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3.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대중 소비 문화의 형성
조성운

우리나라의 초창기 매스 미디어 문화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립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중 음악과 영화, 방송 등 미디어 체제가 일제 강점기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중 음악은 일본 대중 가요에 의해 초기의 원형적 형식이 만들어졌고, 이후 오랫동안 우리나라 대중 음악에서 일본식 음계와 정서를 가진 대중 가요가 주류를 이루어온 바 있다.

그러나 8·15 광복에서 미군정, 6·25 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새로이 미국문화가 들어와 구도가 재편되어 갔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이래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던 일본식 대중 문화가 자리를 상실하면서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양식 대중 문화가 주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광복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기부터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미군정이 방송을 직접 장악하여 관리하였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방송에 대한 미군정의 통제는 일제 강점기보다 오히려 더 강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방송은 최소한 조직상으로 조선 총독부로부터 독립된 법인인 조선 방송 협회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미군정하에서 방송은 완전히 미군정청에 소속되어 일종의 국영 체제 형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미군정청이 방송을 직접 장악한 것은 방송을 매우 유용한 선전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라디오가 (모든 매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한국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10월 중순에 미군들을 위한 별도의 방송국이 설치된 이후부터 서울 중앙 방송국(JODK)은 한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방송할 수 있었다.243) USAFIK, Pt.2, Ch.1, p.51(강대인 외, 『광복 50년 한국방송의 평가와 전망』, 한국방송개발원, 1995, pp.95∼124 재인용).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군정청은 가장 많은 한국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를 라디오 방송이라 판단하고, ‘한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방송하였다. 여기에서 ‘한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은 단지 미군정의 정책을 홍보할 목적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미국의 ‘선진’ 문화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들어있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제작된 프로그램은 철저히 미국의 시각을 반영한 보도 프로그램과 미국 상업 방송의 프로그램 형식을 도입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 무렵 라디오 방송을 비롯한 매스 미디어 체제가 대중의 문화적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라디오는 결코 대중적인 매체가 아니었고 도시에 사는 일부 부유층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우리나라에서 보유하고 있는 라디오 수상기는 남한 지역이 15만 1800대 정도였고 북한 지역이 7만 6100대 정도였다.244) 유병은, 「한국 방송 50년」, 『신문평론』 76∼77, 한국신문연구소, 1977, p.88. 또 1948년 8월 현재 대한 방송 협회에 등록되어 있던 라디오 수신기는 15만 6700여 대였다. 아직 라디오 방송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매스 미디어라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따라서 문화적 영향력도 오늘날의 매스 미디어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였다. 다시 말하면 광복 후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농촌 지역은 여전히 전통 사회의 토대 위에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매스 미디어 문화가 아직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미국의 대중 문화에 대한 한국 민중의 접촉 역시 일부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그리 활발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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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미국의 대중 문화를 단기간에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린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었다. 전쟁은 매스 미디어 체제가 채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다수의 대중이 미국 문화를 직접 대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소한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할 때까지 친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면서 미국과 미국 문화는 최고이며 지선(至善)이라는 맹목적 관념과 동경을 가지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즉 미국이 ‘북한의 적화 야욕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준’ 은혜의 고마운 나라라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미국관은 6·25 전쟁을 통해 한국 사회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245) 특히 ‘미국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최근 한미 간의 주요한 현안이 대두할 때마다 친미주의자,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나오는 단골 메뉴이다. 이들은 미국이 6·25전쟁 이후 한국을 도와 오늘날의 한국이 건설될 수 있었다고 하면서 ‘미국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국 사회의 주류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친미’라는 주의와 주장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파병의 경우는 한국이 ‘미국의 은혜’를 갚기 위해 국내적인 반발을 무릅쓰고 ‘감행’하였다는 사실을 평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 증명되지 않은 현실에서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의 규모는 미국과 영국의 뒤를 잇는 3위에 해당하며, 일본과 유럽의 여러 나라가 철군을 발표한 상황에서도 계속 주둔을 결정한 한국의 입장은 ‘미국의 은혜’에 대한 ‘보은’이라는 차원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맹목적 친미 이데올로기는 미국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 심리를 낳았고 이후 한국 대중 문화가 미국 대중 문화의 영향권 속으로 편입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6·25 전쟁의 종전 이후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전국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부대와 1957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공중파 방송인 주한 미군 방송(AFKN)을 통해 미국의 대중 문화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은 채 한국 사회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또한 주한 미군을 위안하기 위해 조직된 미8군 무대는 한국 연예인에게는 대중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실제 이 무대를 통해 대중적인 스타로 성장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246) 미8군 무대를 통해 대중적인 스타로 떠오른 인물은 이봉조·길옥윤·신중현 등의 작곡가와 연주가, 한명숙·현미·최희준·위키리·패티김·유주용·박형준 등의 가수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미국 유명 가수의 흉내와 모방을 통해 트로트보다 세련된 느낌의 미국식 대중문화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김창남, 『대중문화의 이해』, 한울, 2005 참조). 그리하여 1960년대 이후 방송에 진출한 미8군 무대 출신 연예인들에 의해 한국 사회는 본격적으로 미국식 대중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한국 대중 문화의 주류였던 일본식 문화가 탈색되는 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식 대중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쪽에서는 미국식 대중 문화가,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식 대중 문화가 병존하면서 때로는 뒤섞여서 국적불명의 문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6·25 전쟁은 한국 사회에 냉전적 반공주의가 확고히 뿌리 내리게 만든 결정적 경험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북의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따른 남북한의 군사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세계적인 냉전 구조와 맞물리면서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확대 재생산하였다. 남북 간의 체제 대립은 한국 사회의 절대적인 규정력으로 작용하여 다른 어떠한 가치나 이념에 우선하였다.

문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분단과 체제 대립에 기초한 냉전적 반공주의가 기본적인 이념으로 강제되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검열과 통제의 논리가 정당화되었다. 실제 이 시기의 검열과 통제는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강하 였다. 일제 강점기의 검열과 통제는 주로 ‘신문지법’이나 ‘치안 유지법’ 등에 의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정간 혹은 폐간하는 등의 직접적인 탄압을 위주로 하였으나, 이 시기에는 직접적인 탄압 외에 경제적인 방법을 비롯한 간접적인 탄압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대중 문화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반공주의, 친미주의,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항구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 마련된 검열 구조는 이제 냉전주의적 분단 구조를 유지하는 도구 역할을 하면서 이후 한국 대중 문화의 다양한 발전을 억제하였다.247) 6·25전쟁 이후 검열의 가장 큰 기준은 반공주의였다. 그리하여 많은 문화 작품이 사직 당국에 고발되거나 검열에 의해 삭제·금지 당하였다. 이러한 검열의 주요 대상은 대중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가요나 영화분야였다. 그리하여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도 5·16군사정변 이후 상영 금지되었다. 결국 한국 사회에 미친 6·25 전쟁의 영향은 단지 과거에 겪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면서 동시에 한국 대중 문화가 피할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1950년대의 냉전적 반공주의는 1960년 4·19 혁명의 결과 민주당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나 민주당 정권은 불과 1년 만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의 5·16 군사 정변으로 붕괴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1960년대는 4·19 혁명으로 싹트기 시작한 민주주의가 좌절하는 시기이자 군사 정권에 의해 경제 성장 혹은 ‘근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부족한 정통성을 ‘근대화’와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막아 내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밑으로부터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개발’의 논리를 앞세워 군사 독재를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이를 한국 사회 전반에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매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1961년 문화 라디오, 1963년 동아 라디오, 1964년 동양 라디오 등 라디오 방송국이 각각 개국하였다. 그리고 1961년 KBS-TV, 1964년 TBC-TV, 1970년 MBC-TV 등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하여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시대가 열렸다. 이로써 정권의 측면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책을 홍보·선전하고 민중의 저항을 통제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과 방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1960년대에는 대중적 주간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하여 황색 저널리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배출하는 출구로서 마련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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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TV 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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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1960년대는 라디오, 텔레비전, 대중 잡지 등으로 매스 미디어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양적인 측면에서도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매스 미디어의 정비와 통제를 목적으로 1963년 ‘방송법’이 제정되어 방송국의 감독 및 시설 허가를 명시하고 방송 윤리 위원회를 설치하여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는 등 제도적 틀이 마련되었다.

매스 미디어의 발전과 그에 따른 제도적 틀이 마련된 1960년대는 수출 주도의 경제 정책이 일정한 성과를 보이면서 1970년대의 대중 사회로 발전하였다. 이는 한국 사회가 상품화된 대중 문화를 수용하고 즐기는 단계로 이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대중 문화를 대중에게 전하는 매스 미디어의 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매스 미디어는 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기본적인 수익 구조이므로 매스 미디어에 광고를 게재하는 광고주의 영향력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이들 광고주 즉 독점 자본에게 군사 독재가 절대적인 영항력을 행사하던 시기였으므로 결국 매스 미디어에 대한 군사 정권의 지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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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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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미디어의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짐으로써 대중 문화의 생산·유통·소비의 구조적 기반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970년대 라디오 보급 대수는 1970년 401만 2000대, 1975년 1350만 9000대, 1979년 1488만 대로서 인구 1,000명당 약 400대가 보급되었다. 텔레비전은 1970년 37만 9564대에서 1973년 128만 2122대로 100만 대를 넘어섰으며, 1975년 206만 1072대, 1979년 596만 7952대가 되어 전체 가구의 79.1%에 보급되었다. 이처럼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빠른 속도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1966년 박정희 정권이 전자 산업을 수출 육성 산업으로 지정하여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면세 혜택을 주어 1968년부터 텔레비전 수상기의 국내 조립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부터 신문 광고를 비롯한 광고 시장에 국산 라디오와 텔레비전 수상기 광고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매스 미디어의 보급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경제 성장과 함께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경제 성장은 철저히 자본가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일반 민중은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하였다. 급기야 일반 대중들의 민심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특히 1970년에 발생한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은 저곡가·저임금 정책에 기초한 경제 개발 정책에 대한 노동자와 농민이 생존권을 온몸으로 절규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종교계, 노동계, 재야를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생존권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자본가 위주의 개발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동시에 국제 사회도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며 압력을 가하여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위기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른바 ‘10월 유신’의 단행을 통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한 배경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경제 성장 정책의 폐해를 군사적인 방법을 동원해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즉 산업화의 급격한 추진으로 인한 대자본 편향의 무분별한 외자 도입 정책과 수출 진흥 정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설 과잉을 초래하였다. 이는 외채 상환의 압박 및 긴축 정책과 더불어 금융 공황적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1969년 차관 기업의 부실화 문제를 시작으로 점차 현실화되었다. 둘째는 1960년대의 경제 발전은 대자본을 위주로 한 저곡가·저임금에 바탕한 수출 지향적 산업화였기 때문에 1970년대 초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층의 생존권 문제가 절박하게 대두하였다. 예를 들어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 체불 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파월(派越) 노동자들의 대한 항공 빌딩 방화 사건 등은 대중들의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셋째는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반도 주변의 긴장 완화 기조는 1970년 2월 미국의 아시아 개입 정책의 후퇴를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의 발표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남북 관계도 급속히 진전되어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와 같은 국제적 긴장 완화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국내 반공 체제의 이완이 정권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였다. 넷째는 박정희와 그 지지 세력의 장기 집권 의도를 들 수 있다. 장기 집권을 위한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해 야권은 19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이와 더불어 재야 및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심지어 여권 내부에서도 10월 유신을 둘러싼 권력 갈등의 결과 국회에서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오치성(吳致成)에 대한 해임 결의안을 가결시킨 ‘항명 파동(抗命波動)’ 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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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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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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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하에 단행된 10월 유신의 결과 박정희 정권은 잘 훈련된 기술 관료, 군인, 경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국력을 결집하고 능률과 규율을 제고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국가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적 요구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대중 문화도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73년 말에 공표된 제1차 문예 진흥 5개년 계획은 이 시기 문화 정책의 기본 방향을 알려 준다. 이 계획은 올바른 민족 사관의 정립과 새로운 민족 예술의 창조, 예술의 생 활화와 대중화를 통한 국민의 문화 수준 향상, 문화 예술의 국제 교류 활성화를 통한 ‘문화 한국’의 국위 선양을 목적으로 하였다.248) 김창남, 앞의 책, p.141.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문화를 10월 유신의 홍보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직후 각 방송사에 “국론 통일을 저해할 정치적 사건의 소재 선택을 피하도록 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방송과 신문 등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를 위해 유신 정권은 방송 윤리 위원회, 신문 윤리 위원회, 도서 잡지 주간 신문 윤리 위원회, 공연 윤리 위원회 등을 정권의 입에 맞게 설치하거나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대중 문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과 검열은 더욱 적극적이고 억압적인 형태로 강행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유신 이후 한국의 대중 문화는 정권의 독점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긴급 조치’가 남발되던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 분위기가 극도로 경직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던 대중 문화에 대한 통제 역시 더욱 강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중반에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중 문화에 대한 정권의 강력한 통제가 실시되었다. 이른바 ‘통기타 가수’와 일련의 연예인들에 대한 탄압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사실 당시 젊은층에서 유행하던 청년 문화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청년 문화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던 진보적인 학생 운동과 청년의 저항 속에서 나타난 일련의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이 시기 청년들은 청교도적인 기성세대와 지배 질서에 저항하면서 반전, 평화, 흑인 인권, 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서구 사회의 흐름이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미니스커트, 통기타 가요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 시기 청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신 정권의 억압 구조 속에서 한국의 대학생과 청년층의 저항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해 유신 정권은 청년들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였으며, 방송 프로그램과 연예인의 외국식 이름까지도 규제하였다. 예를 들면 ‘MBC 페스티벌’은 ‘MBC 대향연’, ‘가요 스테이지’는 ‘가요 선물’, ‘MBC 그랜드 쇼’는 ‘토요일 토요일 밤에’, ‘일요 모닝쇼’는 ‘이 주일의 화제’로 바뀌었으며, 연예인들의 예명도 ‘어니언스’는 ‘양파들’, ‘패티김’은 ‘김혜자’, ‘바니걸스’는 ‘토끼 소녀’, ‘펄시스터즈’는 ‘진주 자매’ 등으로 어쩔 수 없이 바꾸어야만 하였다.

또한 1975년 대마초 사건과 대중 가요의 재심사에 따라 당시 대학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신중현의 ‘거짓말이야’, 이장희의 ‘그건 너’, 김민기의 ‘아침 이슬’ 등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였다고 인식되던 88곡이 금지곡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팝송에 대한 규제 조치도 발표되어 저속성과 퇴폐성을 기준으로 161곡에 대해 방송 및 음반 발매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러한 대중 가요에 대한 탄압은 1960년대 말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른바 ‘가요 정화 대책’의 대표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신중현의 노래는 이미 1969∼1974년 네 곡이 금지되었고 1975년 한 해에만 17곡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249) 이러한 대중 음악에 대한 탄압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저항과 반전의 내용을 담았다고 하여 1975년 대중 가요 심의 때 ‘Blowing in the Wind'의 미국 팝가수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91곡을 금지시킨 사실이다. 이는 당시의 검열 기준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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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과 엽전들 앨범
신중현과 엽전들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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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와 같은 대중 문화에 대한 억압과 탄압은 ‘대마초 사건’으로 정당화된 측면도 없지 않다. 대중 가요의 재심사와 대마초 사건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중 가요 재심사에서 금지곡으로 선정된 노래는 김민기, 송창식, 한대수, 양희은 등의 통기타 가수와 신중현, 정훈희,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김추자, 박인수, 장현, 이수미, 김정호 등 대마초 사건 에 관련된 가수들의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청년층의 정서와 의식을 대변한다고 인식되던 인기 가수였다. 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은 이들 가수뿐만 아니라 영화배우, 코미디언 등 대중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이에 대해 신중현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1976∼79년 뭐든지 하지 말라고 했어. 앨범도 못 내고 녹음·연주도 안 돼. 항상 사람이 따라붙었어. 술만 퍼마셨지. 악기며 집 다 팔고 셋방 살았어. 한창일 때 금지돼 버리니까 온통 절벽이야. 오직 미8군과 송탄 미군 기지에서만 받아 주더군. 75년께 우리나라 음악이 세계적인 수준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 뒤 5년 동안 금지곡이 많으니까 방송국에선 흘러간 노래를 틀었지. 트로트가 다시 왔어. 실업자가 돼서 서울 남영동에 자장면 먹으러 갔는데 방 안에서 고등학생들이 트로트를 불렀어. 다른 노래들은 잊혀진 거야. 너무 슬퍼서 자장면도 다 못 먹고 나왔지.250) 『한겨레신문』 2005년 12월 1일자.

그런데 신중현은 이 증언을 하면서 1972년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정권 측의 부탁을 거절하였다고 밝혔다. 바로 이 때문에 신중현에 대한 탄압이 다른 가수에 비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대중 가요를 비롯한 대중 문화에 대한 정권의 억압과 탄압이 강해진 것은 그만큼 대중에게 미치는 대중 문화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것은 동시에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이 증가하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곧 문화를 소비할 만큼 대중의 소득 수준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1970년대에는 문화에 대한 소비가 가능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민중의 자유로운 정치 활동과 문화 활동에 대한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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