하고 자율적으로 인고케 하는 점에 있어 고승(高僧)이나 목사(牧師)의 설교 이상의 힘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점에 있어 여하한 법률보다도 더 우세의 힘을 가졌습니다. …… 범인(凡人)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해서 시대의 첨단을 걸어가려는-즉 소위 첨단광(尖端狂)은 이 종류에 속하는 것입니다.237) 무명초(無名草), 「생명을 좌우하는 유행의 마력」, 『신여성』 1931년 11월, pp.64∼67.

또 권구현와 안석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행이라는 것은 그 이름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염병 같은 것이니 한 번 미균(黴菌)이 발생만 하면 어떠한 힘으로도 막으려야 막을 수 없이 일사천리의 세(勢)로 쑥-퍼지고야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엄청난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니…….238) 권구현, 「새해에 올 유행 중의 한 가지―신유행 예상기」, 『별건곤』 11, 1928. p.94.

대학 졸업생 거지반이 취직을 못하여 거리로 방황하는 여기에 여자들은 치마 한 감에 삼사십 원, 양말 한 켤레에 삼사 원, 손가락에 끼인 것만 해도 이삼백 원, 머리에 꽂은 것만 해도 오륙백 원, 얼굴에 칠하는 것 중에 분갑만 해도 아침 분, 낮 분, 밤 분 해서 사오 원, 머리만 지지는 데도 일이 원이라 하고, 초가집을 나서서는 오던 길을 또 가고 가던 길을 돌처서서 대활보로 걸어가는 것이 소위 요사이 모던 걸이다.239) 안석영, 「어디서 그 돈이 생길까―일일일화(一日一畵)」, 『조선일보』 1930년 4월 8일자.

일제 강점기의 사람들은 유행은 ‘고승이나 목사의 설교 이상의 힘’을 가져서 ‘전염병’처럼 많은 사람을 감염시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유행은 속성상 생명력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유행의 속성을 이용해 상인은 동일한 물건을 외양만 바꾸어 신제품이라 광고함으로써240) Y생, 「평론―유행에 대하여」, 『신여성』 1926년 10월, p.11. 자기 상품을 소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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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의 유행
명일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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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패션이 유행하던 당시에 여론은 유행의 선두 주자인 모던 걸과 모던 보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유행이란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상품을 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사업자는 광고를 통해 자기 상품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던 것이다. 특 히 유행을 선도하는 것 중의 하나인 화장품은 더욱 그러하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화장품인 박가분 광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인 화장품 유일

부인 화장품 제일

조선 부약품 공진회 상패 수령한 박가분을 사실 때는 등록 상표를 반드시 보시고 사시옵소서.

살빛이 고와지고 주근깨 없어지는 박가분을 화장하실 때 잊지 마시옵.241) 『동아일보』 1924년 1월 12일자 광고.

부인 화장계에 사랑받는 박가분

최고한 역사가 있는 박가분을 바르시면 살빛이 고와집니다.

상패 받은 박가분을 사실 때는 등록 상표를 자세히 보소서.242) 『동아일보』 1924년 11월 12일자 광고.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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